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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응어리 졌던 것들을 풀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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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응어리 졌던 것들을 풀어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26] 자전적 에세이 '라스베이거스 짬뽕사건' 펴낸 진유영 감독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영화 '고교 얄개'와 '인간시장' 시리즈로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진유영 감독이 최근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에세이 '라스베이거스 짬뽕 사건'을 냈습니다. 이 책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카메라 앞과 뒤 현장에서 체험한 생생한 경험들을 비롯해 영화계와 연예계에서 만난 동료들에 대한 추억들을 담고 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진유영 감독과 함께 그의 연기, 연출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가 이번 에세이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뭔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진유영 감독입니다. 진유영 감독은 1975년 MBC 공채 7기 탤런트로 데뷔해 <고교얄개>, <인간시장>, <발레교습소>, <해부학 교실> 등 4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7~80년대 <제3교실> 등 TV 드라마의 주연배우로 활동했습니다. 1988년 영화 <지금은 양지>로 감독으로 데뷔해 단편영화 <탈>, <외침 The scream>을 연출했고 <인간시장>, <독재小공화국> 등 5편의 극영화를 감독했습니다.90년대 중반 이후엔 <도전! 지구탐험대>, <바다는 살아있다>,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 KBS 다큐멘터리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외주 제작했습니다.

박인규 :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유영 감독은 7, 80년대 스타로 이름을 날리셨던 분인데 최근엔 활약이 좀 뜸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 뭘 하셨나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진유영 : 그동안 한 10년간 다큐멘터리에 미쳤죠. 그 다음에는 간간이, 하도 다큐멘터리만 하다 보니 사람들이 뭐하는지 몰라서 근래 영화에도 큰 역할은 아니지만 출연을 간간이 했습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도전 지구탐험대 같은 다큐멘터리 만드셨다는 걸. 이번에 책을 내셨어요. 말하자면 자전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스베이거스 짬뽕 사건'. 나름대로 지난 50년 삶을 정리해 보시는 겁니까?

진유영 : 우리가 흔히 부르기에는 라스베가스라고 부르는데 표준말로 할 때는 라스베이거스에요. 그래서 책 제목을 라스베이거스의 짬뽕사건으로 지었는데 이 책을 내게 된 계기는, 제가 한 30년간 연예계에 앞에 출연하면서 뒤에 만드는 감독과 연출하면서 느낀 점들을, 30년 역사를 묶어봤습니다. 제 인생의 중반을 미국에 한 4년 가있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배운 것도 있지만 잃은 게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제 미국생활이었기에 제목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와 짬뽕은 사실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그곳에서 짬뽕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있었습니까?

진유영 : 있었죠. 20년 전이죠. 그때 제가 모 피디와 폭행사건에 연루됐었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있었지만 현실도피성도 있었어요. 미국을 어렵게 갔는데 간 첫해에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거기서 만난 친구들하고 아무 것도 일을 안 해요 연휴 동안에는.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스톱이고 그래서 이 친구들을 무작정 따라나섰죠. 그랬더니 한 일주일을 저를 끌고 다니는 거예요. 그랜드캐년에다가... 최종 목적지가 라스베가스죠. 근데 일주일 가는 사이에 제가 먹은 거라곤 터키, 칠면조 밖에 없는 거예요. 한국에서 간 지 얼마 안 돼서 김치에 대한 향수를 못 잊는데 낮에는 칠면조 햄버거, 저녁에는 칠면조 스테이크, 아침에는 칠면조 스프. 일주일을 저를 그렇게 터키만 먹이니 제가 약간 진짜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땐 컵라면이니 고추장이니 준비해 갈 시기가 아니라. 그래서 최종 목적지인 라스베가스에 일주일 만에 도착했어요.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은 노름하러 들어가죠.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몰고 한 10시 정도 됐는데 한국음식점을 찾아 헤맸죠. 안 보이죠, 당시엔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중국집 간판이 하나 보여서 무작정 쳐들어갔죠.

