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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신부님, 못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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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신부님, 못하겠어요"

[현장] 촛불 시위, 침묵과 꽃향기로 가득차다

촛불 집회에 오랜만에 미소가 등장했다. 1일 오후 9시 침묵의 거리 행진을 마치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돌아온 시민들의 얼굴에는 평화가 깃든 미소가 가득했다. 그들의 미소 속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오후 8시 주위를 향기로 적시는 백합을 든 신부, 수녀들이 서울광장을 출발했다. 시민들은 이들을 따라 서울광장을 출발해 숭례문~한국은행~명동~을지로입구를 거쳐 다시 시청 앞으로 돌아왔다. 1시간 동안 거리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시민들은 침묵했다. 김인국 신부가 "침묵 행진으로 우리의 뜻을 보여주자"는 제안을 따른 것이다.

시청 광장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김인국 신부는 "길 떠났던 이들이 돌아온다. 우리 침묵하자.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의 작은 말소리가 우리의 큰 뜻을 가리지 않도록 하자"며 시민들을 맞아들였다. 길을 떠날 때 3000여 명이었던 시민들은 1만 여명이 되어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김인국 신부는 "평화시위 보장했다", "국민들도 안 때렸다", "우리 모두 아름답다" 등의 구호를 선창했고 시민들은 따라 외쳤다. 김 신부는 "우리의 손에 들린 것은 초가 아니라 겨레의 혼불이며 우리의 양심이며 우리의 인격"이라며 "촛불 만세", "촛불을 처음 들어올린 어린 이들 만세", 촛불을 끄지 않은 우리의 은근과 끈기 만세", "관심을 보여준 모든 언론인 만세" 등을 외쳤다.

시민들은 김 신부의 말마다 "만세"를 따라 외쳤지만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라는 멘트는 차마 따라 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신부님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시위마다 그렇듯 이날 시위에도 분실물이 발생했다. 김 신부는 두 개의 지갑 주인을 찾아주면서 "지갑은 잃어버리면 찾아주는데 주권은 잃어버리면 못찾는다"며 "하지만 지금 우리는 검역 주권을 되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촛불과 꽃을 들고 행진하는 사제단. ⓒ뉴시스

▲침묵 속에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시민들. ⓒ뉴시스

"침묵 시위로 평화 훈련을 받았다"

이날 촛불 시위에 참석한 이미화 씨는 "오늘 촛불 시위가 우리의 자존감을 키워준 것 같다"며 "일부는 침묵 시위가 답답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모두 '평화 훈련'을 받은 듯하다"고 했다.

그는 "침묵시위를 하니 주변에서 불평하는 소리, 지나가는 이들이 욕하는 소리가 다 들려왔지만 그런 소리들을 참아가면서, 우리는 침묵 시위 중이라고 서로를 다독였다"며 "진정한 평화 시위 문화가 정착되는 과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임신 5개월이라는 김인정 씨는 "그간 경찰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할 때도 시위에 나오긴 했다"며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이고 말도 안 되는 실정에 참을 수 없어서 나오긴 했지만 나올 때마다 무서웠고 이런 걸 고스란히 느낄 아기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기도 평화를 느꼈을 것 같아 기쁘다. 아기가 이날의 분위기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나서 평화 시위를 만들어내자 현장에서 하늘색 조끼를 입고 국가 폭력을 감시해온 국가인권위원회 활동가들도 할 일이 없었다. 한 활동가는 "그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오늘은 마음 편하게 지켜봤다"며 "시민들의 평화 시위에 내가 다 뿌듯하다"고 했다.

"이명박, 처음 촛불을 든 중학교 여학생들을 설득해보라"

이날 시위는 전날과 같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로 시작됐다. 사제단은 서울 신월동 성당의 나승구 신부의 진행으로 6시 40분께 미사를 시작했다. 이날 시청 앞 광장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닌 시민들도 많았지만 이들도 경건한 자세로 사제단의 미사를 지켜봤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트럭을 제단 삼아 시국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 뉴시스

▲초와 손팻말을 들고 미사에 참석한 시민들. ⓒ프레시안

미사에서 보좌역을 맡은 김인국 신부는 "검찰총장은 '촛불 문화제는 정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불순 세력'이라며 '어제 집회를 전문 시위꾼들이 주도했다'고 말했다"며 "그런데 어제 한 교우가 신부님 300명이 걸어나오는 모습이 마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행렬을 본듯했다고 하더라.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전문 시위꾼'이 맞다"고 말해 시민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김 신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즉석 제안을 하겠다"며 "당신이 한 추가 협상 내용을 다 받아들인다. 재협상 안해도 좋다. 다만 처음 촛불을 들었던 중학교 여학생을 설득해달라. 이들이 '대한민국의 주권을 되찾았다'고 동의하면 우리도 호소를 모두 철회하겠다"고 했다. 시민들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침묵과 미소로 우리의 뜻을 시민에게 전달하자"

8시께 미사가 마무리되자 김 신부는 평화 행진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오늘 행진은 '침묵'이다"라며 "아무 말 없이 부드러운 살인 미소로 지나가는 시민들께 함께 하자고 외치자"고 했다. 그는 "시위의 원칙은 평화다. 우리와 뜻이 다른 분도 있다. 그분들이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여도 나무라지 말고 꼭 안아달라. 한 번의 실수가 있어도 평화 행진은 꺼지게 된다"고 당부했다.

시민들은 김 신부의 당부를 지켜 시위 내내 구호 없이 침묵을 지켰다. 일부 시민들이 시위에 항의하기도 했으나 시민들은 이에 맞서려는 시위대를 달랬다. 항상 맨 앞에 서 행진을 이끌던 깃발도 백합과 촛불을 든 신부, 수녀에게 앞을 양보하고 조용히 맨 뒤에서 행진을 따랐다.

한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시청 앞 광장에 친 천막을 두고 김 신부는 "시청 광장의 소유권이 시민들에게 있다는 표현으로 사제들이 천막을 쳤다"며 "시민들이 이를 지켜달라. 이것을 지켜주는 것은 추가로 천막을 쳐서 저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시위는 9시 40분쯤 일찍 마무리됐다. 김 신부는 "우리가 여기에 더 있게 되면 조·중·동이 나쁘게 쓴다. 어서 집으로 가자"고 했고 시민들은 아쉬워하며 시청 광장에서 흩어졌다. 오후 11시 현재 시청 앞 광장에는 약 300명의 시민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날의 남다른 촛불 집회를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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