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박근혜 후보는 부산·경남(PK) 일대를 돌고 있었다. 부산 당원 간담회에서 "부산에서 정권교체의 강한 태풍을 전국으로 불어 올려 큰 바람을 일으켜 달라"고 호소한 것이 지난 13일이었으니 2주가 채 되지 않아 또 다시 부산 땅을 밟은 것이다. 그 사이 검증청문회와 정책토론회 등 중앙 행사가 줄을 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박 후보가 PK에 쏟는 각별한 정성을 가늠할 만하다.
선거전 초입에서 두 후보가 영남 표심 잡기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상식선에서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한나라당이 20일 각 후보 캠프에 명단을 넘겨준 대의원(4만6331명) 중 약 25%(TK 4470명, PK 6734명)가 영남 거주자다. 서울(8890명)보다도 많다. 경선 승리를 위해 영남 승리는 필수다.
26일 부산 합동연설회, 27일 울산 합동연설회 등 '영남권 더블헤더'를 치러야 하는 두 후보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루 앞서 경부선을 탄 것은 이 때문이다.
'TK=박근혜' 공식 깨지나
영남, 특히 TK는 당연히 박 후보의 아성으로 여겨져 왔다. 본인이 대구지역 국회의원인 데다가 대구 의원 12명 중 6명이 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나머지 6명 중 당 대표인 강재섭 의원과 이한구 의원은 중립을 선언해 이 후보를 지지하는 의원은 4명뿐이다.
각 지역 당원협의회가 선정하는 대의원들의 표는 자기 지역 국회의원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쏠리는 게 일반적 속성이다. 이 탓에 PK에서는 우세를 주장하는 이명박 캠프에서도 TK에서만은 줄곧 열세를 인정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명박 캠프 쪽에서 부쩍 "TK 기류 변화"에 대한 전망이 늘어나고 있다. 우열을 뒤집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올해 초 30%포인트까지 벌어졌던 격차가 한 자리 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20일 <매일신문>이 TK 성인남녀 64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1.3%가 박 후보를, 38.6%가 이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 후보가 4.3%포인트 앞서고 있었지만, 지난 1일 같은 조사에서 두 후보 간 격차는 6.2%포인트였다.
이 조사대로라면 검증청문회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 후보가 이 후보와의 격차를 좁히는 것으로 나타난 추세에 TK지역 표심만 역행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박근혜 캠프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박 후보가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는 상황인데 텃밭에서 몰리다니 상식적으로 안 맞는 얘기"라며 조사의 신빙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후보의 지지자가 검증국면 이후 여권이나 무응답층으로 돌아서는 수도권과 달리 TK에서는 이 후보에게서 빠진 지지율이 고스란히 박 후보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그는 "일부 여론조사가 특이한 현상을 짚어낼 수는 있지만 박 후보가 상승하고 있는 '추세'를 뒤 짚을 수 있는 유의미한 정보로는 보지 않는다"며 "영남 전체에서의 압도적 우세"를 장담했다.
朴, 믿던 집토끼에 발등 찍힐 수도
오히려 박 후보 측을 실제로 긴장케 하는 것은 '당심(黨心)'에서 포착된 반전의 기류다. TK와 함께 '당심'은 박 후보의 '비빌 언덕'이었다. 올해 초 이 후보 측과 치열한 '경선 룰' 공방을 벌여가면서까지 대의원·당원의 경선 참여를 늘이는 데 부심한 것도 2년 간 당 대표를 거치면서 당원들의 마음을 잡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확정된 대의원 1104명과 당원 1098명을 대상으로 22~23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박 후보의 '확신'과 엇갈리는 결과가 나왔다.
대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명박 후보(53.0%)가 박근혜 후보(37.8%)를 15.2%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음달 19일 경선 투표에 반드시 참가하겠다는 대의원 투표 확실층만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이 후보가 52.6%, 박 후보가 40.0%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영남권 '당심'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밀린 게 박 후보를 긴장하게 만든 요인이다. TK지역 대의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박 후보는 45.2%를 얻어 48.7%의 이 후보에게 뒤졌다. PK지역 대의원들도 51.9%가 이 후보를 지지했다(박 후보 지지율은 38.8%).
검증국면을 거치며 일반인 여론조사에서는 5%포인트 안팎까지 격차를 줄인 박 후보가 투표 참여율이 높은 대의원들에게선 격차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믿던 '당심'에 발등 찍힌 박 후보 측을 향해 이 후보 캠프에서는 "민심반영 폭을 늘리는 쪽으로 '경선 룰'을 바꾸자고 나오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박근혜 캠프에서는 <중앙일보>조사가 "당원협의회 위원장의 마음에 따라 표심이 결정되는 비균질적 집단의 특성의 고려치 않은 채 이뤄진 것"이라고 반박하면서도, "캠프 자체 여론조사에서는 '당심 경쟁'에서 져본 적이 없는데 일간지의 비정상적인 조사 결과가 나와 조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긴장감을 드러냈다.
"영남 당심이 당락을 가른다"
그렇다고 이명박 후보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중앙일보> 조사에서 영남권 일반 당원들은 여전히 박 후보에 높은 지지를 보내 대의원들과는 온도차를 보였다. TK의 일반당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이 후보는 60.8%를 기록한 박 후보에 한참을 밀린 28.3%에 그쳤다. PK 일반당원 조사에서도 47.5%의 박 후보가 43.3%의 이 후보를 앞섰다.
요컨대 영남권의 현재 판세는 '대의원 이명박 지지', '일반당원 박근혜 지지'로 요약되는 셈이다. 대의원과 일반당원의 표심이 엇갈린 지역은 영남권과 대전충청권 뿐이었다. 이는 한나라당 경선의 최대 격전지인 영남권의 '당심'이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에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한귀영 실장은 "당원협의회장이 추천한 대의원 표심은 관리된 결과인 데 반해 일반당원은 대의원과 민심의 경계에 선 표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심이 일반당원을 통해 대의원 표심으로 연결될 경우 한나라당 경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최근 각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줄어든 것은 아래로부터 나타난 흐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조직된 표'와 '일반 민심'의 문턱에 있는 영남권 일반당원들의 과도기적 표심이 추후 어디로 흐를지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호남의 변화를 시발로 충청권과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범여권 지지기반의 특성처럼 한나라당 경선은 영남권의 변화가 타지역의 판세를 추동하는 특성이 있다. 한 실장은 "승부처는 영남"이라며 "(이명박 후보 지지층인) 수도권의 40대, 화이트칼라는 실제로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경향이 강한 만큼 출석률과 충성도가 높은 영남권 표심이 좌우할 한나라당 경선은 현재로선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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