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옛 고향의 누님들같은 정갈한 흰 저고리, 검정치마의 잔잔한 침묵은 그 자체로서 이미 생명과 평화이고 '아침촛불'이었다. 바로 이 잔잔함은 새 시대의 새로운 생활운동의 출현을 예견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7월 3일 오후 7시 원불교 서울교구의 은덕문화원에서는 '소태산 아카데미 수련모임 제1기 종료기념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토론의 주제는 곧 '촛불과 후천개벽운동'이었고 여기에서는 촛불의 문화・문명사적 의미나 그 집단적 영성의 가치와 함께 광장 집회 이후의 대안적 생활실천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르는 곳마다 부처요, 일마다 불공이다(處處佛像 事事佛供)'
나 자신이 발제를 맡았고 발제내용은 이미 <프레시안>에 발표된 '줄탁을 생각한다' 그것이었다. 이 토론의 핵심 테마는 거대한 집단지성이기도 한 우주적 깨달음과 구체적, 현실적, 개인적 깨달음이자 생활개혁활동을 의미하는 바 원불교의 한 슬로건이기도 한 '이르는 곳마다 부처요, 일마다 불공이다(處處佛像 事事佛供)'였다. 이것은 지속적인 토론을 거쳐 구체적인 대안적 촛불운동의 탐색을 촉발하는 한 화두가 될 것이다.
나는 불교스님들이 시국법회를 가진 7월 4일 밤 시청 앞 광장에 나갔다. 촛불과 연등을 든 수많은 남녀청년들이 화안한 미소와 참으로 평화로운 인사들을 서로 나누며 '아침이슬'을 노래 부르고 있었다. 평화행동의 대성공이었다.
또 내가 본 것은 왠 작은 체구의 못생긴 한 젊은이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내 근처를 빙빙 돌면서 가래를 찍찍 아무데나 뱉으며 '씨팔'소리를 연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첫 눈에도 그가 선동꾼, 즉 내 용어로 '까쇠'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파괴활동도 증오의 표현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광장은 너무나 크고 깊은 그야말로 집단지성의 생명과 평화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발표한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은 오늘날 세계 인류와 중생의 일치된 외침인 생명과 평화실천의 불교적 명제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디지털 문명, 디지털 문화의 배경이 다름 아닌 웅장한 화엄불교와 절실한 선수행(禪修行)에 토대한 철저한 불교인식론, 중관론(中觀論), 유식학(唯識學)의 연장과 해석선 상에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입각한 생명중심의 개벽적 실천운동(예컨대 쇠고기, 음식, 대운하, 생태, 환경, 건강, 의료, 물, 생계와 일자리, 교육 등등의 대중적 개혁운동), 그리고 이 양면을 일치시키는 '모심'의 윤리, 즉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을 모두 다 우주의 공동주체로 한결같이 존중하는 생명과 평화운동이 곧 다름 아닌 촛불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선 108참회문에 나타난 108가지 테마는 촛불운동 초기 <경향신문>에 제시됐던 서울대 법대의 양현아 교수의 다음과 같은 현실 지적과 문제의식 등에 대한 불교에 바탕을 둔 후천개벽운동적 대안의 교법적 원리들을 알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108참회문은 이제 인쇄되어 7월 4일 촛불대중과 언론, 각계각층에 널리 반포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그 긴 전문 인용글은 생략하고 또 광장집회 이후 현실적 생활개선운동 속에서 각자 각자 이어갈 대안적 촛불운동에 대한 불교・원불교 쪽의 제안은 이 글 후반에 요약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조금 장황하지만 매우 탁월한 바 있는 양현아 교수의 발표내용만을 싣기로 한다. 108 참회문은 이미 도처에 널려있으니 이를 확보해 생활 개혁운동 제안, 양 교수 내용과 비교해 본다면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낡은 틀과 생활정치간 '문명 충돌' 양현아 교수 - 차이와 공공성의 새로운 공간 환경, 소비, 교육 등 정치적이지 않았던 이슈들이 정치화되고 있다. 기성의 정치영역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생활 문제로 환원되기 어려운 '제3영역'이 정치화되고 있는 것이다. 즉, 정치적 의미와 공간이 바뀌고 있는 시점이다. 사회 운동의 핵이 일상 생활 세계와 생활 정치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 집회의 집합적 목소리는 단지 생활 세계의 체계 잠식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기성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의사를 '대의'한다는 것의 제도적 틀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촛불 집회는 1회의 국민투표를 통한 선출방식, 정치인과 행정관료에 의해 위임된 정치의제 설정과 정치 방식과 시민영역 간의 괴리의 돌출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사회 운동은 우선 탈중심화되고 개인화됐다. 더 직접적이고 스스로 주체를 형성하며 내가 운동하며 교육되고, 느끼고, 바꾼다. 또 다른 특징은 그 다원성, 복수성에 있다. 운동 과제 간의 위계가 정해지지 않았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연대를 할 수는 있으나 고정적이지 않다. 여기서의 철학은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과 관용이다. 어머니들과 유모차 부대가 거리로 나왔고 '촛불소녀'도 등장했다. 그들의 소수자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기존의 공간에서 표출하지 못했던 상징과 언어들을 토해내고 있다. 촛불 집회는 우리 사회 안에서의 문명 충돌을 보여준다. 현 정부에 대한 시각뿐 아니라 한미관계, 한국인의 정체성과 같은 국제 관계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내장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전망할 때 회피할 수 없는 쟁점이 부상한 것이다. 이 때 요청되는 것은 차이에 대한 인정과 관용, 공생이다. 새로운 운동들은 제도 정치로 환원되거나 수렴되지 않고 제도 정치에 대한 도전과 상상력을 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제도 정치와 탈구되어서도 안 된다. 특히 한국의 사태는 제도 정치의 대의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구태의연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국민소환제, 더 빈번한 국민투표제, 특히 다양한 연령과 젠더, 계층과 제도 정치의 참여 등과 같은 숙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
양 교수 발표 내용 중에는 문명 충돌이나 가치관의 갈등뿐만 아니라 서로 반대하는 것들 사이의 상호보완성이나 변증법과는 또 다른 이진법적 반대일치 또는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상호 역동적 관계 등에 관련된 중요한 지적과 암시들이 있다.
