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한국큐레이터협회 박래경 회장입니다. 박래경 회장은 1935년 대구 출생으로 195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뮌헨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수학했습니다. 세종대확의 전신인 수도여자 사범대 조교수와 부교수로 재직했고 1986년부터 국립현대 미술관 학예관과 학예실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한국문화교류 연구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 8월 출범한 한국 큐레이터협회 신임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인규 : 우선 큐레이터협회 출범을 축하드립니다.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큐레이터협회 출범 전에 유명 큐레이터였던 신정아씨 사건이 나서 여러 가지로 마음도 무거우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박래경 : 네. 시간이라는 게 중요한데 출범 전에 준비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6월 30일에 젊은이들이 뜻이 있어서 큐레이터협회의 창립 필요성에 대한 의견들을 모은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저에게 연락이 와서, 그런 좋은 일이라면 우리가 없는 힘이라도 빌어서 한 번 해보자는 얘기를 6월 30일에 모아서, 한 10명 가까이 모여서 얘기가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얘기가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우린 준비하는 과정에 들어가 있는데 그 신정아씨 사건이 터지더군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게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것 같은데 이 일은 전혀 다른, 아까 말씀처럼 한국의 큐레이터협회라는 하나의 공적인 틀을 만들어서 이제 큐레이터라는 하나의 전문직종이 사람도 많아지고 미술관도 많아지고 또 미술관 이외에 큐레이터로서 활동해야 할 분야도 확대되고 하니까, 차제에 의식과 더불어 사회인식을 높이기 위해서. 그래서 그 전문성을 더 높여 우리 한국 큐레이터들의 국제적인 활동에 좀 더 많은 좋은 모습들을 보이기 위한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동감을 하고 공감한 겁니다.
박인규 : 큐레이터의 숫자와 역할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조직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차원이지 신정아씨와는 시간적으로 일치했을 뿐이다.
박래경 : 네. 아까 말씀 끝에 신정아씨 사건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그런 개인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큐레이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넓어졌다 하는 것은 참 사회의 인식이 넓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홍수 속에서 좋은 재목 하나를 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인식이 넓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는 자체가 앞으로 큐레이터협회에도 참 긍정적으로 도움이 되리라 하는 얘깁니다.
박인규 : 큐레이터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대략은 미술작품이나 예술작품들을 전시, 기획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큐레이터가 하시는 일이 어떤 겁니까?
박래경 : 큐레이터는 영어권이고, 특히 영미권의 얘기지만, 특히 처음에 역사적으로 키퍼라는 영단어가 있고. 지킴이. 유물 또는 귀한 보물을 지킨다는, 지키고 관리한다. 뭐 기록도 되겠죠. 그런 일. 그것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유럽에 주로 그런 개념들을 가지고 성직자들이 모아 놓은 것을 지키고 관리, 기록하면서 일해왔던 역사가 있습니다만, 오늘날 와서 우리나라가 학예원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잡고 학예사나 학예관이라든가, 직제상으로 나누고 있는데. 말하자면 큐레이터로 등시해도 되겠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관계되는 일이 역사적으로 어떤 뮤지엄이다, 미술관이다 특히 그런 과정들이 역사적인 사물이기 때문에 큐레이터라는 말 자체, 내용적으로 내포되는 의미도 좀 달라지게 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학예원협회가 아니고 큐레이터협회라는 것은 다른 나라도 공통적으로 큐레이터라는 말을 쓰게 되고 그 통일성을 가지고 또 호환성 있게 그런 일을 연결 짓기 위해서 한국 큐레이터협회, 이렇게 돼 있습니다.
박인규 : 큐레이터라는 일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오래 전부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있어왔는데 협회가 지금 생겼다는 건 상당히 늦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박래경 : 말씀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을 두고 보더라도 1969년 시작해서 86년 과천에 재개관이라는 하나의
박인규 :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말씀하시는 거죠?
