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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에서 나야 할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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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발칸에서 나야 할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25] '한국전쟁과 동유럽' 펴낸 한국외대 김철민 교수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8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한국전쟁은 국내외 여러 학자들을 통해 계속 연구돼 왔는데요. 최근 한국전쟁 당시 사회주의 국가로는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만이 북한의 남침설을 지지했다는 논문 내용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논문을 발표한 한국외국어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어과 김철민 교수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대부분의 연구가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자료와 문헌에 치중돼 있는 가운데 사실상 한국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유고슬라비아라고 강조하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한국외대 김철민 교수를 초대해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한국전쟁의 남침설을 지지한 이유는 뭔지 한국전쟁 당시 유고의 역할과 이번 연구의 의미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한국외대 김철민 교숩니다. 김철민 교수는 1970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9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동유럽지역학과 석사학위를 받았고 2002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국립대학교에서 국제정치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동유럽발칸연구소 전임연구원과 유고슬라비아 현대사 연구소(savremena istorija Jugoslavije)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2004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어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한국유럽학회 홍보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동유럽발칸학회 편집이사와 사이버 한국외대 교양학부 교수도 겸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이 한국전쟁 58주년 되는 날이에요. 매년 이때는 관련된 분들을 모셨는데요. 한국전쟁과 동유럽이라는 책을 최근 내셨는데, 저희들이 알기로는 동유럽이 왜 한국전쟁과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것 같고. 특히 그 당시 6.25가 났을 당시 북한 쪽에서는 남한이 북침했기 때문에 방어했을 뿐이다, 이렇게 선전했고 실제로 많은 사회주의국가들이 이를 믿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유고슬라비아만이 사회주의국가로는 유일하게 북한이 남한을 침범했다고 보도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 ⓒ프레시안

김철민 :
말씀하신 대로 한국전쟁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 정부와 김일성은 자신의 보고서 발표문을 통해 유럽이라든지 세계 각국에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했거든요. 하는 말이, 남한 측에서 여러 차례 북측에서 내린 경고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국경선을 침범했고 이걸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서 반격하고 있으며 그게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남쪽의 북침설을 주장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 소련이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받아들이면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게 됐죠. 그런데 당시 유고슬라비아 같은 경우는 처해졌던 상황에 따라서 이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실제 그곳의 대표적 관영지 보르바라든지 폴리티카, 국가에서 경영하는 신문들에서는 26일... 다음날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 파견돼 있는 유엔 임시기구 보고서 내용을 기초로 해서 소련측의 사주를 받은, 즉 소련제 무기를 바탕으로 한 북한군이 남침했다고 객관적으로 보도하게 됩니다.

박인규 : 상당히 정확한 보도를 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렇지만 최근 90년대까지는 소련이 자신들의 과거 외교문서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남침설, 남침유도설,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는데, 지금 90년대에 소련이 자신들의 외교문서를 발표한 이후로는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한 것이 맞다, 그것이 정설로 돼 있죠

김철민 : 맞습니다. 실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20세기 일어났던 4대 전쟁...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과 더불어서 대표적인 전쟁으로 손꼽고 있거든요. 방금 말씀하신 대로 1980년대 이후로, 초창기에는 물론 이런 북한의 남침설이 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등장하게 수정학파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북침설이 고개를 들었다가, 특히 70년대 말 80년대 이후로 들어서면서 여러 미국측 비밀자료들이 해제되고, 거기다 90년대 들어서다 보면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죠. 사회주의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등장한 옐친 러시아 정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한테 소련측의 당시 한국전쟁 때 있었던 비밀문서들을 대폭 이양하게 됩니다. 비밀문서들이 해제되면서 그때 이후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한국전쟁이 북한측과 소련측의 오래된 전략과 준비된 작품이었다, 남침설이 힘을 얻게 된 거죠.