그런데 문 닫기 직전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영어가 됩니까 중국어가 됩니까? 갔더니 주방장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얼굴이 하얘져서 제가, 미치겠다. 영어 반, 몸동작 반, 한국말 반, 미치겠으니까... 혹시 짬뽕 아느냐. 그랬더니 이 친구가 다행히도 한국에 근무했던 친구에요. 아 짬뽕?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미안하다, 지금 문을 닫아서 해줄 수가 없다. 내가 무릎 꿇고 정말 나 짬뽕 한 그릇만 해주면 소원이 없다 했더니, 그러면 싸갖고 가라. 문을 닫으니까. 그래서 기다렸는데, 죄송하지만 고춧가루 무진장 넣어 달라. 사정사정해서, 기가 막히게 고춧가루 팍 넣어서, 갖고 나가라는 거예요. 거기서 차까지 걸어나오려면 3분 걸어나와야 되는데 냄새가 말로 표현이 안 돼요. 고춧가루 냄새, 짬뽕냄새가 나는데 그 사이에 국물맛을 보려고 조금 맛보고 뜨거워서 가다가 차에 도착해서 한 손으로 문을 열고 한 발을 올라서는데 철퍼덕입니다.

박인규 : 아, 쏟아졌구나. 엄청났겠네요 실망감이

진유영 : 그 다음은,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이 책에 다 정리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 책에 내포돼 있죠

박인규 : 미국 생활에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게 더 많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진유영 : 제가 책에도 정리했지만 될 수 있으면 사실 남한테 피해주는 얘기에서는 실명을 거론 안 했어요. 왜냐면 그 분들, 선배도 있었지만 후배도 있는데, 선배가 마약에 연루돼서, 제가 직접 느낀 거니까요, 이번에 쓴 책은 제가 거짓없이 사실대로 쓴 겁니다. 어떤 선배한테는 나쁘게 표현됐을 수 있지만 저는 제가 느꼈던 걸 오랫동안 묻어뒀어요.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대항할 수 있는 나이도 안 됐고,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밝히고 얘기하고 싶어요

박인규 : 진유영 감독, 하면 제가 책을 보니까 고교얄개에 대해서는 별로 썩 유쾌한 추억을 갖고 계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요즘 고교얄개가 다시 뜨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승현씨도 여기 모셨거든요. 고교얄개는 굉장히 출연하기 싫었는데 출연하셨다고 써있어요.

진유영 :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출연 안 하려고 몇 개월 도망다녔어요. 왜냐면 그 전 작품, 고교얄개 전에 저는 임권택 감독의 '낙동강은 흐르는가'라는 작품으로 신인주연상을 받았어요. 그 후 고교얄개를 하라고 하니. 그때도 학도병이었지만 고교얄개는 고등학생 얘기에요. 그래서 이승현씨와 김정훈씨는 저보다 나이가 어렸어요. 저도 약간 동안이라 같이 묻혀 가는 게 싫었어요. 어렸을 땐 어리게 보는 게 싫잖아요. 성인이 되고 싶고. 감독의 끈질긴, 만날 집에 와서 사니까 그래서 출연하게 됐는데 저는 내심, 흥행 안 되면 뭐 그냥 묻히죠 뭐, 이런 작품 했나 안 했나도 모르고, 그런데 이게 대박이 터질 줄 꿈에도 몰랐죠

박인규 : 그 뒤로도 이른바 유사한 영화가 많이 나왔다는 그런 류의 영화는 딱 한 편만 하신 건가요?

진유영 : 아니요. 그 후 하이틴 영화가 붐이었어요. 임예진씨하고 진짜진짜 잊지 마, 이런 영화들

박인규 : 그래서 하이틴 스타가 되신 거군요. 연기인생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최근에 이승현씨가 재기하면서 세 분이 만나셨다고 하던데 잘들 지내고 계신가요?

진유영 : 네. 가끔 통화하고 서로. 제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예전에 촬영할 때 고등학생이었잖아요. 나는 졸업했고, 그래서 저하고 어디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성인에 대한 것을 알려줬죠 두 사람한테. 그런데 그 후 생활하면서 보니까 요즘 만나서 제가 하는 얘기는, 예전에 어렸을 때는 잘못해도 이해하고 어렸으니까 넘어가지만 이제는 나이 먹고 사리판단할 때가 됐으니까 이제는 실수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좀 더 정확하고 올바르게 살아라. 제가 한 살 더 먹은 형으로서 충고하죠.

박인규 : 책에 보니까 임예진씨, 그 당시엔 진짜 하이틴스타였고 요즘으로 치면 국민여동생이었는데 거의 첫사랑 비슷한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런 얘기를 써도 되는 건가...

