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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피해의식'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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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애인, '피해의식'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가져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1/08] 여성 장애인 작가 방귀희 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장애인문학잡지인 솟대문학 발행인이자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방귀희 작가가
최근 YWCA에서 주는 한국여성지도자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동안 방귀희 작가는 지체 1급 장애라는 신체적 한계를 넘어,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왔는데요. 남들보다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항상 내가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방귀희 작가를 초대해 이번 한국여성지도자상을 수상한 소감과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 계층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해온 그녀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방귀희 작가입니다. 방귀희 작가는 1957년 서울 출생으로 1981년 동국대학교 불교철학과를 수석 졸업했고 83년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 살 때 발병한 소아마비로 휠체어 생활을 하지만 1981년 방송작가로 입문해 KBS, EBS, BBS 등에서 프로그램을 집필하거나 방송을 진행하고 있고 1991년 우리 나라 유일의 장애인 문예지인 솟대문학을 창간해 지금까지 16년째 발행해 오고 있습니다. 1996년 장애인의 날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습니다.

박인규 : 11월 2일이었나요? 한국여성지도자상, 축하드리고요, 젊은지도자상이라고 하던데 좀 나이가 있으셔서

방귀희 : 지금부터 시작할 나이가 아닐까요? 너무 젊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를 지도해나가긴 좀 어렵죠.

박인규 : 하긴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으니까.
사회에 나오셔서 30년 가까이 활동해온 데 대한 사회적 인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느낌이?

방귀희 : 그렇죠. 특히 여성장애인 최초로 이 여성지도자상을 주신 것에 대해서 여성장애인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이 들고요. 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전 어렸을 때 이솝우화 가운데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그 중에서 저는 거북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남들은 뛰어다닐 때 저는 방바닥을 기어다녀야 됐거든요. 물론 지금은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그런데 그 우화에 보면 거북이가 승리하잖아요. 꾸준히 달리고 또 달려서.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거북이는 승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뛰는 토끼만이 승자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상을 받고 나서, 거북이도 승리할 수 있구나... 이것이 물론 마지막 승리라고 보진 않습니다만 일단 중간지점에서 인정은 받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박인규 : 느리지만 꾸준히 뭔가를 하다 보면 뭐가 이룰 수 있고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상금이 꽤 많던데요

방귀희 : 네, 1000만원 받았습니다.

박인규 : 어디에 쓰실 겁니까?

▲ ⓒ프레시안

방귀희 :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하지 않았지만 좋은 일, 의미있는 일에, 그리고 특히 이번에는 저를 위해서 좀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동안에는 열심히 벌어서 솟대문학 만드는 일에만 열심히 투자하다 보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어떤 때 정말 콜라 한 잔 사먹는 것도 먹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아끼고 살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저를 위해서 의미있는 일에 쓸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대학원에 진학을 다시 또 한 번 하려고 합니다.

박인규 : 박사과정을 하시려고

방귀희 : 박사과정 말고 사회복지를 다시 한 전 전공하려고 하는데 거기 등록금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사실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게 결국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방귀희 : 당연합니다.

박인규 : 그런 부분에서는 그런 게 필요할 것 같고요. 언론보도를 보니까 한 살 때 소아마비가 되셔서 제가 알기론 두 다리와 왼 판을 못 쓰고 오른팔만 쓰신다고 하는데