박인규 : 이제 와서는 거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 당시 전쟁 당시에는 심지어 장 폴 사르트르 같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도 남한이 북침했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대체 어떤 나라기에. 저희들이 알고 있는 건 티토가 연구한 빨치산으로 유명한 국가고 독자적인 사회주의형성국가였다가 지금은 다 갈라져서 6개 나라가 됐다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 어떤 입장이었기에 사회주의국가 중 유일하게 북한의 남침설을 처음부터 지지했는지 그 당시 상황을 들어서 설명해 주시죠

김철민 :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현재는. 원래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연방이 6개 공화국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북쪽부터 보자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인데 90년대 이후로 내전이나 연방붕괴과정을 거쳐 현재는 다 갈라져 있습니다. 독립국으로. 그렇다면 유고슬라비아, 왜 사회주의연방이 당시 소련측, 북한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침설을 주장했냐면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처해 있었던 상황이 매우 복잡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동유럽국가들이 전부 다 사회주의화되는 데 소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실제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에 소련파를 주입시키는데 굉장히 노력을 많이 기울이거든요.

박인규 : 이른바 위성국가들이죠

김철민 : 그렇죠. 위성국가형태로 많이 남기는데 유독 실패했던 국가가 바로 유고입니다. 그래서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원책을 바라긴 했지만 소련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구축군을 몰아내고 사회주의화를 성공시킨 대표적 국가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부심도 되게 컸고.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스탈린이 동유럽국가를 완전한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코민포름이라는 정치적 연합체를 만드는데, 다른 동유럽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유럽국가들은 코민포름 본부를 프라하로 정하자 했는데 스탈린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서 당시 유고슬라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정하게 되거든요. 그걸, 정책조정을 뒤에서 하기 위해서

박인규 :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죠?

김철민 : 그렇죠.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었는데, 그 과정을 거치면서 영향력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티토는 노력했고 스탈린과 갈등이 일어나게 된 거죠. 48년 6월에는 코민포름분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결별하게 되는데 이 이후로 소련과 위성국가들로부터 정치 경제적 고립을 당하게 되고 군사적 위협까지 당한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좀 더 객관적으로 한국전쟁의 사태를 분석한 기초가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김교수의 책을 보니까 그 당시인지 뒤인지 모르지만 발칸에서 일어나야 할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는 평을 했다고 해요. 그 당시 얘깁니까?

김철민 : 그렇죠. 그 당시 지나고 나서 한 55년 56년 이후로 계속해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가 일부 되다가 사그라졌습니다. 왜냐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사회주의국가를 계속 표방하게 되면서 북한과의 관계가 굉장히 긴밀해지거든요. 그러다가 이런 주장이 다시 대두되게 된 배경은 90년대 이후인데,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비밀문서에 따르자면 소련측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유고슬라비아 국경지역에 대규모 소련제 무기를 바탕으로 한 동유럽국가들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하도록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자면 아드리아해라든지 이쪽 반도를 제외한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 국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모두 다 동유럽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군사적 위협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실제로 국경지역에서 여러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유고슬라비아가 본인의 선택을 하게 된 거죠

박인규 : 50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서는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를 침략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군요.

김철민 : 네. 당시 비밀문서를 보자면 유고측 국립기록보관소에 나와 있는 문서를 보면 소련측은 1950년 여름에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계획을 이미 수립하고 소련제 무기들이 북한에서처럼 각종 탱크와 중무장 무기들이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헝가리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하고 있다는 게 파악됐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인지 모르지만 소련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서 1950년 여름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본인들한테 일어난 게 아니라 저 멀리 있는 극동의 한반도에서 발발하게 된 거죠

박인규 : 북한의 남침이 있는 후 미국에서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북한 침략군을 격퇴해야 된다. 안보리를 소집하지 않습니까? 그런 미국이나 유엔의 움직임에서 유고의 역할은 어땠습니까?

