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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승부를 겨뤘던 조선의 프로페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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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역사와 승부를 겨뤘던 조선의 프로페셔널"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2/06] '조선의 프로페셔널' 펴낸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 하면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주로 정치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그러나 사람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옛 문헌들을 찾아 오랜 세월 숨겨져 있던 역사 속의 숨은 명인들의 삶을 조명한 책이 최근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조선의 프로페셔널'이란 책인데요,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어제에 이어 이 책의 저자인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와 함께 조선시대 프로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책속의 인물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얘기 나눠봅니다.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안대회 교숩니다!

박인규 :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조선의 프로페셔널, 어제는 주로 여행가 정란,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철조, 원예가 유박, 이렇게 했는데 바둑 프로가 있었다고 정운창. 이 분은 선비는 아니고 전라도 보성인가요?

안대회 : 네. 전라남도 보성의 평민입니다.

박인규 : 아주 시골, 그 당시에도 굉장히 시골이었는데 평민으로서 일세를 휘저었다고 해요. 그런데 10년동안 바둑만 할 수 있습니까? 책에 보니까 그렇던데

안대회 : 바둑 기사에 관한 전기를 쓴다는 것이 당시로선 쉽지 않습니다. 유명한 사람 아니면 쉽지 전기를 써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이 분에 대해서 전기를 쓴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두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정운창이라는 분은 일세를 뒤흔들었던 아주 대단한 국수, 국가에서 인정한 바둑기사였다고 볼 수 있는데요

박인규 : 그 전기를 써준 유명한 선비가 어떤 분들입니까?

안대회 : 우의정을 지낸 이서구라고 연암의 제자죠. 이옥이라고 하는 18,19세기 최고 작가라고 평가받는 분, 또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이라고 하는 분 역시 이 분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세 개의 글이 남아있어서

박인규 : 당대의 쟁쟁한 선비들이 전기를 써줄 정도면 정말 대단한 바둑기사였던 모양이죠?

안대회 : 그렇죠. 지금도 유명한 바둑기사들 하면 이름들을 쟁쟁한 분들이 많잖아요. 한국의 바둑 수준은 세계 최고라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있고, 그런데 조선시대 바둑기사 역시 대단한 실력을 갖췄다고 합니다. 국수들의 맥이 있는데, 그 국수들의 맥 가운데 정운창이 가장 중요한 맥의 하나로. 지금도 바둑의 국수들은 대부분 전라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박인규 : 하긴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 심지어 이세돌까지 다 전라도라고 하대요.

안대회 : 이 분 역시 전라남도 보성 출신인데 신분은 평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둑에 취미를 둬서 10년 동안 바둑을 뒀는데 거의 문밖을 나서지 않고 바둑공부만 했는데, 사촌 형님인가 하는 집안의 형님이 역시 또 바둑을 잘 뒀대요. 그런데 정운창이라는 사람한테 너는 지금 네 수준이면 더 이상 두지 않고 놀아도 된다, 나는 아직 아니다 하면서 10년을 채워서 자기 조예를 닦았다고 합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요즘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경우는 바둑을 잘 둬서 한 번에 상금을 2억씩 받던데, 정운창이 그 당시 최고의 기사였다면 어떤 대가랄까 보답을 받은 겁니까?

안대회 : 그 당시는 정해져 있는 건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에 유명한 바둑기사가 나오면 주변에, 요즘 스포츠스타와 비슷하게 사람들을 몰고 다녔다고 해요. 그리고 당시 유명한 정객이면 유명한 바둑기사가 자기 휘하에 있지 않으면 유명하다는 이름을 못 들을 정도로 바둑기사는 대단한 인기였고, 그래서 바둑을 한 판 둘 경우 그 당시에는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상당한 보수가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아주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프로 바둑기사와 거의 같은 초기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을 정돕니다.

