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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이 폐기되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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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이 폐기되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한반도브리핑 <88> MB정부 들어 사라진 '평화체제'

"평화회담은 민주당의 개념이야. 지금은 공화당 행정부라고. 우리는 뭔가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해."

2001년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잭 프리처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리처드는 당시 부시 행정부에서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에 임명되었고, 막 명함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그는 명함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 버렸다.

평화회담 특사라는 명칭은 대북협상 특사로 변경되었다. 2001년 당시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물정도 모르고 그렇게 날뛰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이 흘렀을 무렵, 네오콘들은 결국 '실패한 외교'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우리는 지금 미국에서 한번 방영됐던 흘러간 영화의 재방송을 한국에서 다시 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인수위 백서나, 외교통상부 및 통일부의 업무보고에서 '평화체제'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2001년 당시의 부시 행정부처럼 그들도 평화라는 개념을 이전 정부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평화체제 없이 핵 폐기가 가능할까?
▲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이 폭파되면서 이제 핵 폐기와 평화체제를 논의해야 할 때가 왔다. ⓒ연합뉴스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이 폭파되고, 북핵 불능화 단계도 마무리 되고 있다. 이제 3단계 핵 폐기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6자회담은 지금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상응조치로 진행될 것이다.

북핵 폐기에 필요한 상응조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북한이 핵을 갖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2005년 9.19공동성명은 그러한 환경을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경제·에너지 지원,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이라고 규정했다. 필자는 이중에서도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핵을 포기한 북한은 재래식 군비경쟁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북한을 비롯한 약소국들이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는 재래식 군비경쟁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 포기 결단을 내린다면, 당연하게 그 상응조치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적극 요구할 것이다. 적극적인 평화공세로 전환한다는 뜻이다. 외교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군사적인 불균형이 지속된다면 체제보장을 장담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북한의 입장에서는 평화체제에 대한 전망이 보장되어야 핵 포기에 나선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그 복잡한 속내

여기서 미국의 입장은 복잡하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필요성은 부시 행정부가 먼저 제기했다. 9.19공동성명이 나오기 전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현 국무장관)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평화체제가 필요하다는 언급을 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이를 적극 수용해 9.19공동성명에 그 내용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이어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직접협상을 시도하면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의지를 보다 명확하게 밝혔다. 2006년 11월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2007년 9월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김정일 위원장,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한반도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의사를 10월 4일 예정이었던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 한반도 평화체제와 미국의 영향력 유지가 병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 라이스 장관(왼쪽)과 젤리코 보좌관 ⓒ로이터=뉴시스

부시 대통령은 왜 그랬을까? 세계적인 차원에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북핵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세 인식은 2005년 라이스 장관의 보좌관이었던 필립 젤리코와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젤리코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유럽에서의 협력안보 과정이 유럽의 평화를 가져왔듯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미국의 장기적인 영향력 유지와 병행될 수 있다는 전략 보고서였다.

물론 이러한 전략보고서는 부시 행정부 내에서 반발에 부딪혔다. 대북 억지 나아가 대중국 억지를 우선 추진하는 국방부의 이해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미국 내에서 동북아 전략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없는 북핵 폐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차기 행정부는 결국 미래지향적인 북핵 폐기와 현상 유지적 대북 억지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북핵 폐기가 중요하다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 것인지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06년 아베 신조 정권은 핵실험을 한 북한에 대해 감사를 표시한 바 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자위대의 역할을 확대하고, 방어중심의 군사전략을 선제공격 중심으로 전환하는 명분을 북한의 핵보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가 악화되면, 일본의 우파가 꿈에 그리던 재무장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북핵 해결 과정이 가속화되면 그러한 명분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북핵이 해결되는 과정은 일본 내에서 일본이 나아갈 길을 둘러싼 논란의 근거가 될 것이다.

왜 과거로 달려가는가?

한국의 입장과 의지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의 선택은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동북아 질서의 변화에 모두 중요하다. 지난 달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던 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 군사동맹의 강화는 변화하고 있는 역내 질서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정부는 동북아의 질서와 관련해 대결이냐 평화냐를 선택해야 한다.

당장은 북핵 해결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체제가 갖는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불능화 단계가 마무리되고, 핵 폐기 논의가 시작되는 현재의 국면에서는 더 이상 9.19공동성명에서 합의한 '관련국들간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미룰 명분이 없다. 4자회담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4자회담의 핵심 주체는 바로 한국이다. 다른 실무회의(working group)와 달리 한국의 역할과 비중이 매우 크다.

한반도에서의 평화만들기(peace-making)를 대체 누가 하겠는가? 당사자인 한국이 배제된 채 한반도에서 평화 상태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 한반도의 안보환경도 달라졌다. 그것이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이루어진 4자회담 당시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당시 남북관계는 부재했다. 6번의 본 회담을 통해 제도 분과와 군사적 긴장완화 분과 설치에 합의했지만 실질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미 남북한은 2000년 정상회담 이후 수차례의 장성급 회담과 두 번의 국방장관 회담을 진행한 바 있다. 비무장지대에서 선전물을 철거하고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방지 조치에 합의하기도 했다. 초보적이지만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시작한 것이다.

또한 과거와 달리 비무장지대 관리 권한의 상당 부분이 유엔사에서 한국군으로 이양되고 있다. 주한미군의 기지 이전과 더불어 실질적인 군사분계선 관리는 이제 한국군이 맡기로 했다. 다시 말해 한국은 군사적 긴장완화의 핵심 주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연히 남북 군사대화를 통해 향후 구체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논의해야 한다. 4자회담은 주로 제도, 즉 평화협정을 논의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완화는 남북 군사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 필자 김연철 교수 ⓒ프레시안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명박 정부는 미래지향적인 평화체제 보다 과거 회귀적인 대북 억지력의 강화를 선택했다. 모든 외교안보 전략에서 '평화체제 구상'은 삭제되었다. 왜 그랬을까? 전략 개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는 전통적 안보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평화체제 구상 없이 어떻게 북핵 폐기가 가능한가?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전략을 둘러싼 논의의 의미를 읽지 못하면서, 어떻게 한미동맹의 미래비전을 논의할 수 있을까? 미래와의 불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평화는 특정한 정권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고 희망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핵심 당사자인 한국이 우리의 꿈인 '평화체제'를 방기해도 되는가? 정녕 그래도 되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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