진유영 : 제가 진행자께 여쭤볼게요. 그때 당시 임예진씨 안 좋아했습니까?

박인규 : 모르는 사람 없었죠. 다 좋아했죠.

진유영 : 그 당시 우리 세대에 임예진씨 하면 우상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특출하게 같이 출연하는 배우였어요. 옆에서 더 가까이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나도 젊고, 그런 감정을 다 느낄 수 있는 젊은 시절이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이번 책을 쓰면서도 나의 20대를 빼고는 30년의 역사가 얘기가 안 되기 때문에 하이틴영화 찍었던 얘기, 그리고 임예진씨에 대한 얘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책을 쓰기 전까지는 자주 통화가 됐어요. 가끔 오빠 어떻게 지내? 통화가 됐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는 건 책을 하나 나오자 마자 보내줬어요. 그런데 책을 보내주고 나서는 내 전화를 안 받아요. 나는, 내가 이런 뜻으로 책을 썼으니까 나의 20대의 순수한 생각을 공감하기 바랐는데, 저는 임예진씨 남편도 만났고 아이들도 같이 만나서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만

박인규 : 하긴 20년도 더 된 이야기니까 그땐 그랬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건데

진유영 : 우리가 20대 때 갖던 감정을요, 솔직히 말하면, 50% 억제한 겁니다. 솔직히 저는 맨 처음에 초고를 다 100%로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출판사에서도 그렇고 제가 존경하는 김홍신 선생님도 그렇고 남에게 피해 주는 말은 가급적 피해라라고 해서 제가 상당히 줄인 부분이 있습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군대 얘기를 보니까 거의 우리나라 톱스타가 다 모인 것 같더라고요. 유인촌 내무반장에 전영록씨, 개그맨 이용식씨가 다 있었는데, 전영록씨는 군대에서 목이 트였다. 이용식씨 배가 나온 것도 군대에서였다. 어떤 얘깁니까?

진유영 : 제가 군대를 갓 들어갔는데, 논산훈련소 훈련을 받고 훈련소에 자충이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훈련 끝나면 서울 올라가잖아요. 자대배치가 딱 됐는데 내무반장이 유인촌 병장이었어요. 물론 사회에서 미리 알았죠. 유인촌 병장은 MBC 6기였고 나는 7기였기 때문에, 이용식 상병은 나랑 입사동기에요. 그때 코미디언 1기생이고 나는 7기생이고 사회생활에서 알고 있는데 내무반 가니까 거기 다 있더라고요. 논산훈련도 정훈과 문선대, 공연하는 곳. 들어가니까 다 선배로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군대생활을 했죠. 하여튼 재미난 에피소드가 상당히 많죠. 그래서 이 책에 정리했습니다.

박인규 : 영록씨는 밤마다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목이 트였다고요?

진유영 : 전영록씨는 사실 나랑 내무반 근무를 안 했어요. 왜냐면 훈련소에서 전영록씨가 나보다 빨랐나 늦었나 그래요. 논산훈련도 들어와서 훈련받으면서 하루 100곡 이상을 불렀어요. 고참들이 시키고, 아니면 휴식시간에... 그래서 목에 피가 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박인규 : 판소리 하시는 분들 득음하시는 경지에 들어갔군요

진유영 : 연기자는 가서 연기를 할 순 없고 가수 왔다고 하면 논산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박인규 : 미국에 갔다 오신 뒤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셨는데 일단 흥행은 안 된 걸로 알고 있고요. 재기작이 인간시장. 영화감독으로 이름도 날리고 재기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김홍신씨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진유영 : 제가 데뷔작부터 말씀드려야 되는데, 그게 '지금은 양지'라는 30대 때 예술영화를 한답시고 막, 순수영화 한답시고, 그때는 매춘 이런 영화들이 흥행될 때에요. 약간 포르노성 있는 영화들. 그때 젊은 혈기에 그런 작품으로 데뷔할 수는 없잖아요. 의욕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술작품을 한다고 '지금은 양지'라는 우리가 볼 땐 예술작품이에요. 삶과 죽음을 다루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냐면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영안실 가 있는데 3박4일 밤을 새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게 너무나 인간군상들이 너무 재미난 얘기들이, 돈 때문에 싸우고 별의 별 얘기들이 많아요. 그래서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몇 개월 칩거하면서 시나리오를 썼죠. 그러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흥행에는 완전히 실패했죠. 그래서 빚이 그때 당시 3억 졌어요.