박인규 : 이단전이라는 분은 천민 출신의 시인인데 10년간 독학으로 시를 배웠다. 이 분도 정운창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안대회 : 어떻게 보면 더 열악하다고 볼 수 있죠. 이 분은 연암 박지원의 친구로서 유언호라고 하는 좌의정을 지낸 분인데 그 집안의 종이었습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굉장히 못생겼는데 종이기도 하고, 그런데 주인집 아이들 공부하는 걸 옆에서 따라하는데 그걸 여하튼 열심히 따라해서, 어깨너머 공부한 거죠. 그런데 굉장히 잘 하고 열심히 하니까 그 집에서 인정을 해줘서 너는 일을 좀 덜 해도 된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을 안 할 순 없었을 거고요. 밤새워 시를 지어서 당시 유명하다고 하는 분들을 새벽같이 따라가 문 두드려서 제 시 좀 봐주십시오. 그렇게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이단전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부르지 않았는데 찾아가서 제 것 좀 한 번 봐주십시오 하는, 굉장히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박인규 : 요즘 말로 치면 시작에 대한 열정에 불타오른 거군요. 이 분의 작품이나 작품집이 남아 있습니까?

안대회 : 원래는 작품집이 남아있어서 이용휴 같은 분은 작품집에 서문도 써주고 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그 당시 풍요속선이라든지 하는 유명한 작품 선집에 이 분의 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많이 뽑혀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 상당히 유명한 작가로 인정받았다는 걸 입증하죠. 지금 작품집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박인규 : 천민 출신이라고 한다면 선비들이 짓던 시와는 약간 내용이나 형식이 달랐을 것 같은데

안대회 : 형식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달랐다고 볼 순 없는데 내용 면에서는 천민으로서 갖는 어떤 불만이라든지 복잡다단한 내면의식 같은 것들이 표현돼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보면, 자기 신분... 나는 무시당하는 존재, 하늘에다가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에 관한 게 나와요. 이 분이 신분적으로 굉장히 불우했던 분이라는 걸 알 수가 있죠. 시는 굉장히 좋습니다 이 분 시가.

박인규 : 조선시대 마니아들의 특징으로 어떤 역사와 승부한다, 시대와 대결한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최북이라는 화가, 최북 이름도 들어본 것 같아요. 이 분이 가장 그런 면에서는 자의식이랄까 그런 게 강했던 분인 것 같은데

안대회 : 제가 글을 쓴 열 분들 다 자의식이 강한 분이죠. 그 중에서도 최북 같은 경우는 자의식이 강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고 화가로서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왜곡되게 알려진 부분도 많고 이 분의 자의식이 강한 건 호에도 나타나는데요, 칠칠이라는 호가 바로 그겁니다.

박인규 : 일곱 칠, 일곱 칠. 우리가 보통, 칠칠 하면 칠칠치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안대회 : 칠칠치 못하다. 이 분이 호를 쓸 때도 그렇게 그것을 그 당시에도 아마 그랬을 거라고 판단하고 지금 미술사가들이 전부 이 호를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건 최북은 두 가지를 다 예상했어요. 원래 칠칠은 당나라의 유명한 화가입니다. 꽃을 피우고 하는 분인데, 겨울에 진달래꽃이 피는 사람이었습니다. 칠칠이라는 도사가.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걸 만들어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칠칠이라는 용어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칠칠치 못하다. 이중적인 거죠. 이 분의 호 가운데 호생관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붓으로 먹고 산다는 의미거든요. 붓으로 먹고 사는 화가라는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도 있어요. 부처라고 하는 것이, 부처가 원래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는데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지냐, 화가의 붓끝에서 만들어진다. 화가라는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위대한 존재다. 부처와 같은 위대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화가만이 손끝으로 할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중적입니다.

박인규 : 칠칠이나 호생관이라는 호가 대단한 자부심을 숨기고 있는 거군요.

안대회 : 그렇죠. 겉으로 보면 자기 비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자의식의 표현이죠.

박인규 : 어떤 잘 사는 집에서 그림 그려달라고 했더니 정말 그리기 싫어서 싫다고 하면서 자기 눈을 찔렀다고 해요. 실화입니까?