방귀희 : 오른팔도 한 50% 기능밖에 없습니다. 제가 손을 들어올린다거나 뻗친다거나 이런 걸 못하거든요. 겨우 글씨 쓰는 것이 지금 계속 저를 작가로 소개해 주셨는데, 작가의 좋은 기능은 두 다리도 튼튼해야 됩니다. 뛰어다니면서 취재를 해야 되니까. 그것도 저한텐 어려움이고, 그것도 요즘은 워드작업을 두 팔로 하지 않습니까? 두 손으로. 그래서 저는 한 손으로 치기 때문에 남들 한 시간 정도 걸릴 원고를 두세 시간 걸려야 되고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박인규 : 보통 멀쩡한 사람 보고 사지가 멀쩡한 사람, 이런 표현을 쓰는데 방귀희 작가는 일지만 쓰시는... 일지만 쓰면서 사지가 멀쩡한 사람하고 경쟁해서 여기까지 오시기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방귀희 : 저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약자라고 하면서 편견과 차별을 쏟아 붇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런 차별이 편견이 저한텐 힘이 됐어요. 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걸 뛰어넘어야지. 오히려 저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냐면 환경이 어려운 걸 탓하거든요. 하지만 환경이 어려운 것이 더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강한 에너지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저의 모든 단점이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는 강한 의지로 작용하기 때문에 더 저한테 힘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인규 :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까 강해지더라. 저희 프로그램 사실은 장애인 분들이 많이 나오셨어요. 서강대 장영희 교수도 나오셨고 실로암안과 하시는 김선태 목사님도 나오셨는데 쭉 말씀을 들어보면 특히 배움에서 대학 가기가 힘들었다. 방귀희 작가도 보니까 원래 의대를 가고 싶었는데 못 갔다고 들었어요. 대학 갈 때 어려웠습니까?

방귀희 : 지금은 장애인특례입학 제도 같은 게 생겨서 장애인한테도 대학입학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오히려 더 기회를 주고 있지만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가 1976년이었거든요. 그때만 해도 장애인은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지금 생각하면 우스우면서도 마음이 아픈 게 직립보행이 가능해야 됩니다.

박인규 : 직립보행을 안 하면 인간이 아니란 얘긴가요

방귀희 :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에 그렇게 써있었어요. 직립보행이 가능한 사람... 그러니까 전 직립보행이 안 되기 때문에 대학을 가기가 어려워서 내가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받아주는 걸 찾다 보니까 제가 동국대하교 불교학과를 입학하게 됐는데요, 그때 당시 어머니께서는 저를 한의사로 만들고 싶어하셨어요. 왜냐면 그래야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는 그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지금처럼 요즘 아이들처럼 내가 뭘 하고 싶고 원한다, 이런 것보다도 굉장히 순종적이고. 그리고 특히 장애가 심했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일이라든지 모든 일들이 다 어머니 손에 의해서 이뤄졌어요. 그래서 전 그 당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쟤 공부 못하는데 뭐하러 학교 보내 하는 소리 들을까봐 시험공부 하고. 어머니가 항상 하시는 게, 그래도 초등학교는 보내야지. 그리고 나서는 중학교는 가야지. 그래도 영어라도 읽지. 저는 중학교까지밖에 안 다니는 걸로 돼 있었습니다 집안에서는. 그런데 원래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니까 그럼 고등학교 보내야지, 또 고등학교에서 잘 하니까 대학교 보내야지, 그렇게 됐던 거거든요.

박인규 : 말하자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대학까지 길을 뚫으신 거군요.

방귀희 : 네, 집에서조차도 그런 차별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과 싸워 이기려면 실력을 갖추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박인규 : 모두에 말씀하시면서 한국여성지도자상이 여성장애인으로는 처음 받는 거란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씀은 같은 장애인이지만 여성장애인들이 더 상황이 열악하달까? 어떤 측면에서 그렇습니까?

방귀희 : 이런 애기가 있습니다. 여성장애인은 여성이라는 것과 장애인이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 있다고 표현을 하면서 여성 플러스 장애인이 아니라 여성 곱하기 장애다, 그 힘이 배로 힘들다는 얘깁니다. 모든 기회에서 차단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가 요즘은 여성우대가 돼서 여성이라서 차별받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예전만 하더라도 여잔데 이쯤에서 학교도 그만 다녀도 되지, 여성인데 굳이 그렇게 좋은 직장을 다닐 필요가 있나 하면서 모든 기회가 차단이 됐었거든요. 그런 점에 있어서 여성장애인들은 정말 그런 기회를 얻기가 상당이 어렵습니다. 인간적인 삶을 살 기회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학업, 취업, 결혼 문제 같은 데도 그렇죠. 제가 지금 57년생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니까 굳이 제 나이를 한국나이로 얘기하면 51살인데 한 번도 너 결혼해야 되지 않니? 이런 소리를 집안에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시집간다고 할까봐 겁먹을 정도였거든요. 여성장애인은 시집가선 안 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우리 언니들이 두 명 있었는데 언니 두 명한테는 계속 선볼 자리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도 막내딸은 이런 게 없어요. 그게 바로 좀 사례를 들라고 하시니까 제가 솔직히 말씀드린 겁니다.