박인규 : 80년대면 상당히 큰 돈인데, 그 당시 자살까지 생각하시고

진유영 : 그래서 빚독촉에. 손창호 선배도 영화 한 작품 만들고 병이 도져서 결국 죽음까지 간걸 들었거든요. 사실 영화 한 작품 만들면 흥행이 안 되면 그 빚독촉에, 사실 국내에서 살기 싫고 자살까지 생각하게끔 돼요. 왜냐면 애일 전화로 흥행 안 됐으니까 돈 갚아라. 우리나라 영화 흥행이라는 게 지금은 체계화돼 있지만 그때는 지방에서 얼마 어음 던져주고 사채 던져주고 잘 되면 자기네들은 돈 벌고 안 되면 빚을 갚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그나마 내가 배우 한 걸 가지고 안면으로 첫 작품에는 선후배님들이 너무 많이 도와줬어요. 많이 출연해 줬죠. 그러니까 나도 첫 작품이니까 이름있는 사람들 많이 나오니까 무작정 다 단역도 이름있는 호화캐스팅이었죠. 그런데 흥행에 완전히 참패하면서 빚독촉에 시달리면서 사실 죽음까지 생각했어요

박인규 : 그것을 건져준 게 인간시장이다. 어떻게 해서 인간시장까지

진유영 : 제가 도피에 도피 끝 저 시골 허름한 극장에 갔더니 제 옛날영화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내가 옛날에 뭐했지? 나는 도피 및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박인규 : 나도 옛날에 저런 배우였구나

진유영 : 거기서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사람이 실패가 있으면 한 번은 더 기회가 있겠구나 하고 극장에 아는 형한테 전화했더나, 이러지 말고, 인간시장이란 작품은 메 트레이드마크 아니냐. 이 작품을 만들면 내가 보기에는 괜찮을 것 같아라는 아이디어를 얻자 마자 서울로 뛰어올라왔죠. 그래서 김홍신 선생님을 만나서 내 의견을 얘기했죠.

박인규 : 트레이드마크라는 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연극으로 해보셨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진유영 : 연극과 영화 두 편에 출연했어요. 그 전에요. 그런데 연극도 5공시절이라 정부에서 연극 막을 올리는 날에 전경이 와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막을 못 올리게 해요. 이런 시절에 제가 연극을 했으니. 그리고 영화도 두 편을 열심히 찍어서 개봉하는데 제목을 못 쓰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스물 두 살의 자서전. 불타는 욕망, 이걸 변경해서 상영했으니까 관객들은 헷갈리죠 사실. 그래서 제가 세 작품에 다 한이 맺혀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 제가 미국 갔다 오고 첫 작품 감독해서 흥행에 망했고 나는 이게 나의 마지막이다. 그래서 김홍신 선생한테 가서 내가 인간시장이라는 타이틀을 영화 한 편 만들겠습니다. 그랬더니, 원작료를 줘야 되잖아요. 원작료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벌면 갖고와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다음날 신문에 딱 터뜨렸더니 인간시장 제대로 된 타이틀 쓰고 내가 주연 감독 하겠다 했더니 지방에서 빚독촉이 싹 없어진 거야. 돈 더 얼마 필요하냐. 기사에 한 번 났는데. 왜냐면 지방 흥행업자들이 흥행이 된다는 걸 너무너무 알기 때문에 무조건 된다고 해서 빌린 돈에 얹어서 줄 테니까 필요한 돈 없니? 더 갖다 써라 이거예요. 그래서 돈 걱정 안 하고 인간시장을 89년도에 인간시장 오 하나님을 89년도에 아주 나의 인생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만들었죠.

박인규 : 실제 흥행성적은 어땠습니까?

진유영 : 그 사연도 많아요. 이번에 '라스베이거스 짬뽕 사건'에도 내가 세밀히 썼지만 흥행에 성공을 대박을 했죠. 서울에서만 30만이 들었으면 그때는 서울 한 개 극장이 개봉이잖아요. 지금과는 다르고, 그럼 사실 5~600만 시대의 차이죠.

박인규 : 인간시장 영화가 나올 때가 30대 초반이실 땐데, 그때까지만 봐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인간시장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으면 말하자면 흥행감독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는데 90년대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변신하셨어요. 이유가 있었습니까?