김철민 : 초창기 한국전쟁을 연구하신 분이라든지 이런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1950년 1월부터 소련이 안보리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유엔 여러 기구에 보이콧하는데 실제 당시 한국전쟁 초기 당시에 한국전쟁 유엔군 참전이라든지 모든 결정은 유엔 안보리에서 결의가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비상임이사국 10개국이 투표를 해서 결정됐거든요. 그런데 소련이 유엔을 보이콧하던 50년 1월부터 바로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피선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의 중요한 결의들을 하게 되는 거죠. 그 결의들을 하는 와중에 초창기에는 물로 우리 한국쪽 입장에서 보면 약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불리한 점이 많이 있었죠. 유엔군을 파견하는 문제에 반대했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본 다음에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정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일부 안건에 대해서는 기권하기도 했거든요.

박인규 : 바로 무력대응하자는 입장은 아니었군요. 좋게 말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협상에 의해

김철민 : 그렇죠. 당시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서는 소련이나 미국이나 헤게모니국가로 봤거든요. 헤게모니 양쪽 국가에서 자신의 이해영역,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장터로 한반도를 이용하고 있고 그런 전장터의 불똥이 가장 전쟁이 위협하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혹은 서독지역이죠 당시, 유럽지역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고 조심해야겠다는 입장이 강했습니다.

박인규 : 북한이 남침했다고 유고가 봤다면 행위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을 또 다시 군대를 보내는 방법이 아니라 유엔에서 협상일라든가 이런 걸 해보자

▲ ⓒ프레시안

김철민 :
군사력을 동원해서, 예를 들어 북한에서 공격했지만 그걸 인정하지만,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해야지 미국이나 소련 같은 강대국 간의 힘의 논리로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당시 워낙 상황이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계속 파죽지세로 북한군이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급한 상황 속에서 27일에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을 결의하게 된 거죠

박인규 :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한 다음 서울 수복을 하고 나서 38선을 넘을 거냐 말 것이냐가 미국 내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정책적 논쟁이었다고 들었는데요, 북한의 남침이 침략이라면 유엔군의 북침도 침략 아니냐 해서 결국 그것 때문에 중공군의 개입이 들어오고 했는데 그런 38선 돌파에 대란 유고 쪽 입장은 어떤 거였습니까?

김철민 : 유고슬라비아는 세 가지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전쟁의 확대를 막자. 두 번째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해서 자신을 위협하는 소련의 헤게모니정책을 전 세계에 알리자. 세 번째는 유고슬라비아의 고통받는 현실을 감안해서 서유럽국가들과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지원을 받아들자. 이 세 가지였습니다. 잠시 빗겨나가서 말씀드리자면 서유럽 국가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권에서 약간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겉으로는 유고슬라비아는 우리는 건재하다고 말했지만 당시 비밀문서를 보자면 미국 등 서유럽국가들에 계속 원조요청을 했거든요. 서유럽국가들은 이게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 있다, 자유진영의. 가짜다, 거짓으로 사회주의에서 이탈해서 우리에게 와서 자본주의국가들을 교란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우리가 소련이라는 골리앗과 싸우고 있는 다윗을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론을 내세우게 되는데, 그 결정적 계기가 바로 1949년 10월에 있었던 중국 공산화입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지원하게 되는데, 방금 말씀하신 38선 넘어가는 문제는 미국측에서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측 입장에서 보자면 전쟁확대가능성을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고, 당시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서는 미국의 영향력 확대 시도가 1949년 이후 공산화된 중공을 자극하게 될 거고 소련측의 의도에 따라서 이미 자기들의 비밀문서로 그런 내용들을 알고 있었거든요. 한국전에 개입하게 되면서 소련이 중공을 사주해서 한국전쟁에 개입하도록 푸싱이랄까 압력을 넣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렇게 됐을 경우 38선을 넘어서 북진은 곧바로 중공군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고 중공군이 아시아의... 미국을 상대하면서 한반도에서 서유럽군대들에 전력을 소비하고 있는 동안 소련은 서유럽지역, 즉 유럽지역을 동유럽국가들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책을 세워야 된다는 차원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반대하는 것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전쟁, 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특히 유럽에서의 발발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를 많이 했죠.