안대회 : 네. 이 분은 애꾸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건 조금 만년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얘기 들을 때마다 좀 끔찍한 느낌이 듭니다. 광기이기도 하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고흐가 자기 귀를 잘랐다는 얘기는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명나라 화가로서 서위라는 분은 송곳으로 자기 귀를 뚫었어요. 역시 유명한 화갑니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다 예술가의 광기지만 주체할 수 없는 자의식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침해받거나 했을 때 그런 행동이 나오는데, 최북 같은 분은 자기의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다른 사람이 건드리니까, 내가 그림을 주고 싶은 사람한테만 준다라고 해서 자기 눈을 찔러서. 눈이 없으면 그림 못 그리니까, 라고 하면서 찔렀던 것이죠.

박인규 : 나 그림 안 그릴래. 그런 의미였군요.

안대회 : 그런 자의식을 표현하는 사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분은 그림값을 자기가 정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정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는 요즘으로 치자면 한 100만원짜리 그림이라고 그렸는데 다른 사람이 1000만원을 주면 넌 그림값도 몰라, 그러면서 그대로 가져가 버리고

박인규 : 넌 그림을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최북의 말년, 최후는 굉장히 쓸쓸했다고 해요.

안대회 : 사실 다른 분에 비해서 장수하신 분인데, 일흔을 넘기신 분인데 이 분이 술을 굉장히 즐겼고 해서 아주 추운 겨울날 만취해서 길거리에서 동사한 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말년까지 상당히 고생하면서, 말년에 가서도 생계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면 그대로 술값을 한다든지 다른 사람 준다든가 해서 말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적어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을 순 있겠습니다만 가족들은 상당히 힘들었겠네요.
조선시대에 책을 많이 봤겠죠. 책장사인데 조신선이라는 분, 굉장히 독특했던 모양이에요.

안대회 : 조선시대에는 요즘과 같은 서점이 활성화되지 못했습니다. 서점이라는 것도 사실 근대의 산물입니다. 조선시대 같은 경우 주로 거간꾼이라고, 책주름이라고도 하고 책회, 책을 중매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중매하는 사람이 책을 파는 사람하고 사는 사람을 연결시켜 줘서 커미션을 받는 건데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박인규 : 요즘으로 치면 도서중개사쯤 되겠네요.

안대회 : 이 조신선이라는 분은 당대 유명한 사람들한테 전부 책을 팔았습니다. 예를 들면 다산 정약용도 이 분한테 책을 샀어요. 그 당시 유명하다는 사람 중에 이 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분은 누가 어떤 책을 사고 싶어하는지를 알고 어떤 사람이 책을 갖고 있으면서 어떤 종류의 책을 많이 갖고 있고 언제 팔고 싶어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책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었고 또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중개를 했습니다. 책 자체의 정보, 책이 어떤 내용을 갖고 있고 어떤 판본이 좋고 그런 것들을 굉장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박인규 : 요즘으로 치면 지식경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신선이라는 게 본명입니까?

안대회 : 본명은 아니고 신선은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신선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 분은 얼굴이 숫십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아서 거의 신선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밥먹는 걸 못봤답니다. 늘 어느 정도 책을 팔면 술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가고 사는 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고. 그런 아주 살아가는 모습이 좀 신비에 싸인 분이었던 것 같아요.

박인규 : 양반 출신은 아니었겠네요?

안대회 : 양반 출신은 아니었습니다. 중인 이하 평민이었던 걸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조선시대에 차별받았던 분야 중 하나가 과학기술인데, 자명종 이게 시계죠. 스스로 우는 시계인데, 최천약이라는 분도 대단했던 것 같아요.


▲ ⓒ프레시안

안대회 :
예. 최천약이라는 분은 동래 , 부산의 평민이었습니다. 자기는 천재적이었다고 하는데 저는 꼭 그렇게만 보지 않고 굉장히 노력했던 분으로 조각, 온갖 부분에 만능이었습니다. 무기까지도 만들고. 주 기술이 바로 자명종 고치는 것이었다고 하죠. 그래서 동래 옆에 왜관이 있었습니다. 그 왜관이 서양기술까지 그 안에 들어와 있고 칼 만드는 기술자도 들어와 있어서 거기 가서 공부했고. 또 충청도에 제련하는 농기구 만드는 데서 합금 같은 것도 공부하고 해서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던 기술자였는데, 본인 스스로 자기는 천재다... 약간 과장되게 말했지만 노력을 통해서 그런 유명한 기술자로 성장해서 사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조가 인정했던 거의 유일한 기술자. 어용기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영조 전속 기술자

박인규 : 국가 공인 명장. 그 밖에 무용가 운심. 검무를 잘 췄다, 대단했던 모양이죠 이 분도? 원래 기생이었다면서요?

