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이 군색해진 민주당 앞엔 4년 전 '제2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의 행로가 모범 답안으로 남아 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뭉치는 동시에 대중의 눈높이에서부터 환골탈태의 몸부림을 시작하는 것이다. 협력보단 견제와 투쟁에 방점을 둬야할 '대여(對與)' 관계를 위해서도 '단결'은 지상과제에 가깝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같은' 혹은 '한나라당을 능가하는' 야당의 전범이 될 것인가, 정계개편의 회오리에 휩쓸려 와해 위기로 몰릴 것인가의 기로 앞에서 당장 '손학규 체제'의 존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현실적 목표'로 정했던 80석을 넘은 결과에 현 지도부는 "선방"이란 자평을 내린 반면, 손 대표의 당 운영에 불만을 제기해 온 진영에선 "수준 미달"이란 반응이다.
6~7월께로 예상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각 계파간 각축전도 서로 다른 '총선 평가'를 쟁점으로 점화될 가능성이 높다.
손학규 재신임 난망…전당대회가 계파 각축전으로
다시 '한나라당 교과서'를 펼치자면, 4년 전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 속에서도 박근혜 대표의 개인 브랜드로 참패를 면했고 그 공로를 인정해 선거 이후 전당대회에서 박 대표 체제를 재신임했다. 2년 임기를 안정적으로 채운 박 대표는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등을 두고 대여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한나라당은 모두 친박(親朴)"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강한 구심점을 형성하기도 했다.
현 민주당 상황에서도 선거 지휘봉을 잡았던 손학규 대표가 전당대회에서 재신임을 기대해 볼 만하다. 개헌저지선(100석)은 달성치 못했지만 심리적 마지노선은 지켜냈기 때문이다. 서울 송파병, 부산 사하을, 경남 김해을 등 전통적 열세 지역에서 의외의 당선자를 낸 것도 큰 성과로 꼽힌다.
이에 박선숙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은 9일 저녁 브리핑에서 "50석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과 같은 지지를 보내 주신 국민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어려운 상황이지만 단합해서 좌절하지 않고 이 위기를 돌파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각 지역 개표 상황이 반절 이상 진행된 9시 이후부터는 당직자들 사이에서도 '최악'은 면했다는 안도감이 읽혔다.
"대선 참패 후 3개월 만에 총선을 치러야 했던 악조건"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기에 당장 내일 선대위 해단식에서부터 현 지도부를 향한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비록 낙선했지만 손 대표가 종로에 출마해 격전을 벌인 공로는 치하할 만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실제 재신임으로까지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공천과정에서 당내 최대계파였던 '정동영계'가 대거 낙마하면서 당내 기반이 미약했던 손 대표가 주도권을 잡는 듯 했지만, '손학규계'로 꼽히는 인사들 역시 선거에서 살아 돌아오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당내 권력 지형은 '진공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강한 야당'을 지향으로 삼아야할 상황인 만큼, '한나라당 출신'이란 꼬리표도 부담이다.
이에 총선 후 3개월 내에 치르기로 한 전당대회가 7월경에서 크게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시기와 무관하게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각 계파들의 각축전으로 치러질 공산도 크다.
당내 분위기가 '새 리더십' 쪽으로 기울 경우, 손 대표를 대신해 전국 유세를 책임져 온 강금실 공동선대위원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비례대표까지 마다해 가며 권력에 대한 무관심을 피력해 온 강 위원장이지만 위기에 처한 당을 두고 발을 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총선에서 재기에 성공한 추미애 의원도 당권 도전 의사를 굳힌 것으로 알려진다. 추 의원의 경우 영남 출신으로 호남에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점이 최대 강점으로 꼽히며,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비례대표 추천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력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구(舊) 민주계'를 제어하는 데에도 적절한 카드로 거론된다.
이 밖에 당내 비토세력이 없는 정세균 공동선대위원장도 끊임없이 거론되는 한편, 4선 고지를 밟은 천정배 전 법무장관 측에서 당 노선 재정립을 위한 경쟁을 준비 중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살아남은 386, 제 역할 할까?
손 대표의 우군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수도권 386'이 대체로 몰락해 야인 생활을 준비할 처지가 됐다. 당초 수도권 386의 상당수가 한나라당 후보들과 접전세를 유지하며 생환에 대한 기대를 높여왔으나 역대 최저로 기록된 투표율과 함께 한나라당 후보의 막판 추격을 허락하고 말았다. 손 대표 체제에서 중추 역할을 해 온 임종석, 정봉주 의원 등이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재입성에 성공한 386 의원들의 경우는 그 역할 비중이 한층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386의 맏형 격인 김부겸, 송영길, 이종걸 의원은 3선에 성공해 '수도권 다선'으로 몸값을 올렸다. 이들은 대선 경선때는 손 대표를 지지했지만 행적으로는 재야파 등 개혁성향 일원과도 가까워 치열한 계파경쟁 와중에서 중재역할과 캐스팅 보트 역할 등을 다양하게 담당할 수 있는 인물로 꼽힌다.
노선 경쟁이 세력 와해로 이어질 수도
민주당이 'KO패'를 면한 만큼 당장 급류에 휘말릴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러나 총선 패배 후유증을 극복하고 체제를 재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계파별로 펼쳐질 각자도생 노력이 야권발(發) 정계개편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열린우리당 내 주류 계파 중 하나였던 '친노(親盧)세력'은 구(舊)민주당과의 합당을 기점으로 세력을 분리해 나갔다. 이해찬 전 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총선 이후 따로 혹은 함께 새 정당을 꾸릴 채비를 갖추고 있는 만큼, 민주당 내 잔류 친노세력의 유출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손 대표 측이 재신임 드라이브를 강하게 추진할 경우 당 노선에 대한 시각차가 세력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김근태·천정배 전 장관 측은 손 대표가 정립한 민주당의 노선이나 공천 방향 등에 관해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그간 언급을 삼가며 총선 이후를 기다려왔다. '당 개혁'에 대한 이들의 관점은 손 대표는 물론 정동영계와 구 민주계 등의 시각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만큼, 각 계파 간의 차이가 건전한 노선 경쟁이 아닌 원망의 형식으로 터져 나올 경우 이들을 묶고 있던 울타리 자체가 파괴될 우려도 있다는 것이 당 안팎의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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