박인규 : 유고 입장에서는 6.25의 실상이 북한의 남침에 의해서라는 걸 분명히 알았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군대를 투입하거나 북한을 완전히 다시 자유진영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가급적이면 유엔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풀자, 이런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김철민 : 네. 유고슬라비아는 계속해서 주장의 근거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문제 해결은 한반도의 분단부터가 문제인데 한반도 분단의 기원도 바로 냉전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그 냉전을 만들어낸 게 바로 강대국이, 미국블럭과 소련블럭 강대국 간의 이해영역다툼에서 비롯된 거고 한반도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원인의 당사자들이 서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박인규 : 저희가 예전에 사회교과서에서는 50년대 이후 비동맹외교의 선구자 하면 유고, 인도 이렇게 배웠는데 유고의 비동맹외교노선이라는 게 그때부터 시작된 거라고 볼 수 있나요?

김철민 : 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미 한국전쟁을 계기로 해서 유고는 당시 안보리에서 결의를 하지 않습니까. 여러 결의를 하는 와중에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거나 비슷한 결의를 하는 국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도라든지 이집트라든지. 인도 이집트 등의 국가들도 미국블럭이나 제1세계나 소련블럭의 제2세계나 어느 쪽도 끼어들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있었거든요 당시 국제정세상. 그래서 이렇게 양대 블록에 들어갈 수 없는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구나 나처럼. 그래서 이런 국가들과 연합해서 만약 어느 한 블록에 들어갔을 경우 막대한 한국전쟁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3세계 블록형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대하게 됐고 그 계기가 됐던 게 바로 한국전쟁이라고 할 수 있죠.

박인규 : 6.25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자신의 국익과 관련해서 그런 입장을 전했다. 브루스 커밍스라는 동아시아 학자께서 6.25의 진정한 승자는 남한도 북한도 미국도 소련도 아니고 중공과 일본, 대만이다. 이런 말을 했다는데, 김철민 교수는, 한국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미국도 소련도 아니고 유고슬라비아다. 어떤 의미입니까?

김철민 : 많은 학자들이 근래 들어 연구하면서 이것은 거의 일치합니다. 일본이나 대만, 특히 일본 같은 경우 경제적인 수혜를 얻었고 한국전쟁을 통해서. 대만 같은 경우는 실제로 중공이 대만을 침공할 계획을 장개석정부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는데 중공은 육군은 막강했지만 해군이나 공군력이 없어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했거든요. 소련측에서는 한반도를 완전히 공산화시킨 이후 대만을 적화시킬 수 있는 공격력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대만은 한국전쟁 덕분에 큰 수혜를 입은 국가고. 중공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신의 사회주의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거든요. 이것은 보통 공감되는 바입니다. 하지만 제 주장은 유고와 한국전쟁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다 보니 유고슬라비아가 그 어느 나라들보다 굉장히 수혜를 입은 국가다. 첫 번째로는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고, 두 번째로는 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그동안 소외받았던 서구측, 미국이나 서방국가들로부터 군사동맹까진 아니지만 군사적 협의체를 구성하고... 그리스, 터키와, 또 더불어서 막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받았거든요. 그를 통해서 유고슬라비아가 굉장히 어려웠던 그 당시 상황을 국가존립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위험을 탈피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가 수혜국 가운데 대표적 국가 중 하나로 들어가야 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박인규 : 그 말씀 듣고 보니까, 참 우리는 58년 전에 진짜 수백만이 죽는 전쟁을 했는데 남는 건 없고, 중국, 유고는 득을 봤다고 하니 참 억울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김철민 교수는 외국어대에서 발칸 쪽을 전공하셨는데 유고로 유학을 가셔서 6.25를 연구하셨어요. 한국전쟁과 동유럽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어떻게 6.25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신 거예요

