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가 총선 이후 3개월이 지났음에도 새 연립정부를 출범시키기 못하면서 언어권 사이 해묵은 분열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통합의 상징인 알베르 2세 국왕이 2차례나 중재에 나섰음에도, 연정협상이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과거 극우정치인들의 발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분열'이란 단어가 일반 시민들의 대화 속에서도 등장할 정도가 됐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불어권의 공영 TV방송인 RTBF가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는 가짜 뉴스를 내보내 전 국민이 화들짝 놀라는 소동을 빚었던 것이 "이러다가 진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인구 1060만명의 벨기에는 크게 네덜란드어권인 북부 플랑드르와 불어권인 남부 왈롱, 그리고 두 언어를 공영어로 사용하고 있는 수도 브뤼셀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인구비율은 플랑드르가 60%, 왈롱이 40%를 각각 점하고 있고, 같은 이름의 정당이 언어권별로 나란히 따로 존재하고 있다.
새 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연정협상은 지난 6월10일 실시된 총선에서 기독민주당과 자유당이 전체 150석 가운데 과반인 81석을 얻으면서 두 정당 사이에 시작됐다.
하지만 연정협상은 언어권 정당 사이 갈등을 좁히는데 실패하면서 지난 달 23일 결렬됐고, 차기 총리로 유력했던 조각책임자가 물러나는 등 정국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알베르 2세 국왕은 연정협상 결렬로 인한 정국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헤르만 판 롬푸이 하원의장을 새로운 중재자로 임명했으나 아직 별다른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연정협상 결렬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벨기에가 10년 후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답한 국민이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이번 위기가 국민들에게는 양대 언어권인 북부 플랑드르와 남부 왈롱 사이 분열 위기의 심화로 비쳐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불어권 일간지 라 리브르 벨지크가 지난달 말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0년 후 벨기에가 존재할 것이라고 답한 국민은 29%에 불과한 반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거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응답이 24%와 15%에 달했다.
엘리오 디 루포 프랑크폰(불어권) 사회당수는 "벨기에가 분열될 위험성이 총선 당시보다 지금 훨씬 커졌다"고 우려하고 있다.
1830년 벨기에는 '중립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강대국들이 이해가 맞아떨어진 덕분에 독립했다. 하지만 북쪽의 플랑드르와 남쪽 왈롱은 한번도 사이가 좋은 적이 없었다.
인구는 플랑드르가 많았지만 건국 이후 상당기간은 왈롱의 독무대였다. 불어권이 지배계급을 독차지했고, 경제적으로도 석탄·철강 산업의 융성으로 훨씬 부유했다. 주로 농업에 종사했던 플랑드르 사람들은 "뒤떨어진 시골뜨기"로 취급받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차별받았다.
1930년대 차별에 항의하는 '플랑드르 운동'이 발발하면서 현재의 언어권별 분리가 정착됐다. 북쪽 플랑드르는 네덜란드어, 남쪽 왈롱은 불어가 공영어가 됐고 수도 브뤼셀만 두 언어 모두 공영어가 된 것이다.
1970년 이후 5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에 의해 현재의 복잡한 연방제가 탄생했지만 두 언어권을 포괄하는 정당은 물론, 언론매체마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오히려 분리가 깊숙이 진행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상황이 역전되면서 이번엔 플랑드르 쪽에서 과거의 차별에 앙갚음식 분리주장을 펴고 있다.
플랑드르는 물류 및 화학 등 지식기반 산업으로의 전환에 성공하면서 유럽내에서 영국, 독일을 앞지르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반면 과거 지배계급이자 경제적으로도 훨씬 부유했던 왈롱은 철강·석탄 산업이 사양화를 맞으면서 플랑드르 쪽에서 떼어주는 일종의 교부금에 의존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플랑드르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은 EU 평균의 124%에 달하는 반면 왈롱지역은 90%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번 연정협상에서도 경제권을 쥐고 있는 플레미시 쪽은 지역 정부의 자치권을 확대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잘사는 플레미시 쪽이 떨어져나갈 것을 우려하고 있는 프랑크폰 정당들은 헌법개정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불어권에 속하는 수도 브뤼셀 지역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벨기에 최대 일간지인 헤트 라스테 니위스는 "소수가 다수의 희망을 막고 있는 나라에서 함께 사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적으로도 왈롱은 라틴 문명, 플랑드르는 게르만 문명에 각각 속해 있어 공통점이 없다. 과거 불어권의 한 정치인은 "벨기에에서 왈롱인과 플라망인이 함께 살지만 벨기에인은 없다"고 한탄한 적도 있다.
플레미시 TV인 VRT 방송이 전날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플라망인의 40%가 분리에 찬성하는 반면 왈롱인은 8% 만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 대조를 보였다.
분리될 경우 플라망인은 플레미시 공화국을 선호하는 반면 왈롱인은 현재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체적으론 분리에 찬성하는 비율이 25%에 그쳐 아직은 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벨기에 정당 지도자들이 언어권 사이 갈등을 조정, 새 정부를 조속히 띄우는 것으로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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