박인규 : 실례의 말씀이지만 아직 결혼을 안 하시고

방귀희 : 네, 못했습니다.

박인규 : 어쨌거나 그래도 여성장애인으로서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받으셨으니까 여성장애인들의 어떤 롤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은 드네요

방귀희 :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질문해야 될 것 같은데 불교철학과를 나오시다가 KBS제3라디오의 내일은 푸른하늘, 이게 아마 제가 듣기론 국내 최장수 방송이라고 들었는데, 26년. 거기 작가가 되셨어요. 어떻게 되신 거예요?

▲ ⓒ프레시안

방귀희 :
제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가 81년도였습니다. 81년도가 유엔에서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였어요. 그래서 그때처음으로 언론에서 장애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저는 언론에서, 저는 TV에서 장애인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랬는데 그 당시 좋은 모델이죠. 왜냐면 장애인의 해에 장애인이 수석으로 졸업했으니까. 그랬는데 휠체어를 타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제가 1호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받아주질 않았습니까. 그런데 게다가 수석이잖아요. 여기저기에서 초대를 받았었어요 방송에서. 제가 방송에 초대를 받으면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보취급 받는 거거든요. 왜냐면 장애인은 좀 부족하다,

박인규 : 보살핌의 대상이고

방귀희 : 예.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 나가서든간에 말을 열심히 똑부러지게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게 어머니의 가르침이었어요. 예를 들어서 야 귀희야 하면 그냥 쳐다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안 쳐다보면 사람들이 '쟤는 말귀도 못 알아듣나?' 그럴까봐 '네 저 여깄어요' 얼른 따라가질 못하니까, '네' 하고 뛰어가질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금방금방. 그러니까 방송은 참 그게 좋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나와서 얘기도 하고 웃고 하니까 그럼 이제 우리가 4월이 장애인의 달이고 장애인의 날인데 20일이거든요. 내일은 푸른하늘이라고 하는 장애인 대상 프로를 만드는데 고정연사로 한 번 나와달라.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박인규 : 그 프로그램이 그때 만들어진 거군요.

방귀희 : 네 만들어졌습니다. 4월 13일에.

박인규 : 만들어지는 날 게스트로 나갔는데

방귀희 : 그 전부터 방송에 출연은 했는데, 2월에 졸업하고부터 방송은 했는데

박인규 : 그 프로그램에

방귀희 : 아니요. 그때는 그 프로그램이 없었죠. 일반 프로그램에 출연을 했는데 4월 13일에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기니까 고정연사를 해달라, 그래서 참여하게 된 거죠.

박인규 : 방송작가가 되신 건 언제죠?

방귀희 : 그러면서 제가 꼭지원고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좋은 프로그램의 한 시간 다 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방귀희 칼럼이라고 하는 3분짜리 글을 쓰다가 그 다음 꼭지원고를 쓰다가 방송작가협회에 가입하고 완전하게 방송작가로서 입문한 건 1987년이었습니다.

박인규 : 딱 26년 되셨네요. 26년 동안 계속 내일은 푸른하늘의 대본을 써오신 거군요

방귀희 : 네.

박인규 : 대단하십니다.

방귀희 : 고맙습니다.

박인규 : KBS에서 감사패 같은 거 안 줬나요?

방귀희 : 주셨습니다. 25년 되는 날 감사패도 주시고 그 전에도 또 방송작가협회에서 수상하는 방송작가대상도 받았고 상 많이 받았습니다.