안대회 : 네. 밀양 출신의 기생이었는데요. 사실은 그 당시 검무가 천천히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 18세기에는 당시 무용 레퍼토리 가운데 검무가 최고였습니다. 검무를 못 추면 기생 축에도 못 들 정도로 최고였는데,. 그렇게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누구냐 바로 운심이라고 하는 밀양 출신 기생입니다. 이 분은 굉장히 자부심이 강하고 도도했다고 해요. 기생이 어느 정도까지 도도했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운데요, 이 분은 대단히 도도해서 나이 들어 전국을 방랑하면서 아마 전국 곳곳에 퍼진 자기 제자들을 순시찰 겸 했던 것 같은데, 자부심을 갖고 했던. 그런 이야기는 연암의 글에도 나오고 송대중의 글에도 나오고 밀양 출신의 문집 글에도 나오고 기생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문집에 운심이야기가 나오는데 한결같이 도도하지만 굉장히 잘 췄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무용가로 나옵니다. 조선시대 무용가로서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김성기라는 음악가도 소개하셨는데 어떤 분입니까?

안대회 : 김성기는 숙종 영조 때 음악가인데, 사실은 음악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입니다. 악보도 남기고 했던 분이고 가곡이나 시조창에도 아주 중요한 분인데, 이 분 역시 원래는 음악가가 아니었는데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서 공부를 해서 당대 최고의 악사가 됐는데, 이 분 역시 남한테 불려다니면서 음악하기 싫어서 다 때려치우고 마포에 은거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음악을 들려준 악사죠.

박인규 : 우리가 보통 서양음악을 기준으로 하면 작곡가다 연주가다, 성악가다 얘기하는데 김성기는

안대회 : 그런 걸 다 포함하고 있어요. 악보까지도 남기고 유명한 피리, 현악기까지 연주한 분이고. 또 제자들을 기른 음악교육자라고도 볼 수 있죠.

박인규 :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열 분 중에서 이름을 들어본 분은 최북 한 분 정도였는데, 쭉 열 분을 보면서 느낀 게 뭐냐면 예를 들어 운심, 김성기, 조신선, 유박 이런 분들이 그 당시의 대단한 전문가였다면 그들의 전문적인 기술 이런 것들이 후대에 제대로 전해졌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분들의 탁월한 능력이나 이런 것들을 우린 제대로 전수받았는가

안대회 : 전수된 부분이 있고 안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운심 같은 경우는 지금도 밀양에 가면 이 분의 묘가 있고, 지금도 운심의 검무를 그쪽에서 계승받아서 제자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가을에 분당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박인규 : 말양에 계신 분들이 운심이라는 분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춤은 운심이 만든 춤이다.

안대회 : 알고 있습니다. 지금 진주 검무가 문화재로 인정받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박인규 : 저희는 진주 검무를 알고 있는데 사실.

안대회 : 네. 그런데 밀양 검무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로 지정을 못 받은 것 같은데 그쪽에선 지금까지도 면면이 계승되고 있고 그것이 굉장히 우수한 검무라는 걸 주장하고 있죠. 저도 다른 일 때문에 미처 보지를 못했지만 다음에 꼭 한 번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계승되고 있고, 예컨대 정철조 같은 경우 지금도 규장각에 이 분이 참여해서 그린 지도가 남아있고. 그 지도가 김정호의 천구도와 대동여지도에 연결돼 있습니다. 김정호가 천구도 서문에서 자기 지도가 있게 된 역사적인 맥락을 쭉 이야기하면서 바로 정철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계승 안 된 것 같지만 계승돼서 내려와 있는네 근대를 지나가면서 다양한 것들이 단절되다 보니까 마치 계승도 안 된 것처럼 보이는 거죠.

