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7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캠프 관계자들은 출근길 유세가 예정돼 있던 여의도역이 아닌 영등포 당사 회의실로 모였다. 이 회의는 2시간 30여 분간 계속됐다. 회의가 끝난 직후 창조한국당 출입 기자들의 핸드폰에는 이날 잡혀 있던 문 후보의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공식 선거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에 모든 유세를 중단한 문 후보는 모처에서 기거하며 '단일화 구상'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후보가 먼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유세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루가 바쁜 선거기간 중이므로 문 후보에게 양허된 시간은 넉넉잡아 하루 정도다. 캠프 안팎에서는 문 후보가 이르면 오늘 오후, 늦어도 내일 오전 중에 후보 단일화와 관련한 '결단'을 내릴 것이란 관측이 높다.
"단일화 가능성 배제치 않는다"
문 후보 측 김갑수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캠프 참모진 사이에선 독자적으로 완주해 문국현 만의 가치를 구현해 낼 것이냐 아니면 수구부패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1차적으로 넘어야할 관문과 진검승부를 벌일 것이냐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김 대변인은 "독자 완주와 단일화를 두고 캠프 내 양론이 팽팽하다"며 독자 완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문 후보가 유세일정까지 중단하는 '파격'을 구사한 점 등을 미뤄볼 때 고민의 결론은 이미 '단일화 수락'에 기울어 있다는 것이 여권의 일반적 관측이다.
실제로 김 대변인은 "단일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며 "지분다툼으로 보일 수 있는 기계적 밀실 단일화는 하지 않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단일화는 수구부패세력의 집권을 저지할 수 있는 유력한 카드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또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에 대한 사퇴 요구를 공식 철회한다"고 밝혔다. 신당 측의 후보 단일화 요구에 "정 후보가 사퇴하고 백의종군하면 단일화는 저절로 이뤄진다"고 했던 '단일화 거부 입장'을 사실상 거둬들인 것이다.
다만, 김 대변인은 '단일화'가 곧장 문 후보의 '사퇴'로 연결되는데 대해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후보 사퇴는 없다"며 "문국현의 가치 깃발을 들고 끝까지 선거운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여권의 판으로 뛰어들어 능동적으로 판을 흔드는 선거운동을 할 것이냐의 고민만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지지율 정체·외곽 압박 등에 부담감 느낀 듯
이 같은 입장 변화에 대해 선대위 한 관계자는 "자신을 중심으로 단일화가 돼야 한다는 문 후보의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판을 깰 수도 없다는 고민도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문 후보 캠프 내에서는 정 후보나 신당 측에 대한 '경계심'이 적지 않다. 140석의 거대정당 후보와의 단일화는 사실상 '흡수'가 아니냐는 우려에서다.
정 후보가 2일 기자간담회에서 "6일에서 10일 사이를 보고 있다"며 후보 단일화 시한을 밝힌 것은 이 같은 '경계심'을 '반감'으로 격화시킨 듯하다. 문 후보 측의 결심이 서기도 전에 문 후보를 '단일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것이 불만의 골자다. 이날 오전 회의에서는 "단일화는 결국 정동영에게 (무릎) 꿇는 것 아니냐"는 격한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문 후보가 신당 측의 단일화 요구를 수락한다면, 이는 문 후보를 둘러싼 정치 환경의 악화에 '떠밀린' 결과로 여겨진다.
그간 문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선거공학이나 구태정치로 일축해 왔지만,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재야원로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자세를 '패배주의'라 비난했다. 다른 후보들에 비해 과거 정치에 대한 부채의식이 적은 편이라 하더라도 정치 외곽 세력의 전 방위 압박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었다.
문 후보 주변 인사는 최근 "총선에서 한 자리 하려는 욕심에 대선을 망치려 한다는 식의 얘기를 문 후보가 가장 듣기 힘들어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검찰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 의혹에 대해 결정적인 발표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들이 이어지면서 '뭉쳐야 한다'는 범여권 내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날 아침 자 몇 개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의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다. 10%를 넘지 못하고 꺼꾸러져 버린 지지율은 대선완주로 가는 발목을 잡았다. 문 후보는 출마당시부터 "11월이 되면" 혹은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면" 하는 식으로 지지율 급상승을 예측했지만 이는 번번이 빗나갔고 어긋난 예측은 오히려 후보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지적받기도 했다.
정치권 내 지지세도 '홀로서기'를 하기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문 후보 측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나 박원순 변호사 같은 상징성 있는 인물들의 '협력'을 기대했지만 박 변호사는 정치권에 발 담그기를 원치 않았고 강 전 장관은 "참여정부에 대한 책임의식"을 토로하며 이날 정동영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문 후보가 신당의 단일화 요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쪽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하더라도 정 후보를 상대로 '역전승'을 이뤄내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미 지난달 30일 유세 중 단일화 관련 질문을 받은 문 후보 스스로 "단일화는 (응하면 함께 죽는) 죽음의 키스 같다"며 그 위험성을 인정한 바 있다.
이에 여권 내에는 문 후보가 전격적인 후보 사퇴 등 '자기 희생적 결단'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