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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연민이 날 쓰게 했다"

故 박경리, 삶과 작품을 꿰뚫은 '생명 사상'

"(…) 그러니까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원주 캠퍼스에서 강의를 하는 김명복 교수가 매우 충격적인 일을 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내용인즉 학교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이 한밤중에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에 놀라 나가 보았더니 바로 옆의 호수에서 철새들이 날개로 얼음을 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김 교수도 그랬을테지만 그때 나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호수가 다 얼어버리면 철새들은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이가 풍부한 호수에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었을 거예요.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체력을 비축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호수가 어는 것을 막고 싶었을 철새들!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들구나.' 중얼거렸지만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 -<현대문학> 2000년 3월호, '다시 Q씨에게'

박경리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강의할 당시 직접 겪은 이 일화는 <토지> 등 그의 문학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생명론'과 그가 자신의 문학에서 꾸준히 보여주는 '생명에 대한 연민'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박경리는 2004년 마산MBC 특집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서울대 교수 송호근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에요, 연민. 연민이라는 것은 불쌍한 데에 대한 것,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또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에요."

그리고 그는 "글 쓰게 하는 힘은 바로 생명에의 연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명론은 그의 대표작 <토지>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사저널> 기자 때부터 박경리를 여러번 만나오며 그의 <토지> 탈고를 "우리 문학의 '거대한 마침표'"라고 표현한 시인 이문재는 박경리가 <토지>를 써온 25년을 이렇게 썼다.

"1969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25년, <토지>에는 행방불명된 남편의 그늘, 암과의 투병, 시대의 압력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가족사 등이 감겨 있다. 또 저 25년에는, 운명에서 한의 미학으로, 문명에서 문화로, 거대한 역사에서 민초들의 자잘한 삶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그 모든 것들을 감싸안는 생명론으로 진화를 거듭한 진화를 거듭한 작가의 정신사 또한 고스란히 용해돼 있다." (<시사저널> 252호)

"나는 <토지>의 도구였을 따름이다"

1927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하는 등 질곡 많은 어린시절과 사춘기를 보냈다.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1946년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돼 한국전쟁 중에 목숨을 잃고, 전쟁 후엔 아들이 죽는 아픔도 겪는다. 그의 외동딸 김영주가 "외할머니와 한국전쟁이 어머니를 작가로 내몰았다"고 말할 정도로 이때 받은 삶의 고통이 그의 작품의 뿌리가 된다.

박경리는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고 이듬해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면서 등단했다. 그 이후 <김약국의 딸들>(1962년), <시장과 전장>(1964년), <파시>(1965년) 등의 역작을 잇달아 내놓았다.
▲ 故 박경리 선생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1969년부터는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에 들어갔다. 전 20권에 달하는 대작 <토지>는 지금의 방대한 규모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1부 분량만 쓰기로 했던 책이 집필 과정에서 한민족의 삶을 아우르는 장대한 서사로 발전하게 된다.

<토지>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을미왜병 등이 지나간 1897년 한가위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15일까지를 훑으며 몰락한 최참판댁의 유일한 후계자인 서희와 하인 길상이로부터 시작 700명이 넘는 인물을 등장시켜 이들 하나하나의 생생한 삶을 그린다. 또 공간적으로도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을 오가며 격동기 한민족의 삶을 다양하게 그려낸다.

<토지> 집필 중에도 그의 개인적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토지> 1부를 쓸 때 그는 유방암으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고 2부를 쓸 때는 외동딸과 결혼한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유신체제 하에서 구속돼 사형 선고까지 받는 일을 겪었다.

그는 <토지> 집필을 시작한지 25년 만에, 광복을 맞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의 대미와 겹쳐지게도 1994년 8월 15일 소설을 탈고한다. 소설을 탈고한 날, 이문재와의 대화에서 박경리는 "저는 <토지>의 도구였을 따름이다"라며 "<토지>를 쓰면서 많이 배웠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우리 민족성, 민족 문화의 창조성, 다양성을 발견한 것도 큰 배움이었다"고 말했다.

박경리는 2003년 4월부터는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3회를 쓴 뒤 중단해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다. 이 작품은 그의 수필과 함께 묶어 낸 <가설을 위한 명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관절 어쩌려고들 이러는 건가"

박경리는 충실한 농부이기도 했다. 그는 1980년 강원 원주시 단구동에서 살 때도, 1999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개관한 토지문화관에서도 손수 야채를 키워냈다. 토지문화관을 찾아 작품을 썼던 후배들, 생전 박경리를 알고 지냈던 많은 문인들이 그가 나눠준 고추를 기억한다.

박경리 스스로도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고추 말리고 마지막으로 꼭지를 딸 때"라고 답하며 20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농부로서의 애착을 드러내곤 했다. 그는 "작품보다는 내 삶 자체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힌 것처럼 농사일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고 '모성(母性)'을 강조했다.

그는 "모성이란 농부가 곡식을 키우는 것 같은, 기르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우주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원동력이 바로 모성입니다. 창조하고 기르는 마음입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부는 박경리의 공로를 인정해 문화예술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훈장'은 아닐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박경리에게 훈장을 추서하면서 그가 남긴 '생명론'의 메시지를 되새길수는 있을지 의문이다.

이들을 위해 철새들이 날아드는 연세대 원주캠퍼스 호수에 수상골프장을 지으려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박경리가 썼던 글을 옮긴다. 그가 이미 생전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두고 "한반도를 죽이는 일"이라며 비판했던 것과 같이 마치 구구절절 이명박 정부가 '관광 자원' 운운하며 추진하는 대운하 사업을 두고 비판하는 호통 같다.

"대관절 어쩌려고들 이러는 건가, 어디까지 가야만 사람들은 직성이 풀리는 걸까요. 뽑히고 버혀지고 멸종하는 초목, 깎이고 막아버리고 숨통이 죄여드는 산천, 갈 곳을 잃고 죽어가는 조수, 넋이 있다면 통곡이 지상에 충만할 것을, 요즘에는 생산을 위한 공장도 아니요, 다만 놀고 즐기기 위한 위락시설의 개발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그것도 경관이 좋은 곳만을 골라서 파괴하고 시궁창을 만들고, 하기는 그게 무슨 대순가요? 이성을 자처하는 동물들은 지구를 파괴하고도 남아도는 핵무기를 신주같이 모셔놓고 있지 않습니까. 배를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눈비 가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스하게, 그런 입성 때문도 아니고, 아닌 그런 것 때문에 다만 생존만을 원하며 세상이 막히지 않고 돌아가게 자리매김한 생명들을 무더기 무더기 대량학살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의 뜻으로 생각하는지요. 달리는 기차 앞에 나무막대기 하나의 역할도 못하면서 나는 왜 지치지도 않고 지껄여야 하는지요."

-<현대문학> 2000년 3월호, '다시 Q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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