박인규 :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던 셈이네요. 대부분 이 분들이 시대와 대결하고 역사와 견주고 하다 보니 좀 현실적인 삶은 어려웠을 것 같고. 특히 아까도 최북 같은 분은 술 마시고 객사, 눈 속에서 얼어죽었다고 하셨는데 대부분 현실적인 삶은 불행했다고 할 수 있나요?

안대회 : 제가 조사해 보니까 현실적으로 그렇게 안락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진 않습니다. 이 분들이 자기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그 시대정신과 충돌하고, 자의식이 강하다 보니 그 시대 행세하던 분들과 충돌하고.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불행하게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술자 최천약 같은 경우 말년까지 큰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 같고요, 많은 분들이 인정받긴 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가정적으로 행복했다고 보긴 어렵고. 그런 것들이 뭐로 표현됐는가 하면, 음주.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과음해서 죽는 경우가 많고. 예컨대 정철조 같은 경우도 과음을 많이 했습니다. 아까 최북도 그랬고. 이단전도 역시 그랬고. 그런 사회와의 불화라고 할까, 괴로움을 술로 달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이 바로 조선사회가 이런 전문인, 프로페셔널을 좀 확산시키지 못한 데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박인규 : 어떤 면에서 그 분들이 사회적 대가와 대접을 받았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이럴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조금 전에 그런 전문가적인 능력 같은 게 계승이 잘 안 된 거 아니냐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어제 하신 말씀을 연결시켜 보면. 한국의 치, 벽과 일본의 오타쿠를 비교해 보면 그런 외향적이면서 뭔가 내보여주고 싶고, 그런 조선의 프로페셔널 정신들을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이어온 거 아닌가요?

안대회 : 저는 이어왔다고 봐요.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그런 것들이 전에는 좀 억눌려 있었는데 경제도 발전하고 하면서 이런 것들이 좀 확산되는 거 아닌가. 더 커지고. 그런데 그런 지적은 이미 18세기에 성대중이라는 분이 하고 있어요. 뭐라고 하냐면,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남자들의 성향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은 발전가능성이 있다. 왜냐, 한국의 남자들은 집밖을 나서면 집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그래서 멀리 여행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중국 군사도 보고 일본 군사도 봤는데, 일본도 여행했던 분입니다. 그렇지 않다. 한국은 앞으로 잘 될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 부분이 한국사람의 어떤 숨겨져 있는 능력, 성향 같은 걸 발견한 게 아닌가. 그래서 사실 그 당시에 프로페셔널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들었지만 그런 분들의 성향 속에서 적극적이고 뭘 하려고 하는 모습을 캐치할 수 있고, 지금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그런 성향이 나타나고 있는 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좋게 말하면 한국의 남성들은 가정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여기서 우리 음악 한 곡 들으시겠는데요 슬기둥의 여행 들으시겠습니다.
* 슬기둥 - 여행

박인규 : 조금 전 말씀하시면서 중국와 일본 남성에 비해 한국 남성들은 자기가 필요한일이 있다면 그야 말로 가정도 내팽개칠 정도로 도전의식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그런 도전의식이 있더라도 그 분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거나 문제가 있을 때 도와주는, 영어로 페이트런이랄까 후견인 이런 게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 당시에 그런 분들이 있었나요?

안대회 : 네. 특히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그런 분들의 도움이 알게 모르게 중요한데요. 특히 최천약 같은 동래의 평민으로서 아무런 끈이 없는 사람이 출세하게 된 것도 영조의 도움을 받게 된 것도. 영조와 굉장히 친밀했던 한 종실이 뒤에서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최천약의 기술이 그렇게 좋다는 걸 알고 바로 영조한테 소개했고. 이단전도 주인이 공부하는 걸 보고 일을 면제시켜줘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줬고, 운심 같은 경우도 그렇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굉장히 그런 분들이 사실 적잖이 있었다.

