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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냉온탕 오갈 바엔 탕 밖으로 나오라"

[기자의 눈]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MB 대북정책

핵협상 진전과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으로 북미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통미봉남(通美封南)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통미봉남은 북한이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만 대화하려 하는 태도다. 그에 따른 핵심 문제는 한국이 한반도 정세에 대한 주도권을 잃은 채 북미간의 합의에 돈만 댔던 1994년 제네바합의 이후와 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미봉남 우려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움직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정부 역시 대북 식량지원을 고리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뭔가 하긴 하려는 것 같다.

통미봉남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북한이 원하는 대로 6.15선언, 10.4선언 등 남북 정상간 합의를 이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어 남북대화를 제의하고 쌀 차관 제공과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하는 등 지난 정권이 갔던 길을 가면 된다.

그러나 보수층을 기반으로 한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을 '역도'라고 부르는 북한에 쌀을 주고 6.15선언을 이행하겠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사실상 계승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와 반대로만 하면 된다'(ABR, Anything But Roh)는 듯한 이명박 정부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속보이는 대북 식량지원 '원칙'

어쨌든 쌀 지원이라도 해서 통미봉남 시비는 피해가야겠고, 그렇다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할 수도 없고 해서 내놓는 원칙이라는 게 군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일관되게 밝힌 원칙은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북핵 등 정치적 문제와 관계없이 추진하고 △북한이 먼저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원칙은 일견 '숭고한' 듯 보이지만 뒤에 붙은 단서가 문제다. 쌀을 '일정 규모 이상' 지원해야 한다면 북한이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등 다른 인도적 분야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는 인도주의 사안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따라서 현재의 남북관계 수준에서는 '생사확인→상봉→송환'을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길밖에 없다. 그처럼 정치적인 사안을 쌀 지원의 조건으로 거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다.

거기에다가 '일정 규모 이상'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제시하며 북측이 수용키 힘든 정치적 사안을 연계하는 것은 올해 쌀 차관을 위해 책정한 돈 1974억 원을 다 쓸 수는 없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곡물가가 3배 이상 올랐기 때문에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쌀은 계획했던 40~50만 톤 보다 훨씬 적은 20만 톤 이하가 될 터인데, 그마저도 다 줄 수 없다면 기껏해야 10만 톤 정도란 얘기다. 미국이 6월부터 1년간 지원키로 한 50만 톤에 비하면 민망한 규모다.

다음으로 북한이 먼저 요청해야 한다는 원칙. 이건 부당한 건 아니다. 배고픈 쪽에서 아쉬운 소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쌀을 가지고 남북관계를 도모하려 했다면 전략적이지 못했다.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말을 수차례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쌀을 줘야할 때도 북한의 요구가 없으면 줄 수 없는 족쇄가 돼버렸다.

과거에도 쌀 지원은 대개 북한의 선제 요청으로 이뤄졌다. 다만 쌀을 주는 대신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성사시키고 나아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자 하는 남측이 회담 자리를 마련하고, 거기서 이심전심 분위기가 무르익도록 했다.

그런 메커니즘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먼저 요청하라고만 한다면 시쳇말로 먹는 걸로 장난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북측에서 "주면 받겠지만 절대 먼저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오기 섞인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북측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 일각에서는 북한이 비공식적으로라도 요청만 하면 지원이 가능하다는 말도 나오지만 투명성 논란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낮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19일 원칙 하나를 더 추가했다. 북한 주민의 식량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확인되거나 심각한 재해 발생할 경우 선제 요청이 없어도 식량지원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날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현재 북한에 긴급지원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논리적으로 두 발언을 종합하면 아직은 쌀을 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쌀을 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으로는 여겨지지만 북한의 기근을 외면하는데 대한 국내외의 비판과 통미봉남 논란을 피하는 선에서 적당히 주고 말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가만히 있어서 중간만 하는 '지혜'?

쌀 지원의 원칙이 이처럼 문제투성이인 까닭에 끝내 쌀을 준다고 해도 정부는 그를 통한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북한은 소량의 쌀을 받아내면서 구겨진 체면을 만회할만한 무언가를 더 요구할 것이고,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당분간 통미봉남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할 공산이 크다. 북한이 추가로 원하는 무언가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남북관계는 다시 악순환의 회로에 갇히게 된다. 즉, 쌀이 대북 지렛대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상황과 유사하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일본이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며 북일관계가 가까워지려 하자 한반도 정세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쌀 15만 톤 지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별다른 의지와 전략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준 쌀은 이후 남북관계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쌀 수송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논란 때문에 북한에 사과문을 보내는 등 갈등만 커졌다. 5년 내내 그런 식이었다. 통미봉남이란 유명한 말은 바로 그 무렵 탄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명박 정부는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는 냉소적인 시각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지렛대도 안 되고, 잘못하면 남북관계만 더 나빠지고, 남한 내 보수층들의 반발만 커질 수 있는 마당에 섣부른 쌀 카드를 흔들지 말고 그냥 상황을 관망하는 게 차악(次惡)의 선택이라는 논리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강경해서가 아니라 냉온탕을 수없이 오갔기 때문에 더 문제였다. 그걸 닮느니 '가만히 있으면서 중간만 가라'는 충고이기도 하다.

사태를 관망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것은 쌀 지원 같은 긍정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와 같은 난맥상을 가져온 부정적인 언행도 삼가야 한다는 뜻도 있다.

'핵문제가 해결돼야 개성공단을 확장한다'거나(김하중 통일부 장관) '북한 핵시설을 선제공격하겠다'는(김태영 합참의장) 등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 또한 5~6월 꽃게잡이 철 서해상에서의 무력충돌을 억제하는 것도 당면한 과제다. '서해에서 한 번 붙어 보자'는 기류가 군 내부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면 말이다.
▲ 북한 주민들이 국제사회 구호품인 밀가루를 배급받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조금의 진정성이라도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내팽개쳐 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북한 주민들을 돕겠다는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나 국내 민간단체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쌀을 주는 방식이다.

정부는 그간 주곡(쌀)은 직접 그리고 차관 방식으로 지원했고, 지원 주체가 남한 정부가 되어야 남북관계의 지렛대로 쓸 수 있기 때문에 간접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쌀 지원 관행을 꼬이게 해 지렛대로서의 의미를 스스로 없애버린 정부가 직접 지원을 고집하는 건 지금까지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감시할 수 없으면 지원도 없다'(No Monitor No Food)는 원칙(WFP)에 따라 감시 매커니즘을 갖춘 기구를 통한 지원은 군량미 전용 논란도 차단할 수 있다.

당장 지렛대가 되길 바라는 성급한 욕심을 버리고 남북간의 신뢰를 처음부터 다시 쌓는 먼 길을 가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고, 뜻이 있다면 결자해지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일이 있다. 남북관계에 무관심한 대통령이지만 제대로 된 정책옵션을 제시해 보좌해야 하는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인적쇄신이 그것이다.

특히 '쌀 지원은 북한이 먼저 요청해야 한다'는 전략 부재의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청와대 내 스태프들을 교체해야 한다.

그들은 쌀 지원뿐만 아니라 대북정책 전반에 있어 야당 후보 캠프에서 만든 섣부른 정책만을 재생산함으로써 현재의 난맥상을 가져온 주역이다. 그들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통미봉남을 깨기는커녕 냉온탕을 오가는 대북정책으로 인해 대통령마저 어리둥절케 만들 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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