박인규 : 결과적으로 26년째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프로그램이 되고 있지만 중간에 없어질 뻔한 위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방귀희 : 많았죠. 왜냐면 사실 방송이라는 것이 장수프로그램이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인기가 너무 대단해서 광고가 막 붙을 정도의 프로그램이어야 장수프로그램이 되는데, 이것은 장수프로그램이 될 만한 조건은 없었지만 필요성은 있었어요. 왜냐면 장애인들이 그 유일한 창구였거든요. 장애인에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내일은 푸른하늘 밖에 없는데 그 푸른하늘을 없애면 안 되잖아요.

박인규 : 내일은 푸른하늘, 주로 어떤 내용들을 방송하세요?

방귀희 : 장애인에 관련된 정보입니다. 저희는 정보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고 또 하나는 장애인의 모델케이스, 장애를 딛고 일어선, 그래서 아 그렇구나 저분들도 저렇게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니까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거죠.

박인규 : 제가 정확하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레 KBS 3라디오가 장애인 전문방송인데 이게 생긴 게 사실 내일은 푸른하늘이 모태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방귀희 : 네. 내일은 푸른하늘이 거진 한 20년 정도 됐을 때, 2000년 1월 1일에 KBS 3라디오가 개국했죠.

박인규 : 장애인 전문방송이 생긴 지가 얼마 안 됐네요.

방귀희 : 그렇습니다. 1996년 사랑의 소리방송이라고 해서 SCA방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특별한 수신기가 있어야만 듣는 방송이기 때문에 공중파로는 3라디오인데 사실 3라디오로 AM이기 때문에 전국네트워크도 안 되거니와 굉장히 잡음이 많습니다. 수신이 참 어려운 상태여서 이걸 어떻게든지 빨리 FM화시켜서 산골, 농촌에 있는 장애인들은 찾아가기도 어렵고 재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사실 어렵거든요. 그 분들한테 또다른 정보를 드리는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제가 듣기로 장애인이 보통 인구의 10%라고 하던데 10%가 장애인이면 그 분들을 위해서
FM라디오방송 정도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방귀희 : 예.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박인규 : 방송작가를 하시다가 문학잡지 발행인도 하세요. 솟대문학, 솟대라는 게 마들 들어가면 있는 새모양 그거죠? 어떻게 문학잡지를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방귀희 : 그것도 역시 방송과 관련이 있는데요 저는 그냥 내가 방송작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일반 장애민중과 방송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청취자들과 아주 친합니다. 행사가 있다거나 무슨 개인적으로 자기 대소사가 있을 때 다 찾아가거든요. 그러다 보니 청취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근데 장애가 너무 심한 분들, 그래도 저는 앉아있을 수도 있고 말할 수 있지만 언어장애가 있거나 앉을 수 없어서 엎드려 누워서 입에 타자봉을 물고 워드를 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컴퓨터가 없을 때는 입에다가 연필을 물고 글씨를 썼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쓴 작품을 발표할 데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자기는 뭔가를 씁니다 읽어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 집에서도 너는 뭐 때문에, 그렇게 한답시고 끄적거리냐, 이렇게만 하지 우리 아인은 시인이야, 우리 사람은 소설가야, 이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단 말이죠. 발표를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발표할 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처음엔 동인지 형식으로 시작하려다가 그래도 문예지 형식으로 시작해야 책임감이 있을 것 같아서 문예지를 만들기 시작했죠.

박인규 : 그럼 기고, 투고를 해오시는 분들이 많습니까? 보통 어느 정도나 오세요?

방귀희 : 많습니다. 지금 저희는 회원을 1000명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정말 잘 쓰시는 분, 이 정도면 외부에 나가서 손색없다 하실 분들이 한 200분 정도 되십니다.

박인규 : 그런데 책 내는 건 좋지만 결국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팔리기도 해야 되는데 판매가 돕니까?

방귀희 : 판매는 거의 없다고 봐야 되고요. 대형서점에 내보내고 있는데 서점에 내보내도 한두 권 팔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수익성으로는 전혀 없죠.

