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 정부가 30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서명식을 가질 예정인 가운데 미 하원 민주당 지도부가 29일 "현재 합의된 대로는 한미 FTA를 지지할 수 없다"고 반대성명을 발표, 향후 미 의회 비준동의 과정에 난항을 예고하고 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스테니 호이어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찰스 랑겔 하원 세입위원장, 샌더 레빈 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 위원장은 이날 통상정책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네 명 모두 미 하원의 한미 FTA 비준동의와 관련해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게이트 키퍼'들이다.
민주당이 한미 FTA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서명식을 하루 앞두고 향후 의회 비준동의에 이처럼 찬물을 끼얹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양국 정부를 무척 당혹케하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FTA 협상을 타결지은 양국 정부는 미 민주당이 신통상정책을 통해 FTA에서 노동ㆍ환경 등의 요건을 강화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이를 수용, 몇 차례 협상결렬의 고비를 넘기면서 추가협상까지 마친 상황이기 때문에 당혹감은 더욱 크다.
민주당 하원 지도부가 이처럼 현재 체결된 한미 FTA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힘에 따라 30일 한미 FTA가 정식 서명되더라도 미 의회 비준동의까지는 치열한 찬반논쟁의 험로가 예상된다.
'수(數)의 정치'가 지배하는 미 의회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어 민주당의 반대를 극복하지 않으면 의회의 한미 FTA 비준동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원 지도부 뿐만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 상원 의원 등 민주당 대선 후보 중 상당수도 한미 FTA 협상결과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며 공개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민주당 지도부가 서명식 전날에 한미 FTA를 지지할 수 없다는 성명을 낸 것은 당장 한미 FTA 자체를 무효화 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제스처내지는 재협상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날 성명에서 "제대로 협상이 됐다면 한미 FTA는 미국의 노동자와 농민, 비즈니스업계 종사자들에게 주요한 혜택을 줄 것"이라면서 "불행하게도 현재 협상된 한미 FTA는 그런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 한미 FTA의 필요성과 가치는 사실상 인정했다.
그러면서 민주당 지도부는 "현재 협상된 대로는 한미 FTA를 지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당초 신통상정책을 한미 FTA에 적용토록 행정부에 압력을 넣으면서 자동차를 비롯한 다른 분야도 재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 행정부는 한국 정부가 재협상은 물론 추가협상에 강력 반발하자 일단 향후 의회에서의 비준동의의 난관을 내세워 민주당의 신통상정책을 반영하는 선에서 추가협상을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날 성명에서도 민주당 의원들이 FTA 협상과정에 줄기차게 거론했던 자동차 분야 협상 결과를 예로 들며 불만을 제기했다.
FTA에 대한 재협상을 유도하려는 게 민주당 지도부의 목적이라는 분석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또 민주당 지도부가 통상정책에 관한 성명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무역촉진권한(TPA)이 만료되기 하루 전에 발표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이에 대해 워싱턴 고위관계자는 "민주당 지도부가 예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밝힌 것"이라면서 "민주당내에 FTA를 좌절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그룹들이 있고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FTA 비준 동의과정에서 언제든 복병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법에 규정된 대로라면 한미 양국은 FTA를 TPA 만료이전에 서명함으로써 원칙적으로 미 의회는 FTA 합의문에 대해 수정을 가할 수는 없고 승인하거나 또는 거부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동차 분야 협상 불만 때문에 한미 FTA 자체를 무산시킬 경우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감내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미 업계에서 자동차 분야를 제외하고는 한미 FTA의 이득이 크다며 이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민주당 지도부로선 자동차 협상 때문에 한미 FTA 자체를 거부할 경우 '소탐대실'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최근 클린턴 상원의원이 미국 자동차 산업을 편들며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히자 미국의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WP)가 나서 "자동차 세일즈맨 같은 소리"라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게 한미 FTA에 대한 미국내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민주당 하원 지도부의 이날 한미 FTA 반대 성명은 한미 FTA가 TPA 시한 내에 체결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민주당의 주장이 한미 FTA에 반영되도록 재협상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으로 간주된다.
민주당 지도부가 이번 성명에서 한국의 쇠고기 시장 개방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도 눈길을 끈다.
이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미국을 광우병 위험통제국으로 지정한 뒤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시장 개방에 적극 나서고 있음을 인정, 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한미 FTA에 대해 갖고 있는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남에 따라 한미 양국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FTA 서명식의 기쁨도 잠시일 뿐이고 다시 의회 비준동의를 어떻게 받아낼 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다음은 성명 내용 중 한미 FTA 관련 부분.
"내일 미국과 한국은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할 예정이다.
제대로 협상이 됐다면 한미 FTA는 미국 노동자와 농민, 비즈니스 종사자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협상된 한미 FTA는 그런 기회를 놓쳤다.
한미 FTA 합의는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문제로 특히 한국시장에서 미국 제품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비관세 장벽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특히 자동차 분야 협상에서 두드러진다. 미국은 작년에 한국에 5천대도 안되는 자동차를 수출한 반면에 한국은 미국에 70만 대 이상의 자동차를 수출했다.
이런 숫자들은 시장접근이라는 측면에서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들과 과도하게 일방적인 무역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자동차 분야를 넘어서 한미 FTA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킬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현재 협상된 대로는 한미 FTA를 지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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