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예산안이 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겨 처리되는 와중에도 여야 의원들은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야 실세 의원들은 지역·민원 사업 예산을 청탁하기 위한 이른바 '쪽지'를 통해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지역 예산을 타갔다. 여기에 '민원 쪽지'가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산 분배 심사를 호텔에서 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의 눈살을 찌뿌리게 했다.
이번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예결위 소속 의원들에게 들어온 '쪽지'는 역대 최대 규모인 4500여 건. 총 300명인 국회의원 정원 대비 1인당 평균 15건씩의 예산 청탁이 오간 셈. 2000~3000건 정도 들어왔던 예년에 비해서도 현저히 늘어난 수준이다.
지역구 예산 증액 폭이 가장 큰 의원은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인천 연수)로, 650억 원 가량이다.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 건립에 615억 원, 인천송도 희소금속산업 육성 인프라 구축과 인천 송도 컨벤시아 조성에도 각각 20억 원의 예산이 추가됐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대구 수성갑)의 지역구에는 모두 2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증액됐다. 18대 국회까지 박근혜 당선인의 지역구였던 대구 달성의 국립대구과학관 운영비는 당초 47억 원에서 12억 원이 더 늘어났다. 박 당선인이 강원도 대선 유세에서 약속한 '춘천·속초 간 고속화철도 조기 착공'(50억원), 제주 방문시 언급한 '공항 인프라 확충'(5억원)도 지역 사업으로 예산안에 추가됐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인 민주통합당 의원들도 일부 예산 심의 과정에서 추가 예산을 가져갔다. 박기춘 민주당 원내대표의 지역구(경기 남양주을)는 남양주 고용센터 설치에 30억 원을, 최재성 예결위 민주당 간사의 지역구(경기 남양주갑)도 하수처리장 사업에 추가로 11억 원의 예산을 받아갔다.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전남 목포)도 목포대 지원 사업에 10억 원의 예산이 추가로 배정됐다.
문제는 정작 시급한 예산인 저소득층 지원예산 등은 크게 줄어들고 애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던 지역,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예산이 늘어났다는 데 있다.
이번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의 의료비 보조를 위한 예산은 2824억 원이 줄었다. 대신 지역 예산은 5574억 원이나 늘어나 총 규모는 1조 3000억 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SOC의 경우 국가 주관 SOC 예산은 줄었으나 지역별 예산이 늘면서 전체적으로 3679억 원 증액했다.
막판 예산 조정이 '호텔 밀실'에서 이뤄졌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예산을 조율하는 계수조정소위는 여의도 국회 앞 어느 호텔의 한 객실에서 열렸다. 쪽지 민원의 수와 내용 등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후문이다.
"'쪽지예산', 불가피하지만 정도 지나쳐"
여야 정치인들은 '쪽지 예산'의 불가피성은 인정하면서도, 밀실 논의가 이뤄진 점, 또 시급한 예산이 깎인 점에 대해선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새누리당 이철우 원내대변인은 이날 오후 국회 브리핑 후 기자와 만나 "쪽지 예산이라는 게 새로운 게 아니다. 지역구 의원들한테는 예산 민원은 당연히 하는 것"이라며 "(청탁 건수, 실세 여부와 상관없이) 미리 계획된 바에 따라 여야 간사, 관계부처 상황에 맞춰 계수조정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논란이 된 '호텔 심의'에 대해선 "밤을 새면서 회의하다보니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원래 종종 가서 회의하면서 식사도 한다. 전혀 문제될 거리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은 이날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언론이 지적하는 대로 예를 들어서 '기초수급자에 대한 의료지원이 깎였다 그러고서 지역 SOC가 늘어났다'는 것은 좀 반성해야 될 점"이라고 비판했다.
민주통합당 박기춘 원내대표는 이날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기 지역에 하나라도 더 사업을 끌어내려는 것은 국회의원의 의무일 수 있고 인지상정"이라면서도 "하지만 방법상에서 국민들에게 그런 면면이 실망스럽게 보인 것은 국민들께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앞서, 민주통합당 김동철 의원은 예결특위 전체회의 의사진행 발언에서 "국가 예산을 다루는 분들이 이렇게 해도 되느냐"며 "왜 특정 지역에 대해서만 그러느냐"고 비판한 바 있다.
민주통합당 윤관석 원내 대변인은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되는 비판에 대해 "당선인의 지역구 예산 배정도 다시 해야 하고, 필요에 의한 것이긴 했다"면서도 "당 내부에서도 정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있다는 것으로 안다. 고칠 건 고치자는 얘기"라며 일부 '실세 특혜' 의혹에 대해선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쪽지가 4500건이라던데, 아마 그게 다 그런(지역구 예산 청탁) 내용은 아닌 것으로 안다"며 과잉 해석은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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