박인규 : 장애인들끼리 주로 보시니까.
계간지죠? 몇 부나 만드세요?

방귀희 : 지금 2000부 찍고 있습니다.

박인규 : 쉽지 않은데. 그럼 십 몇 년 동안 해오시면 재정적인 문제도 간단치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 ⓒ프레시안

방귀희 :
처음에 제가 방송을 내일은 푸른하늘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타방송도 하니까 하나의 프로그램에서 버는 건 솟대문학에 투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것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너무 힘들고. 그래서 광고, 협찬광고를 받기도 하는데 초창기 때는 협찬광고가 그런대로 됐는데 요즘은 기업마다 사회공헌사업이라고 해서 자기네 자체내에서 사회에 기여를 하기 때문에 협찬광고도 받기 어렵고. 그런데 다행히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구상 선생님께서 아주 저희를 끔찍이 사랑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 분께서 후원자도 많이 연결시켜 주셨고, 또 하다 보니까 외식산업을 하는 위진권 사장님이라고 계십니다. 그 분이 10년째 후원을 해주시고 계시죠.

박인규 : 알게 모르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으시군요.
말하자면 1981년부터 26년 동안 장애인과 함께, 또 장애인들을 위해서 생활해오신 건데, 26년. 본인의 생으로 따지면 50년 지나면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을 보는 태도랄지,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까?

방귀희 : 좋아지긴 했죠. 예전에 제가 거리에 나가면 걸음을 멈추시고 저를 쳐다봤거든요. 어머, 장애인도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요즘은 그렇진 않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가슴아프게 하는 것은 저는 아이들의 변화에서 느낍니다. 장애인 인식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엄마 저 아줌마는 왜 못 걸어? 저 아줌마는 왜 저런 거 탔어? 이렇게 물어봐요 애들이. 그러면 어떤엄마는 막 아이들 입을 틀어막아요. 얘기 못하게. 그것도 어떤 엄마들은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돼, 이렇게 얘기하는 엄마도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저를 보면 손가락을 딱 세우면서 '아, 장애인이다' 이래요. 그래서

박인규 : 말하자면 교육을 했다는 얘기네요.

방귀희 : 예. 교육을 했어요. 아, 휠체어를 타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그런데 전 그게 더 마음이 아파요. 왜냐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전엔 장애인이라고 하는 용어는 몰랐지만 이상하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장애인교육이 굉장히 잘못되고 있다

박인규 : 조금 덜 됐군요. 우리 모두가 잠재적 장애인이라고 하는데

방귀희 : 좀 평범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면 장애인에 대해서 아 나도 예비장애인이고 장애인이라서 틀릴 게 있나, 아주 우호적으로 생각하시거든요. 그런데 막상 자기네 동네에 장애인시설이 들어온다고 하면 결사반대합니다.

박인규 : 이른바 혐오시설이라고

방귀희 : 그리고 더군다나 자기 아이가 만약 장애인과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결사, 그건 더욱더 반대하시죠.

박인규 : 말하자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머리까지는 왔는데 가슴까지는 안 왔군요.

방귀희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하기엔 아직 멀게 느껴지시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장애인식바로잡기연구소라는 걸 만드셨는데 이게 바로 그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방귀희 : 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2004년에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솟대문학은 장애인 문예지로서 열심히 책만 만들면 되겠지만 인식개선사업은 연구소를 통해서 하려고 합니다.

박인규 : 머리로는 장애인과 우리가 똑같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자기가 닥치면... 아, 고치기가 쉽지 않군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이 내년 4월에 시행되는데, 이게 시행되는 게 일면 반갑긴 하겠습니다만 이런 법률개정이 장애인들의 처우랄지 이런 걸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방귀희 : 도움은 되겠죠. 그런데 뭐가 걱정되냐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이라고 줄여서 얘기하는데 그 법이 생겨서 발효가 되기 시작하면 오히려 장애인과 비장애인, 우리는 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표현하는데 비장애인과의 사이가 더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박인규 : 왜 그렇죠?