이 중에 들어가진 않지만 홍세태라고 하는 천민이 이단전하고 거의 똑같은데, 천민으로 묶여서 아무 것도 못하니까 시를 잘 짓는 걸 알아서 동평군이라는 분이 그 분을 종에서 빼내는데 당시로선 대단한 거금인 100냥을 내고, 그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석주한테 당신도 100냥 내라 해서 200냥 가지고 신원을 시켜줬어요. 아무런 대가 바라지 않고 그렇게 해줬던 거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분들을 인정을 해서 그 분들 하는 일들의 의의를 자꾸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해주고 글로 남겨주고 하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다 후견인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해요.

박인규 : 조선의 프로페셔널들은 나름의 열정과 실력도 있었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뒤에서 도와주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마니아들, 프로들. 지금이라도 잘 크기 위해서는 지금 말씀하신 후견인, 국가적 사회적 지원이 필요할 것 같은데. 책을 보면 어떻게 보면 조선 최대의 개혁군주라고도 말하는 정조가 상당히 그런 역할을 잘 하셨다고 평가하셨어요.

안대회 : 역대 조선 왕에 비해서 정조의 탁월하다고 할 부분이 바로 그 점에 있지 않나. 최근에 홍길주라는 분이 김영라고 하는 인천 출신의 천민이었지만 아주 뛰어난 천문학자였던 김영이란 분의 전기를 썼는데 그 안에서 바로 그런 얘길 하고 있어요. 정조시대에는 뭐라도 하나 자그마한 재주를 갖고 있으면 임금이 다 들어서 썼다. 이것이 정조에 대해서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딱 떠오르는

박인규 : 예를 들면 유교경전이나 시문이 아니라 어느 부분에 기능이 있으면 대접을 해준다.

안대회 :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들어서 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서얼 출신이었던 이득무 유득공 박제가 이런 사람들을 검서관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학식이 뛰어나니까 책 교정 보는 거잖아요. 그런 직책이라도 와서 일을 하라고 해서 굉장히 대접을 해줘서 학자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김영이라는 분은 요즘으로 치면 국립천문대 직원으로 바로 임용했는데, 특채를 했는데 그건 그 당시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신분도 그렇고 과거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추천을 하니까 와서 봐라. 그런데 실력이 뛰어나거든요. 바로 임명했습니다. 천문대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들고 일어나니까, 이 사람한테만 이것을 적용한다. 만약 이 사람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관례를 앞으로도 영원히 못한다. 이 사람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이런 특채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놨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재능있는 사람을 들어서 쓰려고 하는 의지가 보이는 거죠. 그것이 많은 국민들한테 알게 모르게 정조임금 시절엔 그랬어, 라고 하는

박인규 : 실력이 있으면 대접받을 수 있고 대가가 있다.
저희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실학 하면 박지원, 박제가, 이 사람들이 쓴 책, 그런 것만 외우고 끝났는데. 쭉 두 시간 가까이 그 당시의 여러 분들 얘길 들으니까 그 당시의 살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오는 느낌이 들어요. 요즘 들어서 17, 18세기 조선 후기의 문화사라고 합니까? 아주 구체적인 생활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걸 하나의 추세라고 볼 수 있나요?

안대회 : 저는 그걸 추세라고 봐야 될 것 같아요. 그 동안에는 저희들이 학교에서 배울 때도 주로 정치나 경제. 거시담론 쪽으로, 민족문제, 큰 문제를 중심으로 다뤘는데. 사실 그것만이 역사의 중심이라고 보긴 어렵거든요. 역사를 사실 풍부하게 한 것은 그 안에 역동적인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 그런 것들이 요새 연구도 많이 되고 하다 보니 사람들한테 관심도 많이 되고. 그리고 저는 늘 그런 얘길 하는데 조선이 문헌대국입니다. 문헌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문헌 속에는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거든요. 그걸 읽어서 사람들한테 소개하는 책들이 현재 많이 나오고 있는데 앞으로는 상당한 기간 동안 그런 작업들이 많이 이뤄질 것으로 전 보고 있어요.

박인규 : 문헌대국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사람에게는 불행하게도 거의 모두가 한문 아닙니까?

