이란에서 열린 비동맹운동(NAM) 외교장관 회의에서도 최종 문서에 '10.4 공동선언에 대한 지지'만을 넣으려는 북한에 맞선 외교전으로 "과거 모든 남북 공동성명 및 합의서에(…)지지를 표명했다"는 말을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10.4선언에 관한 문구만 들어가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비판할 여지가 많고, 국제 외교무대에서 냉전적 남북 대결을 재현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목표한 바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정부로서는 '성공'이라 할 만하다.
이유 있는 환호
즉시 자화자찬의 말이 쏟아졌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의 공식 논평이 가장 높은 톤이었다. 그는 독도 영유권 표기 원상회복에 대해 "한미동맹 복원과 신뢰회복의 결과"라며 "특히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가 취해진 것은 한미 양국 정상간 깊은 신뢰와 우정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는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 미 지명위원회는 여전히 독도를 '리앙쿠르 암(岩)'으로 표기하고 있고, 지도에서는 여전히 '리앙쿠르 암-다케시마'를 쓰고 있다. 미 국무부는 독도에 관한 미 행정부의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의 정책이란 독도는 분쟁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이번 원상회복 조치는 '주권 미지정 지역'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1주일 전의 불완전했던 상황으로 되돌려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이 가야할 길은 여전히 멀다.
그렇다 하더라도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환호할 이유는 인정된다. 그걸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태식 주미대사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소매를 잡아끌어 시정을 요구하는 등 외교력을 발휘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사무소 공지문도 한번 발표되면 번복하기 어려운데, 미국 연방 기관의 조치를 번복케 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 사태가 발생한 직후인 지난 27일 "기술적인 문제라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원상회복 여부는 외교력에 달렸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이 실현됐으니 그 정도 자화자찬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미동맹 복원' 신념 강화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관 대변인은 샴페인을 너무 크게 터뜨렸다. 이번 조치가 "한미동맹 복원의 결과"라고 규정한 그의 논평이 그렇다.
이 대변인의 말은 한미동맹을 복원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여기는 이명박 정부의 전제가 유효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것은 곧 대미외교에 있어 이른바 'ABR'(Anything But Roh, 노무현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를 계속 하겠다는 논리로도 연결된다.
이처럼 청와대가 이번 독도 사태로 인해 '복원'의 관점이 옳았음을 정당화한다면, 향후 한미관계에서는 그것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될 공산이 크다. 이는 또 한 번의 외교적 재앙을 예고한다. 한미동맹 복원과 한미 FTA 승인을 위해 쇠고기 검역주권을 미국에 선물했던 식의 대미외교가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쇠고기 파동에 이어 독도 문제에서도 미국이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된 것은 어디에선가 한국 정부의 부담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이번 독도 원상회복 조치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지 않았느냐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달 5~6일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데니스 와일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은 30일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를 발표했다. 주한미군 지위변경 문제,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의 평화정착을 위한 한국의 지원 문제, FTA의 조속한 의회 비준 문제 등이다. 정상회담에서는 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미사일방어망(MD) 참여 문제 등도 논의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비록 일각에서 가장 우려했던 '21세기 한미 전략동맹'을 약속하는 '한미동맹 미래비전 선언'이 채택될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위의 의제들만 보더라도 한국으로서는 하나같이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사안들이다. 그만큼 휘발성이 높다.
이처럼 만만찮은 주제를 다룰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조치에 '사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리고 한미동맹의 '복원'을 위해 또 한 번 무리수를 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미 정상 밥상에 미국산 쇠고기가 오른다?
이같은 상황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민주당 의원의 고언은 이명박 정부가 새겨 들어야 할 말 중의 하나다.
송민순 의원은 31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관계의 건강한 발전방향' 토론회에서 "외교·안보 정책이 과거 정책의 부정이라는 스스로의 덫에 걸려 극히 좁은 선택지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한미관계를 무너진 것이라고 여기는 현 정부의 인식을 비판한 것이다.
송 의원은 "축구 경기로 비유하자면 상대방은 운동장 전체를 다 쓰는데 우리는 반쪽 밖에 못 쓰는 족쇄에 빠져 있다"며 "상대방은 한국의 정책이 어떤 족쇄에 매여 어떤 스텝밖에 밟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외교안보 정책의 운동장을 넓게 다 써서 경기를 잘 하도록 해야 한다"라며 "부시 대통령이 들어와 ABC(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정책을 썼던 것은 예외적인 경우지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의 진폭이 작아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토론회에 나온 김기정 연세대 교수는 송 의원의 말에 더해 "지금은 선수가 감독의 작전도 모르는 상태라서 선수교체를 해도 마찬가지"라며 "타임아웃 하고 작전회의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보수적 성향의 이상현 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장도 "정부에는 전략가가 반, 실무형 스텝이 반이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에는 실무형만 있어서 큰 전략이 없고 사전 대응도 없어서 사고가 나면 수습하는 데 바쁘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이같은 지적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오랫동안 나온 것이다. 이 정부 역시 최근 외교적 난맥상이 쏟아지면서 그런 문제제기를 미약하게나마 받아들이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번 독도 사태는 그같은 '반성 모드'가 언제 있었냐는 듯, '한미동맹 복원'이란 편향된 이념이 옳았음을 강변하는 사례가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양국 정상의 식사에 미국산 쇠고기를 올리자는 백악관의 제안에 청와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향후 펼쳐질 대미정책을 가늠하는 하나의 풍향계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미동맹 복원을 위해 무엇이든 퍼줘선 안 된다는 국민들의 뜻을 조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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