방귀희 : 왜냐하면, 괜히 가까이 했다가 차별이라고 해서 괜히 벌금 물게 될까봐

박인규 : 불이익을 당한다

방귀희 : 아예, 요즘은 그래도 선의를 갖고 인식면에서는 좀 거칠지만 아직 세련되진 못했지만 장애인을 도우려는, 장애인에게 잘해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자기는 잘해주려고 접근했는데 저쪽에서 차별이라고 자기를 고발한다거나. 이렇게 되면 벌금 3000만원을 물게 되거든요. 그렇게 되기 때문에 아예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가 더 멀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박인규 : 차별금지를 법률로 강제한다는 게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방귀희 : 장애인 입장에선 좋은데 비장애인 입장에선 그것이 너무나 장애인에 대해서 멀게 느껴지게 하는, 귀찮은 존재로. 왜냐면 벌금을 물게 되니까 말이죠. 그렇게 되는 역작용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런 역작용을 없애기 위해서는 방송을 비롯해서 전국민적으로 홍보활동을 해야 되고 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말 부작용이 더 많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내년 4월이 되기 전에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인규 : 시간이 충분치는 않습니다만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가장 중요한 골자랄까 정신은 어떤 겁니까?

방귀희 :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겁니다.

박인규 : 취업이라든가 교육이라든가

방귀희 : 네. 모든 면에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예전엔 그걸 차별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습니다. 내가 언제 차별했다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하면 아닌 거거든요. 근데 이제 본인 입장에서, 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 그것이 굳이 차별이라고 인정된다면 우리가 법의 재판을 받게 되는 건데

박인규 : 예를 들면 사원모집하면서 용모단정, 키 160이상,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방귀희 : 네. 장애인과 관련해서 차별을 했다면 법의 제재를 받게 되는 거죠.

박인규 : 대통령선거가 한 40일 밖에 안 남았는데 물론 장애인도 유권자시기 때문에

방귀희 : 어휴, 장애인 유권자 굉장합니다. 저는 그걸 아주 강조하고 싶어요.

박인규 : 대선후보들이 많이 찾아다니고 하는데 차제에 대선후보들이 좀 말씀만으로 말고 실제로 이런 걸 해줬으면 좋겠다, 어떤 게 있을까요?

방귀희 : 대선후보들이 지금 찾아다니면서 뭐 휠체어도 밀어주고 장애인 만나면 등도 두들겨주고 하는 장면을 언론에서 보게 됩니다만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뭘 해주겠다. 연금제도를 마련해 주겠다면서 나랏돈이 어느 정도가 되고 재정은 어느 정도 마련하겠다는 복안도 없이 얘길 해주는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게끔 정말 복권을 판매하는 독점권만 장애인한데 준다고 해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직업재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외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렇게 장애인 직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독점권을 인정해주고 있거든요. 스페인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장애인이 먹고 살 수 있게끔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 줘야지 장밋빛 공약으로서 환심을 사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시혜보다는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줘라.
여성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많은 여성장애인들한테 힙이 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여성장애인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방귀희 : 사실 저도 그렇지만 피해의식을 갖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장애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면 장애 때문에 이렇구나, 그러면 이 점을 바로 고쳐야지. 이렇게 생각해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권리행사를 해야 됩니다. 왜냐면 우리도 인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하다 보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린 간혹 가다가 지레짐작 저 사람이 나 장애 때문에 싫어할 거야,하고 접근을 안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무조건 접근하셔야 됩니다. 장애 때문에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고 기회가 없는 거지, 그래서 무조건 접근하는 거. 그래서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나의 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바꾸는 길이고 사회를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이번에 받으신 상 이름이 젊은지도자상이에요. 젊으시니까, 앞으로 한 30년에서 50년 동안 장애인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방귀희 : 네,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한국여성지도자상을 수상한 방귀희 작가를 초대해 장애인을과 함께해온 그녀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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