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풀어야 할 방정식이 북한의 그것보다 더 고차원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의 남북관계 경색은 남한에 10년만에 보수 정권이 다시 들어서면서 나타난 기싸움 성격이 컸다. 그러나 관광객 피격 사건이 돌출하면서 느닷없이 '실전 문제'가 됐다.
어정쩡한 대북 제의
이명박 정부에 던져진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대통령의 대북 대화 제의를 엄밀하게 평가하고,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 대통령은 11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진 6·15공동선언과 노무현 정부 시절의 10·4정상선언을 취임 후 처음으로 언급하며, 그 이행에 관해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남북 인도적 협력을 추진하자고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여전히 "화해·협력을 위해서는 북핵 해결이 선결 과제"라고 말했다. '핵문제와 남북 관계의 연계 및 핵폐기 우선'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또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등과 동렬에 놓음으로써 남북 합의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했다.
한 마디로 뜨뜻미지근한 대북 제의였다. 정책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되 '미세 조정'만 가한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건지 구체적인 얘기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의 평가도 긍정과 부정이 혼재된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이 싫어하는 비핵·개방·3000(이명박 정부의 대북 구상)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북한을 배려한 것이다. 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였다"고 평가하면서도 "방향 전환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이는 데에는 미흡했다"고 말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역시 "과거에 비해 조금 개선됐다"면서도 "여전히 선(先)핵폐기를 얘기하고 있어 연설 내용이 충돌한다"라고 평가했다.
'조·중·동' 보수언론 역시 12일 이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전하면서 대북 제안의 배경만 분석했을 뿐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보수적인 시각으로 보기에도 연설을 평가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조선일보>는 연설 내용을 비판하지 않은 채 금강산 사건을 알고도 연설을 미루지 않았다는 점만 비난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양다리 걸치기'
이처럼 모호한 대북 제안은 왜 나왔나? 이것은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 그리고 핵심 지지층들의 보수적 대북관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이명박 정부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과 영변 냉각탑 폭파로 북미 관계가 급진전될 조짐을 보이면서 한국은 '동북아의 외톨이'가 될 위기에 놓여 있다. 미국하고만 얘기하고 남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북한의 '통미봉남'도 계속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을 타계하는 방법은 북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6·15선언과 10·4선언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 지지층을 하루아침에 무시하고 내달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정권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이 상반된 두 힘을 기계적으로 조합했다. 양다리 걸치기를 한 셈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지층은 남북관계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지만 정세는 대북정책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라며 "대통령 나름대로 둘을 전향적으로 조합했다"고 분석했다.
금강산 사건이 던져 준 고민
하지만 금강산 피격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는 새로운 정세 환경에 처하게 됐다. 복잡한 미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정쩡하게 넘어가기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진상 규명이 우선이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북한에 강한 대응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북한 경비병이 비무장한 여성 관광객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북한 핵실험에 버금가는 반북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사건 경위에 대한 북측의 설명도 의문투성이다. 조·중·동과 보수단체들의 대북 비난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늑장보고 논란까지 겹치며 정부의 운신 폭을 좁혔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과거의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다. 전향적인 대북 제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예의 '동북아 정세'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사건 소식을 듣고도 대북 제의를 밀어 붙였고, 개성 관광을 계속하기로 한 것은 정부의 복잡한 속내를 보여준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또 "남북 관계라는 큰 방향을 강물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가운데 돌출적인 이런저런 사안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금강산 사건과 남북 관계는 별개"라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관계자가 아닌지를 의심케 하는 이 발언 속에는 전향적 대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정세에 대한 계산이 깔려 있다.
이렇게 이명박 정부는 북핵 진전에 따른 대세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보수적 정체성을 지켜야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엄중한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지난 3개월간 이어진 북한의 대남 비난에 대응하는 것이 훈련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실제 상황이다.
갈림길에 선 김정일
이명박 정부의 결단을 좌우할 변수는 두 가지다. '북한 방정식'을 고차원으로 만들었던 동북아 정세와 금강산 사건의 추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수는 피격 사건에 대한 북한의 대응 태도다. 북한이 남한 당국의 진상 조사에 협조하고, 나아가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지지층들의 강경 대응 요구를 어느 정도 달래면서 전향적인 대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최소한 양다리 걸치기를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경계 규칙에 따라 무단 침입자를 사살했을 뿐'이라며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대통령도 지지층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김정일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간 김정일 정권은 남한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을 변경시키기 위해 쌀·비료까지 포기하며 대남 비난을 지속해 왔다. 중국과 미국의 지원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 대해서까지 강경하게 나온다면 실로 오랜 기간 남한과 등을 돌리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단지 보수층만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의 대북 감정이 악화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호소해 온 '6·15공동선언 실천 남측위원회'가 11일 북한에 즉각적인 사과를 요구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도 남쪽의 여론 흐름을 예의주시할 것"이라며 "보수의 움직임은 몰라도 남측 진보 진영의 요구까지 무시하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6자회담 변수
베이징 6자회담의 합의 상황도 이명박 정부의 결정에 중대 변수다.
북한과 미국이 핵 신고를 검증할 메커니즘을 마련함으로써 8월 11일로 예정된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가 확실시 될 경우 이 정부도 정세의 큰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핵 불능화에 대한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북한의 반발은 커지고 불능화 속도도 늦춰질 것이다. 부시 미 행정부 임기 내에 핵문제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정부는 지지층들의 요구에 따라 당분간 대북 강경노선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번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은, 그리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금강산 사건은 어디로 튈 것인가. 2008년 7월, 한반도 정세가 위태롭게 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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