안대회 : 그렇죠. 그러니까 한문 전공하는 분들이 번역도 하고, 그런 것들을 저서로 소개하는 것도 작업도 해야 되고 다방면으로 그런 작업들이 이뤄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일제 식민지 이래 우리들은 어떻게 보면 실패한 역사였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배울 게 없다, 안 돌보다가 최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우리들이 직접 예를 들면 박지원의 열하일기라든가, 번역이 돼서 나왔습니다만 관심들이 많은 것 같아요. 조선 후기의 그런 많은 기록들이 우리 글로 번역된 게 어느 정도일까요?

안대회 : 비교적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것들은 번역이 많이 됐다고 할 수 있지만, 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것들은 아직도 번역 안 된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금 지속적으로 되고는 있지만 속도가 느린 편이거든요.

박인규 : 조선시대의 문헌자료들을 100으로 친다면 지금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한글로 번역된 것들은 어느 정도 됩니까?

안대회 : 저는 한 5% 된다고 생각합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아직도 멀었군요.
최근에 또 내신 책이 '연경, 담배의 모든 것'이에요. 저는 연경이 제비 연자에 서울 경 해서 북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서요?

안대회 : 네. 연기 연자에 경서 경자 해서. 담배의 바이블.

박인규 : 담배의 성경. 저희는 담배는 기호식품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게 18세기 조선시대 삶과 관계가 많습니까?

안대회 : 저는 굉장히 많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담배는 아메리카가 원산지인데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하면서 전 세계에 퍼졌는데 인류 역사상 하나의 음식, 기호품이 한 지역에서 전 세계에 퍼져가는데 50년이 걸린 건 가장 빠른 건데 담배가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서 조선에 그것이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이후로 2,30년 사이에 전 국민이 다 피웠다라고 할 정도로 급속도로 보급됐고 또 모든 사람이 기호품으로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이 산업과 정치, 경제에 미친 영향력이 굉장히 큽니다.

박인규 : 사실 담배는 피워도 그만 안 피워도 그만, 기호식품인데, 제가 알기론 이게 환금작물이다. 돈이 되는 농작물이기 때문에 많다는 말이 있던데

안대회 : 그렇죠. 첫째, 이것이 일본에서 들어와서 재배를 해서, 사실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담배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하는 분도 있고 백과사전에 그렇게 기술도 돼 있지만 사실 그게 아닙니다. 조선에서 중국 북방 쪽으로 이것을 무역을 했어요. 그래서 상당한 이익을 남긴 중요한 작물이기도 하고

박인규 : 원래 우리가 중국에 판 거군요.

안대회 :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금지시켜라 하는 황제의 명령도 내려질 정도였고. 그 다음 국내에서도 사실 담배는 쌀이나 다른 곡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이익이 훨씬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 당시 경제가 활성화되는 데 일정 정도 영향을 끼친 작물이었고. 또 담배는 그 당시 풍속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끼친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지금은 금연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저도 그 방향이 옳다고 보고, 저도 담배를 피우고 있진 않습니다만 담배라는 작물이 갖고 있는 문화사적인 굉장히 큰 점은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박인규 : 말씀 듣고 보니까, 우리는 정치가 제일 중요한 줄 알았더니 더 중요한 게 많이 있었군요. 앞으로도 조선 후기,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길 부탁드리고요. 끝으로 혹시 앞으로의 계획이라든가 못다 하신 말씀 있으시면 마무리 부탁드립니다.

안대회 : 저는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 우리 선인들이 역동적으로 살아갔던 모습들을 주로 문헌자료, 문학적인 자료, 감성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연구하고 책으로 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리고요. 조선 후기를 제가 집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들과 서로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이 듭니다. 서양이나 동아시아 다른 여러 나라의 것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부분이 많지만 조선 후기 굉장히 단절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펼쳐놓고 보면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영양분을 우리 것 남의 것 주변 것 다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 부분을 청취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기도 하고 저도 그런 쪽으로 앞으로 많은 작업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박인규 : 많은 분들이 아직도 역사를 숫자와 사건의 나열이라고 생각하는데 안대회 교수님 책을 읽어보니까 진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재밌고 유익한 책들 많이 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안대회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어제에 이어 '조선의 프로페셔널'이란 책의 저자인..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와 함께..
200여 년 전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한 사람들의
삶과 열정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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