박래경 : 그렇죠. 자기 집, 건물을 처음 가지면서 재개관이라는 뜻은 기본적으로 전문직인 학예직이라는 직제가 들어가 있는 조직체를 가지고 미술관이 출범한다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술관의 출범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큐레이터, 다시 말하면 직제로서의 학예연구직이라는, 그래서 학예원구원,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 연구실장, 이렇게 나눠서 부르죠.
박인규 : 박래경 회장님 같은 경우는 80년대에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생기면서 학예관을 하시고 말하자면 그래서 1세대 큐레이터라는 말씀을 듣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박래경 :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86년 9월에 네 가지의 개관기념 전시회를 열면서 남녀 여러 젊은이들이 10여 명이 그 일을 도우면서 학예원으로 결정되는 과정이 있었고, 저는 그 9월 이후 11월에 학예관으로 거기 들어가게 됐습니다.
박인규 : 모두에 말씀드렸지만, 신정아 사건과 관련은 없다고 하시는데 어쨌든 신정아씨 사건이 두드러졌고, 말씀하신 중에서도 큐레이터에 대한 관심들이 많다고 하셨는데, 굉장히 유명 큐레이터로 이름을 날렸지만 결국 학위를 위조한 게 드러났죠.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같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래경 : 조금 다른 시각에서 말씀드릴게요. 우리나라가 근·현대사회 자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죠. 거기에 여러 가지 문제점도 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놀라운 발전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가령 이런 학예직이라는, 큐레이터라는 문제를 두고 봤을 때 이것은 점진적인, 과거의 유럽 위주로 본다면 사회의 점진적인... 물론 그때도 혁명이 있고 국왕을 죽여가면서 어떤 새로운 시민사회를 형성시키는 과정이 있었고 이런 게 역사적으로 있지만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나가서, 주로 뮤지엄이라는 게 미술품 위주의 소장품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성격을 띠게 되죠. 그래서 그러한 토대를 가지고 거기서부터 시대에 따라서 변화, 발전한 한 마디로 미술관 선진국하고, 우리의 이런 놀라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현대까지 이어지는 발전을 보여주는 나라하고의 미술관의 소장품. 그것의 지킴이, 관리, 기록해서 이것을 전시 기획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는 문제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물리적인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오는 무리한... 일은 빨리 하고 싶고, 능력있고 하고 싶은 욕망이 있으면 빨리 할 수 있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여기에 따르는 시간적 물리적인 소요의 과정이라는 것은 굉장히 많이 필요하니까 안 맞아 떨어지죠.
박인규 : 개인 또는 기업이 운영하는 사설 미술관에서 큐레이터와 주인과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다. 큐레이터의 전문성을 인정해주기보다는 오너의 전횡이랄까,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나, 그런 지적도 있는데요.
박래경 : 네. 어쨌든간에 우리나라 미술관이. 국공립이 됐든 사립이 됐든 자꾸 설립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고. 또 그만큼 부정적인 측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또 오히려 우리가 긍정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길러나가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보고 싶고. 또 하나는 미술관을 만드는 분도 기대와 욕구가 있을 것이고, 이것을 일을 전문적으로 맡길 수 있는 소위 학예직에 해당되는 큐레이터도 일을 잘해 주길 원하죠. 대개 공부하고 오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든가, 또 그 큐레이터 공부라는 건 지식이나 경험은 계속 쌓아가야 되는 것이고, 또 사회 자체가 발전하면서 계속 이것이 변화하게 되는 거니까 이걸 따라가려면 보통 노력 가지고 안 되거든요. 그런 노력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큐레이터 쪽에서도 좀 미비한 점을 갖고 들어가게 되죠. 그러니까 양쪽 다 서로 보완할 수 있으면서도 어떤 문제는 오히려 예리하게,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는 겁니다. 어느 정도, 이런 점도 빨리 소진돼서 정상적인 관계로, 제대로 된 큐레이터의 역할, 활동을 하면서 제대로 된... 개인이면 개인, 국공립이면 국공립의 미술관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큐레이터가 건강해지도록 사회상의 노력을 해야겠지요.
