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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시대는 세속화된 시대였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9> 계몽사상의 재조명 ②

신정론과 이신론

일반적으로 계몽사상은 유럽인들이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사고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주장된다. 기독교의 종교적 독단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지도적인 계몽사상가들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독교 신학의 불합리성과 교회의 부패를 통박하고 비판했다. 따라서 그런 글들만을 읽으며 그런 인상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 문제로 심각한 고뇌를 겪었다. 각 나라에서 카톨릭과 신교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고 대량학살 사건들도 일어났다. 또 17세기에 들어와서는 30년 전쟁 같은 국제적인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공포 속에서 그들은 과연 신이란 무엇인지 기독교는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755년에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시가 거의 파괴되고 수만명의 사망자가 났다. 사람들은 이 비극적 사건과 관련해 악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신이 이런 악을 예비하였다면 그 신은 어떤 신인가 하는 것이다.
리스본 대지진 (1755년)으로 도시인구 23만명 중 6~1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들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이성적인 종교나 은혜로운 신의 가능성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논의이다. 이렇게 17, 18세기의 일부 지식인들이 신의 존재와 권능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그들을 기독교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종교의 세속화를 주장하는 또 다른 논거는 이신론(理信論: deism)의 존재이다. 이신론은 초월적이며 계시적인 신을 거부한다. 신을 이 우주의 창조주로 인정은 하되 그 후의 운행에는 관계를 하지 않는 존재로 본다. 마치 시계를 만들어냈으나 그 후 시계의 작동에는 관계 하지 않는 시계공의 역할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신론자들은 예수의 부활 같은 것을 믿지 않았고 또 카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기적 같은 많은 초자연적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무신론 내지 범신론과 가까웠으므로 기독교인들이 기존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릴지도 모를 이신론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미 16세기부터 그런 두려움이 나타난다. 1654년에는 프랑스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장 필로라는 사람이, 카톨릭 개혁가인 얀센 등 7명이 프랑스의 카톨릭을 파괴하고 그것을 이신론으로 대치하기 위해 1621년에 비밀모임을 가졌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 이신론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얀센 (Cornelius Jansenius, 1585~1638), 벨기에 루뱅 대학 교수. 얀센주의를 만들었다.

17세기 말의 프랑스 위그노인 삐에르 벨은 그의 시대가 '자유사상가들과 이신론자로 가득 차있다'고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국교회 목사들이 이신론 운동의 존재를 점점 확신한 것 같고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이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정말 그렇게 두려움을 느낄 만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세력이나 운동으로 성장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일관된 이론체계를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사람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이신론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은 영국의 존 톨랜드, 마튜 틴달, 앤토니 콜린스와 프랑스의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같은 사람들이다. 이 외에 사료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몽땅 합쳐 보아야 20명이 채 안된다. 무신론자는 더 적어서 7명 정도이다. 그러니 이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파괴하는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별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신론의 존재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돌바흐(Baron d'Holbach, 1723~1789), 유럽에서 최초로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일컫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현대 서양역사가들도 이신론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래서 이신론자들의 수가 매우 많았던 것처럼 주장한다. 이렇게 이신론이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이신론이 근대성의 지표라고 할 세속성을 강화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료에 기초하지 않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종교적 관용

계몽사상가들은 종교적 관용을 부르짖었고 그래서 서양에서 종교의 자유를 가져오는 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주장된다. 1762년에 '관용론'을 써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 볼테르 같은 사람이 특히 부각되는 이유이다.

볼테르가 그 글을 쓴 것은 칼라 사건 때문이다. 1761년에 프랑스 남부 툴루스의 위그노파인 칼라라는 포목상인의 집에서 맏아들이 목을 매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아마 자살을 한 것 같으나 당시에는 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려 하자 아버지가 그것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때는 위그노가 탄압을 받을 때이므로 칼라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법정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는 사지가 찢긴 다음 시체까지 불태워지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볼테르는 이 사건을 가족 사이의 유대까지 파괴할 정도로 심각한 카톨릭의 종교적 아집의 결과로 보았다. 그래서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관용론'을 쓴 것이다. 정부는 그 팜플렛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탄압했으나 결국 1787년에 관용칙령을 통해 위그노파에게 일부 시민적 권리를 허용했다. 그래서 볼테르가 신앙의 자유, 나아가 양심의 자유를 가져온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관용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한편에서 종교개혁과 그에 따른 참혹한 종교전쟁에 대한 반성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 사회적 여러 문제들과 얽혀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명예혁명 후인 1689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종교적 관용을 허용했다. 프러시아에서도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한 1740년에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허용했다. 특히 프러시아 같이 종교적 분열이 심한 나라에서는 국가통합을 위해 반드시 종교적 관용이 필요했다. 왕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Wilhelm II, 1744~1797)

또 경제발전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추방된 신교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려고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관용의 실천은 단순한 계몽사상가들의 업적이 아니다. 군주들의 정치, 사회적인 판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볼테르는 다른 기독교 종파에 대해서는 관용을 주장했으나 유대교에 대해서는 전연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계몽사상기의 가장 열렬한 반유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관용의 사도'라는 그의 명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계몽시대의 종교성

그러면 18세기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 살았을까.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종교를 떠나서 완전히 세속적인 삶을 살았을까. 계몽사상 시기를 이성 대 종교의 대립으로 보는 생각은 계몽사상이 반교회주의의 기초 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이성에 대한 호소를 폭 넓게 함으로써 신앙의 수준이 떨어지고 경건성도 약화되었다고 보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오늘날 잘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 시기에는 일부 세속화 경향과 함께 그 반대 경향도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이 기독교를 신봉했으며 종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일부 무신론자나 이신론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또 세속화를 이야기하려면 정부나 사회의 기준이 세속화 되어야 하나 별로 그렇지 않았다. 신앙의 수준도 과거보다 별로 낮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18세기에 한 편에서 새로운 종교적 열정이 불붙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발전한 카톨릭의 분파인 얀센주의, 독일에서 발전한 경건주의, 잉글랜드에서 발전한 메소디즘(감리교파)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모두 새롭게 초월적 신앙을 강조하는 종파들이다. 특히 독일의 경건주의는 17세기의 30년 전쟁이 가져다 준 참화를 신의 벌로 생각하고 이를 회개하려는 가운데 발전한 것이다.

또 일반 민중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상당 부분 무지몽매함과 미신에 묶여 살았다. 18세기 초까지도 마녀사냥이 행해지는 곳이 있었고 교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악마추방을 위해 엑조시즘(악마추방 시술)을 행했다. 이 시대의 유럽 사회는 결코 사람들이 종교성이나 미신을 떠나 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계몽사상가들이 마치 세속화에 큰 역할을 하여 일거에 세상이 바뀐 것처럼 생각해서 안 될 것은 당연하다. 물론 18세기에 세속화를 위한 모든 주된 논의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나 세속화는 그 후 오랜 시간이 걸린 느린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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