김철민 : 제가 처음에 가서, 공부하려고 갔는데 저도 6.25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연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그런 흔한 말로만 인식했었는데, 처음 갔을 때 저희 박사논문 지도교수님께서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전쟁과 유고슬라비아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봐라. 제안하시더라고요. 저는 무슨 동유럽과 한국전쟁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당신의 스승이 옛날에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논설을 실은 게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걸 읽어보니 굉장히 흥미로웠다, 뭔가 있을 거다라고 하시면서 국립기록보관소나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기록보관소에 갈 수 있는 자격요건을 한 달 반 기다리니까 만들어 주시더라고요. 현지에 가서 자료를 찾게 됐고, 찾으면서 제가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료가, 책으로 치자면 정말 100여 권 넘는 책이, 기록문서들을 제가 복사할 수 있을 양만큼 엄청나게 해왔거든요. 거기 기록보관소에서는 역대로 이렇게 많이 복사한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이 복사했는데, 저는 언제 다시 와서 기록보관소의 물건들을 뺄 수 있을까, 그 나라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자료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거든요. 그래서 복사는 많이 해왔습니다. 그 복사된 준비해온 양의 한 10% 정도밖에 결과발표가 안 된 것 같아서 굉장히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앞으로 연구과제는 무궁무진하신 거네요? 앞으로 10분의 9를 다 보시려면

김철민 : 네, 시간이 굉장히 부족하더라고요.

박인규 :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한국전쟁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게, 눈을 뜨게 해준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말하자면 유고 학자들은 이미 6.25 전쟁 당시부터 한국의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했다는 건데, 요즘 유고 학자들이 한반도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김철민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좀 아쉬운 면이 많이 있는 게 한국학과 관련된 자료들, 문헌들이 50년대 초반 자료에 많이 머물러 있습니다. 최근 들어와서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21세기 들어와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조금씩 늘고는 있지만 실제로 자세하게 알려주고 한국의 실상을 정확히 보여주는 게 부족하죠. 그래서 피상적으로 올림픽이라든지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한국의 경제적 위상 정도를 파악하고 있지 역사나 문화는 많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박인규 : 우리가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유고는 덕을 본 나라니까, 우리와 교류를 많이 했으면 좋겠고요.
이번 논문이 사실 박사학위 논문이시고 학술문화진흥재단인가요? 거기서 우수논문으로 선정된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 동유럽과 특히 유고와 한국전쟁에 관련된 이번 연구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리해 주시고, 앞으로 이 부분 관련해서 어떤 연구계획을 갖고 계신지 마지막 정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프레시안

김철민 :
솔직히 인문학자들이 이런 걸 연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시간적, 자금적 제약, 여러 가지가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학술진흥재단에서 선정돼서 그나마 이런 결실이 나오게 된 게 기쁘더라고요. 제 생각으로는 지금 보관돼 있는 여러 자료들이 많습니다. 그런 자료들을, 특히 김일성 관련된, 김일성이 한국전쟁 이전에, 즉 만주에서 소련으로 넘어가서 소련 당시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여러 객관적인 기록들이 남아있거든요. 그쪽으로 연구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한국전쟁을 한다고 하면 주로 강대국 관련된 연구에 집중돼 왔는데 이걸 계기로 해서 제3세계 국가들이 한국전쟁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들이 꽤 있거든요. 그런 역할들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박인규 : 6.25연구, 또는 북한연구에 관한 새로운 보고를 캐내신 것 같은데요, 이제 10분의 1밖에 안 보여주셨다고 하니까 앞으로 많은 연구를 해서 우리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저대로 이해할 수 있는 데 많은 역할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철민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한국외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어과 김철민 교수를 초대해 한국전쟁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남침설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유고의 역할과 이번 연구의 의미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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