박인규 : 국공립 미술관의 경우에는 큐레이터, 학예사보다는 오히려 다른, 그 외의 행정직 인력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전문성을 담보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지적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박래경 : 네. 그게 왜냐 하면 처음에 대개 우리가 하드웨어부터 먼저 만들지 않습니까? 할 때에 외형적인 어떤 공간이나 기구를 만드는데, 그것 자체를... 행정직이라도 좋습니다. 이 만들거나 만들려고 하는 것에 대한 그 일의 성격을, 또는 내용을 확실히 알고 행정직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좋은 일인데 그렇게까지 되지 않고 다른 행정과 같은 행정으로 보고, 미술관 특수한 성격의 기관을 그런 행정으로 바로 연결지으면 행정은 될지 모르지만 미술관으로서의 행정이라는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오는 큐레이터라는 전문직과의 소위 일, 협동해야 될 때에 조금 잡음이 생긴다든가, 심지어 어떤 갈등으로 뿔뿔이 일이 이상하게 된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고 과거에도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저는 하나의 의문이 갑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문화인이나 정치인이나 국회의원, 많은 사람들이 외국을 가고 전문적인 기관이나 기구, 제도를 연구하고 온다고 돼 있는데 실제적으로 그 결과가 성과로 나타나야 되거든요. 이런 것은 축적이 돼야 한다는 얘깁니다. 아까 제가 기포 얘길 했습니다만 깨뜨린다는 건 큐레이터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힘든 거예요. 시간과 돈과 노력과. 그 개인은 생명 못지않게 중요하게 자기 직업을 생각할 정도로 큐레이터가 그런 의식을 가져야 되고 또 그렇게 갖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박인규 : 말씀 듣고 보니까 우리나라 큐레이터의 전문성도 높이고 큐레이터의 숫자도 늘리고 큐레이터 사회적 위상도 높이고, 굉장히 하실 일이 많을 것 같은데...큐레이터협회의 신임회장으로서 앞으로 주로 어떤 활동에 역점을 두실 계획입니까?
박래경 : 우리가 복잡하다, 어렵다, 할 수 없다... 로 끝날 일이 아니고 아까 말씀처럼 사회의 전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좋은 내용을, 특히 예술작품을 통해서 인격도야나 인격형성을 위해서 학교에서는 주로 문자교육을 통해서 뭘 가르치고 하지만 아까 말씀처럼 보는 것을 배우고 보는 것을 통해 사람을 길러가는 이 역할을 미술관은 해야 되고, 오늘날 특히 그런 것이 더 요청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문화적으로 보면 굉장히 빨리 돌아가면서 편리해지면서 어떻게 보면 화사하면서 빨리 지나가는, 관광... 여러 가지 자연이나 인위적인 문화의 흔적으로, 유적으로 많은 좋은 것을 보고 다닙니다. 그런 식으로 이런 미술품을 볼 수 있는. 그래서 관람객들이 보면 길어 봤자 1분도 어렵다는 얘기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나라뿐 아니고 그런 관광의 차원에서 미술관도 재밌으면 많이 보고 없으면 착착 지나가고 이런 관람행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걸 나무랄 수가 없어요. 그네들의 눈을 붙잡을 수 있는 어떤 작품을 어떻게 소개하고 전시하고, 공중들,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고 오래 그것을 보게 해서 개인에게도 좋고 미술관의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건 큐레이터의 실력에 달려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아무래도 큐레이터협회의 1차적인 일이랄까요? 그건 우리나라 큐레이터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집중해야 되겠네요.