진유영 : 인간시장이라는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고 그 다음 작품이 흥행이 안 됐어요. 또 한 번의 인생경험을 하게 되죠. 그래서 공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 당시 KBS 도전 지구탐험대라는 해외 오지탐방 프로그램이 첫 작품을 같이 하자는 섭외가 들어왔어요. 출연자로. 제가 너무 하고 싶었던, 세계를 다니고 싶은 게 제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첫 작품에 따라나섰죠. 그런데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어디 딱 정해진 게 아니고 무작정 찾아 헤매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담당 PD, 제작자들 5,6명이 무작정 몇 군데만 가지고 떠난 거예요. 보름을 질질 끌고 다니는 거예요. 왜냐면 거기 갔는데 첫 작품으론 이거 안 돼 안 돼. 또 다른 나라... 그러니 나중에 내가 지쳤죠. 이게 다큐멘터리인가보다. 우리 영화는 계획적이잖아요.

내일 뭐 찍고 준비 철저한 콘티 하에 딱딱 이뤄지는데 이건 무작정, 그래서 제가 첫 작품을 보름을 끌려다니면서도 이게 진실이구나. 마지막날 3일 전에 인도네시아의 오지에 가서 원시부족을 만났어요. 그런데 계산이 하나도 없고 자연 있는 그대로 촬영하는 게, 저는 영화를 하면서 상당히 관객을 속이려고 트릭을 쓰고 놀래켜야 되고 웃기고 울려야 되고 이런 고민에 싸인 작품을 하다가 다큐멘터리를 접하니까, 이것이 진실이구나. 부딪히는 모습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는 모습이 너무 감동이었어요. 그래서 첫 회 출연을 하면서 사실 도전 지구탐험대를 직접 만들게 되죠.

박인규 : 지금까지 연세가 50이 넘으셨는데 20대는 영화배우, 30대는 영화감독으로, 40대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약하셨어요. 이제 50대에 들어서셨는데 팬들께서는 이제 50대의 진유영은 무엇을 할 것이냐 질문할 것 같은데요.

진유영 : 사실 재주가 없는 놈들이 이것저것 하려고 해요. 사실 제가 욕심도 많고요. 이번에 책을 쓰게 된 동기도 나를 한번 되돌아보자는 차원에서 정리했고요. 그리고 저는 다큐멘터리는 계속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진실을 찾아서, 또 책도 이번에 내보니까 사실 저도 50%밖에 만족을 못합니다. 100%를 위해서는 책도 또 쓰고 싶고. 또 기회가 된다면 지금은 양지 리메이크를 하는 게 제 소원이고요.

박인규 : 책 저도 읽어봤습니다만 아주 재밌게 잘 쓰셨고요,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보니까 배우가 더 맞는 것 같습니까 감독이 맞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더 맞는 것 같습니까?

진유영 : 아직도 정답을 못 찾았습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앞으로 한 번 영화도 본격적으로 나오시길 바라고요 향후의 계획 또는 못다하신 말씀 있으시면 정리 삼아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유영 : 제가 이 책을 내게 된 계기를 사실 저를 돌아다보자. 그리고 젊었을 때 너무 응어리진 부분들을 꼭꼭 안고 있었어요. 기록도 하고 녹음도 해가면서 정리를 지금까지 해온 것을...

박인규 : 풀어낼 곳이 없으셨군요.

진유영 : 그래서 내가 이 책에서는 다소 연예계와 방송계에 격앙된 톤으로 비판도 했습니다. 그 분들이 밉거나 싫어서가 아니고 좀 냉철하게 연예계를 지망하는 학생도 있을 거고 부모도 계실 것이고 그런 분들한테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함으로써 그 분들이 판단하고 느끼고 그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인규 : 진유영씨 본인으로서는 과거 30년간의 응어리를 푸는 기회일 수 있었고, 독자들 입장에선 진유영이란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알게 되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고요. 모쪼록 배우 겸 감독 겸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지금까지의 활동경험이 앞으로 연예계 생활 하시는 데에도 큰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많은 활약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진유영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자전적 에세이 '라스베이거스 짬뽕 사건'을 낸 진유영 감독과 함께 그의 30년 연기, 연출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가 이번 에세이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뭔지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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