디지로그, 유목적 정착 또는 정착적 유목
여기서는 우선 한 가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문제를 들어보자. 둘 사이의 운명적 결합은 향후 우리의 생활 운동이나 문화 문명 운동에서 자연히 요구하게 될 농업적 정착(유기적 생태농업과 삶의 문화적 안정성의 도구에 대한 대안)과 유목적 이동(세계화의 필연성과 이주노동자, 여성문제, 대규모 온난화 등 기후 혼돈에 따른 대대적 주거지 이동의 필연성에 대한 대안) 사이의 문명 복합 즉 '유목적 정착 또는 정착적 유목'이라는 문명 개벽의 문화적 내용인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결합, 즉 디지로그는 이미 쓴 바와 같이 2002년 '붉은 악마'의 로고인 치우의 붉은 도깨비나 대한민국의 연호, 그리고 태극기 상징들을 통해 젊은 세대의 집단적 예언으로, 하나의 문화적 개벽의 메타포로 나타난 바 있다. 이러한 점은 한국과 동양을 넘어 이미 유럽 정신사와 문명사, 과학사에서까지 상징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의 거두인 덴마크 귀족 닐스 보어는 자기 왼쪽 가슴에 붙이고 다닌 태극 문양을 자기 가문의 문장으로 삼았다. 그는 가훈의 형식으로 태극의 음양과 상생, 상극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인 '모든 반대되는 것은 상호보완적이다'란 글귀를 수놓아 늘 자랑했다고 한다.
서양의 유명한 문명사가인 루이스 멈포드는 그의 저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태극을 원용히여 유럽 문명이 역동성과 성장, 생산력, 남성성, 전지구적 개척과 발전만이 일방적으로 강화되고 그 반대로 음, 안정, 균형, 평등, 분배, 복지와 여성성, 민족, 지역들의 정착성이 약화되어 거대한 불균형 속에서 혼돈과 파멸 속으로 침전하고 있다고 보고 음과 양 사이의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이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것이 미래의 새 문명이라고 강조한다.
또 널리 알려진 정신과학자요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 역시 동서양 사이와 같은 대립된 가치관의 상호 중도적 화해를 주역(周易, I Ching)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변증법이 아니다. 불교의 참선이나 색공론(色空論) 또는 중도사상(中道思想)이나 동학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의 생명생성론적 사상으로서 컴퓨터의 '노-예스(No-Yes)' 또는 '온-오프(On-Off)'의 이진법 구조와 일치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원리적 일치의 문제를 가지고 촛불을 생각한다. 변증법 극복은 인류 사상사의 어쩌면 가장 거대한 숙제다.
이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정반합(正反合)의 삼진법적 구조를 비판하고 정반반(正反反)의 부정의 변증법을 제시한 바 있다.
동양의 주역이나 불교, 동학의 논리와 일치하는 디지털의 문화원리만이 미래 세계의 새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
다니엘 벨은 "컴퓨터에는 변증법이 없다"고 했다.
촛불세대는 6월 하순부터 시작돼 6월 29일 절정에 달한 '폭력의 악순환' 즉 '상호 말살을 법칙화하는 투쟁의 변증법의 좌우 양자의 같은 얼굴'을 몸서리치게 목격했다. 악한 권력과 추한 파괴자의 '까쇠'들이 난동의 조작극을 벌이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폭력과 투쟁 없이는 평화와 통일이 없다는 이 두 낡아빠진 문명과의 참으로 슬기로운, 그러나 질긴 생명과 평화의 젊고 부드러운 새 문명과 새 문화의 탄생이라는 근원적 개벽 없이는 나도, 지역도, 대한민국도, 인류도, 지구도,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안정과 행복도 없다.
나는 지금껏 그것을 촛불을 생각하는 이 과정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다.
촛불을 위한 생명과 평화의 108 참회문 37. 이웃의 슬픔을 나누지 않았으면서 보살행을 말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38. 강물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방생임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39. 덜 버리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생산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서른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40. 덜 먹는 것이야말로 땅을 사랑하는 일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41. 내 몫이 작아질까 봐 전전긍긍해 하면서 상생을 말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42. 오만을 자존심이라고 오해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43. 강자의 횡포를 보고도 침묵하고는 인내했노라고 나를 속인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44. 작은 선행에 거드름을 피워 약자를 초라하게 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45. '예'라고 말해야 할 때 '예'라고 말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은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46. 신발 하나 가지런히 벗지 못하면서 사소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47. 열심히 벌어서 나중에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이웃을 굶주리게 한다는 걸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48. 내가 주인 노릇을 못하는 순간 독재자의 영토는 그만큼 넓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49. 한 생명이 깨치면 만 생명이 깨친다는 걸 알면서도, 한 생명이라도 폭력 앞에 무너지는 것은 만 생명이 무너진 것임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마흔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50. '자유'의 소중함을 망각하는 순간 노예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쉰 번째 절을 올립니다. 51. '책임'이 두려워 '자유'를 포기할 때 민주주의가 질식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쉰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52. 스스로 삶의 주인 노릇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양심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사는 일이라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53.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에서부터 내 삶의 자존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54. 스스로의 양심을 속일 때 위선과 기만의 정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사실을 가벼이 여긴 허물을 참회하며 쉰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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