박래경 : 네. 한 마디로 실력을 어느 정도 쌓고 경험을 쌓은 사람들을 일단 정회원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하나의 모범을 보인다고 할까요? 개개인으로 그게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일단 모범을 보이는 그 차원에서 우리가 큐레이터라는 것을 하나하나, 여러 명이 있는 과제나 문제를 해결해나가자. 그래서 첫째는 전문인으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그 전문인으로서 가지는 지식이나 경험을 서로 나누는. 이 하나의 연결과정을 통해서 자기네들의 직업에 대한 많은 바람과 기대와 해야 할 일들을 우리가 어떤 세미나 형식으로라든가, 아니면 정책연구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연관 기관에 좋은 의견도 개진하고 제출한다든가, 그런 식으로 해서 그야말로 공익적으로, 공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요즘 모두 자기 개인의 일에 바쁘고 개인의 이익에 참 집중하기도 바쁘고, 또 그런 쪽에 많이 가 있는데 반대로 처음에 아트뮤지엄이라는, 그게 생긴 역사적인 유래도 그런 쪽, 공공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 착근하고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이것이 꽃필 수 있는 과정에서 어느새 공공성이라는 게 빠지게 되니까 아까 말씀처럼 개인의 미술관에서 오너와 큐레이터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도 사실은 공공성을 가지고 일한다면 그런 갈등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새 급하게 발전하다 보니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공공적인 이익을 위한, 공공성을 목적으로 협회도 그렇게 일해야 되겠고 개개인의 큐레이터들도 그런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자기 일을 좀 더 열심히 하자 하는, 같은 목표를
박인규 : 요즘 큐레이터를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는데 큐레이터협회가 제대로 된 큐레이터를 만들어가는 데 길잡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회장님 개인이력을 보니까 흥미있는 부분도 있는데 역사학을 하셨다가 유학가셔서는 미술사학을 하셨고, 교수를 하시다가 큐레이터가 되셨어요. 상당히 늦은 나이에 되셨는데 굉장히 큐레이터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던 모양이죠?
박래경 : 외형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처세를 하는데 아주 깨끗하게 잘 정리하는 분도 계시고, 저는 저대로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 이 나이, 이런 기회에 한 번 되돌아 볼 수가 있습니다만, 어릴 때에 우리 선친께서 손을 붙잡고 지금 생각하면 전시장 같아요. 서울의 어느 전시장을 갔는데 커다란 옷을 입은 입상 앞에 서서 설명을 하시더라고. 그게 기억에 지금도 남아 있어요. 그럴 때가 있었는데 진작 학교 다니면서 그림 공부, 그림 하고 싶다. 이 그림에 참 취미를 가지고 했었는데, 아, 대학교에 그림 공부하러 가려니까 선친이 반대하시더라고요. 지금도 그걸 제가 이해를 못해요.
박인규 : 그 당시면 밥 굶는다 그런 거겠지요...
박래경 : 제가 혼자 못한다면 남이 해놓은 작품에 대해서 관계 짓는 일을 하겠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겪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서 보고 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미술관의 작품을 많이 보러 다니고 그런 좋은 작품을 우리나라에도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좋은 문화적인 자산을 외국에 소개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나 당장은 학교에 배운 내용을 젊은이들에게 일단 전하는 일로 교수직을 택하게 됐고, 13년 동안 교수직으로 있다 나왔어요.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이 새로 선다고 해서 김세중 당시 관장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런 게 있나보다 그때 제가 운영위원으로 참석했고. 그렇게 지냈는데 아까 말씀처럼 86년 김세중 관장님이 돌아가시고 11월에 연락이 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학예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박인규 : 최근 들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미술이나 문화에 대한 관심들도 많아지고 대중들의 거기에 대한 욕구도 많고. 또 젊은이들이 큐레이터를 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은데, 예를 들면 신정아 사건도 그 중 하나의 예긴 합니다만 그런 대중, 일반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와, 미술관이 됐건 큐레이터가 됐던 그걸 충족시켜주긴 하는데 불균형이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지적들도 있는 것 같은데요.
