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은 일상적인 시민생활의 규범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법과 정의의 이념을 제쳐놓고 우리 인간의 본성을 공격적이 되도록 만든다" 희랍문명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 시민들이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투키디데스는 우리 인간의 공격적 본성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21세기의 이라크에서 본다.
무감각해진 전쟁윤리의식
지금 이 시간에도 이라크에서는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의 광풍에 희생당하고 있다. 가해자는 이라크 주둔 미군과 그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차량폭탄 테러범들이고, 피해자는 이라크 민초들이다. 2003년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래 지난 4년 동안 생목숨을 잃은 민간인들의 머릿수를 꼽아온 '이라크 보디 카운트'(www.iraqbodycount.org)는 2007년 5월말 현재 7만명쯤(최소 6만4500명, 최대 7만7백명)이 죽은 것으로 발표했다. 미국의 침공이 없었다면 살아있을 목숨들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 사상자도 만만치 않다. 지난 2006년 12월 드디어 3000명 을 넘어서더니, 6개월만인 6월7일 드디어 3500명을 넘어섰다. 미국의 현충일(메모리얼 데이)인 지난 5월 28일 하루 동안 10명의 미군이 죽은 것을 비롯, 5월 한 달 동안에만 115명의 미군 병사가 죽었다.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미군 병사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져, 거리의 이라크 민간인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소식이다.
미국 언론이나 국내언론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라크 주둔 미군의 정신건강 상태를 조사한 보고서가 하나 있다. 2006년 11월 미 육군의무감실에서 펴낸 89쪽 분량의 보고서다. 그 내용이 워낙 민감해 대외비로 다뤄지다가 반년 뒤인 지난 5월초 미 언론에서 일부내용만을 보도했을 뿐이다(www.armymedicine.army.mil/news/mhat/mhat_iv/MHAT_IV_Report_17NOV06.pdf).
미군 3명중 1명, "정보 얻으려면 고문해야"
미군 병사 1800명(육군 1,320명, 해병대 447명)을 대상으로 한 보고서의 '전장윤리'(Battlefield Ethics) 항목을 보면, 이라크 주둔군의 무딘 전쟁윤리의식이 드러난다. △3분의 1이 넘는 미 육군과 해병이 "동료 병사의 목숨을 구하거나 저항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고문을 해도 좋다"고 여기며 △단지 47%의 육군병사와 38%의 해병만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정중하게(with dignity and respect) 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을 뿐이다.
이 보고서는 나아가 △미 육군병사의 28%, 해병의 30%가 "이라크 민간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욕하거나 모욕을 가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고 △미 육군병사의 55%, 해병의 40%만이 "동료 부대원이 죄 없는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했을 경우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겠다"고 했고 △미 육군병사의 43%, 해병의 30%만이 "동료 부대원이 이라크 민간인 재산에 손상을 입혔을 경우,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높은 자살율에 정신질환 증세
문제는 위의 조사결과가 과연 정확하겠느냐는 것이다. 민간인 학대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들은 나이로 봐서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17살 미성년자의 입대가 가능한 곳이 미군이다. 그런 젊은이들이 미 국방부 조사요원에게 "내가 이라크 민간인들을 학대했다"고 떳떳이 밝히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실제로 저질러진 잔혹행위들이 은폐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들의 난폭성과 무딘 전쟁윤리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날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미군병사들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장에서 적과 얼굴을 맞대다시피 싸워야 한다. 누가 적인지 분간이 어렵고, 폭발물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형편이다. 낮에 훈련시킨 이라크 병사가 밤에는 총부리를 미군에게 돌리는 일도 벌어진다.
따라서 미군들의 태도는 거칠어지고,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정신건강도 엉망이 돼 자살충동으로 이어진다. 위의 미 육군 의무감실 보고서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 동안 이라크 주둔 미군의 자살율은 10만명 당 16.1명. 미군 평균 자살률(10만명 당 11.6명)에 비해 훨씬 높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이라크에서 그렇게 짧은 삶을 마감했거나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괴로움을 겪는 미군 병사들, 전쟁윤리 의식 무딘 미군병사의 화풀이 총질과 군홧발의 표적인 이라크 민초들, 이들 모두는 석유와 세력확장을 노리는 21세기 유일 패권국가 미국이 벌이는 '더러운 전쟁'의 희생양들이 아닐까.
* 이 글은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최근호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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