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기 위한 법률적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고 미 행정부 관리가 밝혀 주목된다.
이는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 남겨둬야 한다는 일본의 바람과와 배치되는 것으로 대북 '유화책'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북한을 압박하는 의미 또한 적지 않다.
겉으론 부드럽게
<연합뉴스>에 따르면, 미 국무부 대(對)테러담당 델 데일리 조정관은 22일 1970~80년대 이뤄진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 같지 않다면서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겉으로만 보자면 이 발언은 북한의 귀를 솔깃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미 국무부는 작년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 남기면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적시했다. 그에 따라 납치 문제가 테러지원국 잔류의 결정적인 이유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일본 역시 납치 문제 해결 전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빼서는 안 된다고 미국을 압박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삭제 조건을 충족했다'고 밝힌 것은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가 이행되기만 한다면 미국도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미국은 과거에도 '납치와 테러지원국은 무관하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러나 북한이 최근 테러지원국 삭제를 빈번히 촉구하는 상황에서 나온 이런 발언이 가진 의미는 적지 않다.
곤잘로 갈예고스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같은 날 "우리는 (테러지원국 제외를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속으론 책임 떠넘기기
그러나 데일리 조정관과 갈예고스 부대변인의 말에는 북한을 겨냥한 칼이 숨겨져 있다. '미국은 준비가 됐으니 북한이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우선 단행하라'는 촉구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진실게임에 빠져 있는 납치 문제를 제외하면, 북한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한 기준을 충족했다는 것은 사실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미국은 북한의 테러지원국 삭제 조건으로 △테러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표명 △최근 6개월간 테러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입증 △테러방지 국제협약 가입 △과거행위에 대한 필요한 조치 이행을 제시했다.
이에 북한은 2000년 이후 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고 실제적인 조치도 취해 왔다. 9.11 테러 사태 이후 반테러선언을 했고, 최근 6개월간 테러를 하지 않았으며, 2001년 유엔에서 테러자금 조달 억제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하는 등 반테러 국제협약 12개 가운데 7개 협약에 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테러지원국 해제의 조건을 충족시켰다는 말을 새삼 꺼내들고, 나아가 '해제 절차를 시작했다'는 부정확한 사실을 유포하는 미국의 속셈은 결국 합의 이행 지연의 책임을 북한에 돌리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미국은 약속을 이행했고 지금도 이행하고 있다. (테러지원국 삭제와 관련한) 미국의 조치는 북한이 비핵화 합의를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갈예고스 국무부 대변인의 말은 그런 속내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 합의 이행(불능화와 신고)은 테러지원국 해제 등 미국 및 6자회담 참가국들의 의무와 '행동 대 행동'으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북핵 10.3합의문에는 그 원칙을 "병렬적으로"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 불능화가 완료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테러지원국 삭제를 위한 의회 보고 절차를 개시하지 않고 있고, 6자회담 참가국들의 대북 중유 제공도 목표치의 20%만 달성되고 있다.
북한이 최근 불능화 '속도 조절'을 거론하는 것은 그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핵 신고를 지연시키는 것도 미국의 행동에 연동하겠다는 것으로 일방적인 합의 지연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22일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 등 의무사항을 이행해야 핵문제에서 진전이 있을 것이라면서 "미국의 강경정책에 우리는 언제나 초강경으로 대응해 왔다"고 강조,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또 다시 위기가 도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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