박래경 : 이번 사건을 통해서 대중들의 관심이 그만큼 미술 자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거기에 관계되는 일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도 크다는 것. 한 마디로 기대가 크다는 것. 그걸 아주 확인한 셈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오히려 많이 할 수 있는데 그 사건 자체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걸 한꺼번에 보여줬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좋은 교훈이 될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처럼 우리가, 젊은이들이 많이 그런 걸 희망한다면 저로선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공부할 때는 아주 고생을 각오하고 끝까지 많이 공부할 예상을 하고 시작해라. 그러나 일단 기회가 오면 한없이 풀어라. 그건 다름 아닌 너의 실력이다. 그거 한 가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 하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외국에서 많은 좋은 작품들이 지금 들어오고 오히려 일반인들이 많은 관람수를 채워가면서 정말 좋아하는데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건 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오는 작품 중에서 정말 주요한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아직 안 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자.
박인규 : 그런 큐레이터의 안목과도 관련이 되는 겁니까?
박래경 : 큐레이터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행태를 보고 있는 겁니다. 이런 부정적인, 표절이나 허위나 사기가 판친다. 그런 나라에는 이런 작품을 보낼 수 없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박인규 : 진짜 1급은 못온다는 말씀이시군요?
박래경 : 그럼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앞으로 젊은 큐레이터들이 원대한 목표를 두고 열심히, 정말 제대로
박인규 : 앞으로 미술계는 물론이고 큐레이터도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1세대 큐레이터시고, 또 큐레이터협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지금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래서 큐레이터를 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재능이랄까, 마음가짐이 없으면 어렵다.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마지막으로 해주시죠.
박래경 : 네. 큐레이터는 첫째로 미술에 관계되는 학과를 공부해야 됩니다.
박인규 : 기본적으로 미술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
박래경 : 미술사, 미술 이론, 다른 말로 하자면 미학이란 말로도 쓰이게 되는데 또 오늘날 사회학이라든가 문화학, 문화 이론이라든가 매체 이론, 굉장히 많죠 관계된. 그러니까 어느 쪽에 자기 관심이 집중돼 있는가. 또 전망, 미래를 전망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세상이 간다고 보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큐레이터라든가 미술관이라는 건 어쨌든 과거를 볼 줄 알고 과거에 이미 있는 것에 대한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현재나 미래에 이뤄져 나가는 어떤 사회적인 변화나 전망을 파악할 줄 아는, 이 안목이 또 필요합니다. 거기에 대한 배움과 경험이 많이 필요하죠. 그래서 그런 것을 우리도 앞으로, 말이 협회고, 정회원 무슨 회원 해서 위주로 일하겠지만 그런 결과에 대한 거나 또는 그런 내용에 필요한 요약본 같은 건 우리가 발표하고도 얼마든지 그것은 오늘날 인터넷이 발달되고 보통사람, 젊은이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공개할 겁니다.
또 좋은 의견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개진해 주고, 그런 것이 수렴되고 좋은 의견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노력해서 일을 해드리고 해서 다 같이 좋은, 우리 모두가 좋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사회. 바로 이런 미술관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벗어나서도 이 일은 계속되는 게 오늘날의 사탭니다. 심지어 큐레이터가 필요 없다는 얘기까지 나오지만 기존에 있는 작품과, 또 개인 작가가 아닌 작품에 대해서 누가 그런 일을 하느냐 했을 때는 큐레이터가 하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고 우리가 배척보다는 더 포용적으로 이 일을 바라보고 정리해가자. 그러면 더 나은 젊은이들의 앞길을 열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조금이나마 출발해보자 이겁니다.
박인규 : 말씀 듣고 보니 우리 사회에서 보다 수준 높은 미술, 또는 문화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대중들으 욕구가 굉장히 많고 또 그걸 충족시키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많은데, 그런 시스템이랄까요? 그런 중계를 하기 위해서 앞으로 큐레이터들이 하실 일이 많은 것 같고요, 초대 협회회장으로서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래경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한국큐레이터협회 박래경 회장과 함께 협회 출범의 의미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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