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와 함께 자신의 오른 어깨를 상대의 왼쪽 어깨에 갖다 붙이며 귓가에 "좀 도와주십시오"를 속삭이는 이 의원의 '5초 동작'에 리어카를 밀던 노점상도, 양 손에 쇼핑백을 든 중년 여성도 선뜻 손을 내 준다. 소규모 상가 30여 곳을 도는 동안 수행원 손에 들린 명함은 한 장도 줄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12년 째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이 의원은 그야말로 '얼굴이 명함'이었다.
한 시간 후, 연신내 역 연서상가에선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대민접촉'엔 이력이 난 듯한 이 의원과 달리 문 후보는 70미터 남짓 늘어선 상가 한 줄을 도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선거 사무실을 낸 지 불과 열흘, 만나는 사람은 죄다 초면인 탓에 악수 전에 명함부터 건네야 하고 "TV에선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은 "유한킴벌리 사장 했던 사람입니다"로 시작하는 자기소개까지 끝내야 하니 속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민이 앉아 있으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라도 눈높이를 맞추는 '문국현표 선거운동'은 더디긴 했지만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는 데엔 효과적이었다. 문 대표와 눈을 맞춘 상인들은 "귀가 잘 생겼다" 혹은 "부인 인상이 좋더라"며 호감을 표했고 꼬리에 꼬리를 문 대화는 한 자리에서 5분 씩 이어지기도 했다.
서울 최대 격전지인 은평을(乙)의 두 경쟁자는 이렇듯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선거 첫 날을 열었다.
이재오식 '스킨십 정치'에 찾아온 위기
이 의원은 다선 의원이 많은 한나라당에서도 '지역구 관리의 달인'으로 꼽힌다. 유명세를 확인하듯 이날 하루 구산역, 연신내역, 불광역 주변 상가에서 만난 주민들 열에 아홉이 이 의원과의 '개인적 인연'을 갖고 있었다. 구산역 인근 안경원 주인이 "이 의원과 같은 사우나에 다닌다"고 '알몸우정'을 과시하는가 하면, 불광동 먹자거리 약국 주인은 "한 달에 한 번은 이 의원을 약수터에서 만난다"고 자랑하는 식이다.
"가게에 앉아만 있어도 한 달에 한 두 번은 이 의원을 볼 수 있다. 이재오는 선거철만 얼굴을 내미는 '뱃지'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다."(60대 오 모씨·음식점 주인)
그러나 스킨십을 바탕으로 한 이 의원과 지역구민 간의 끈끈한 유대감에도 균열이 시작됐다. '외지인' 문 대표에게 적게는 12%포인트(한겨레 21~22일) 많게는 20%포인트(KBS 23일)까지 뒤지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 의원에게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연신내 물빛공원에 산책을 나온 60대 남성은 "이전 선거에서 세 번 다 이재오를 찍었지만 이번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TV에 나오는 이재오는 낡은 잠바 걸치고 쌀집 자전거 타던 서민이 아니더라"며 "권력 쥐겠다고 싸움질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마음을 살피겠냐"고 했다.
함께 나온 부인도 "대통령도 돈이 많아 서민 생활 모르는데 측근들마저 승승장구하면 앞으로 밑바닥엔 눈길도 안 줄 것 같다"며 말을 거들었다.
공천에서 탈락한 박근혜계 의원들이 '이재오 공천'을 비난하며 탈당하고 이상득 국회부의장 공천을 두고 알력을 벌이는 등 여권 내에서 벌어진 '파워게임'의 중심엔 이 의원이 서 있었고, 그 장면 장면이 일부 지역구민들에게는 '권력자의 오만'으로 비쳐져 오랜 지지를 철회하게 만든 것으로 보였다.
'반 운하' 여론, 문국현 지지로
문 대표가 예상외의 선전을 거두고 있는 데에도 '이재오 반사효과'가 적잖이 작용하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이날 문 대표의 선거사무실에 찾아온 한 지역인사는 "이재오를 몰아내기 위해 문 대표를 돕기로 했다"며 박근혜 전 대표와 나란히 찍은 사진이 박힌 명함을 건네기도 했다. 이 인사는 "최측근이 혈혈단신으로 나온 문 대표 앞에 깨지는 꼴을 봐야 이명박 대통령도 정신을 차릴 것"이라며 "우리는 '반(反)오만' 연대"라고 주장했다. 문 대표 역시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대운하 저지를 위해서라면 '친박연대', '박사모' 등과도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운하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이 지역에서 '대운하 전선'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졌다. 이 의원은 "은평구에 대운하가 지나가나. 왜 은평구 선거에서 대운하 논란을 벌이냐"고 불만을 표했지만, 운하 예정지를 자전거로 탐방하는 등 그간 이 의원이 '대운하 전도사'를 자처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거운동 시작과 함께 대로 곳곳에 걸린 문 대표 플래카드에는 '대운하 반대'란 빨간 깃발이 꽂혀 있는 반면, 이 의원의 플래카드에는 '불광천을 제 2의 청계천으로', '은평 발전의 완성' 등과 같은 지역 개발 구호로 빼곡했다.
이에 이날 만난 지역구민 대부분이 "대운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며 운하에 대한 찬반을 유보하면서도 "이 의원이 당선되면 대운하를 밀어붙일 것 같다"는 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역 총선 결과를 '대운하 국민투표'로 등치시키는 문 대표식 해석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대운하 밀어붙이기'를 우려하는 민심이 문 대표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조직력' 뒷심 무시 못 해
현 정권실세와 대운하 전도사라는 이 의원의 '상징성' 탓에 형성된 특수한 지역 구도가 '힘 있는 여당론' 대 '견제론'으로 일별되는 전국적 구도와 맞물려 어떠한 결과를 낼지는 아직 예단키 어려운 상황이다. 여론조사 상에서 문 대표가 앞서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의원의 '조직력'을 감안할 때 언제든지 따라잡힐 수 있는 격차라는 것은 문 대표 측도 인정하는 바다.
'토박이 이재오'와 대비되는 '외지인' 이미지는 문 대표의 아킬레스건이다. 대선 이후에도 도곡동 고급 주택에 살아온 문 대표는 출마 선언과 함께 불광동 한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했다.
지난 26일 이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장소를 굳이 구산동 자택으로 잡자 "문 대표를 노린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 의원은 이 자리에서 "1984년에 산 집인데 낡다보니 비가 새는 곳은 기와를 갈아도 비가 샌다"며 문 대표를 "도곡동 땅부자"라고 비난했었다.
불광동 대조시장에서 순대와 떡볶이를 먹고 있던 한 주부는 "국회의원 되면 다시 강남으로 가는 거 아니냐"며 "대선도 자기 돈으로 치를 만큼 돈이 많던데 이런 데서 한 끼 때우는 우리 살림을 모를 것 같다"고 말했다.
분식집 여주인 역시 "우리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 사람 공약들은 죄다 대통령 선거 때 써먹은 공약이라더라"며 "어쨌거나 뉴타운은 이재오 공이니 이번에도 이재오를 믿어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개발에 힘을 쓸 수 있는 위치는 '현 정권 실세'의 '강점'이기도 하다.
양 측이 이처럼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의 송미화 후보 역시 '사퇴설'을 잠재우고 뒤늦은 추격전에 나섰다. 2004년 선거에서 이 의원에게 2000여 표 차로 석패했던 송 후보는 시의원 경력을 살려 '지역전문가론'으로 승부를 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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