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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없는 세상에서 하루라도 살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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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없는 세상에서 하루라도 살아 본다면'

[사형제도, 이젠 폐지돼야 한다·7] 억울한 사형수의 항변

퍽이나 복잡했고 또 복잡한 만큼 많은 논란을 낳았던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의 피해가족인 이도행 씨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이 씨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넘어서서 그 자신이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어 '사형'과 '무죄'를 오가는 8년의 간단치 않은 세월을 겪었다.
  
  이제는 의사로서의 활동도 재개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남은 응어리까지야 지울 수 있을까. 제3자가 넘겨짚어 위로하기도 쉽지 않은 대목이다. 이 씨가 그런 쓰라림을 딛고 자신이 빠졌던 '사형제도의 질곡'을 성찰하는 글을 보내왔다.
  
  사형제도의 찬반 논란이 대개 제3자의 시각에서 이뤄지는 것과 달리 이 씨의 글은 직접 당사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울림이 있다. 과연 사형제도는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잔인한 봄이 싫다.
  
  1994년 5월 26일 내 딸 화영이가 태어났다.
  1995년 6월 12일 아내와 화영이가 살해당했다.
  1996년 2월 23일 나 또한 사형선고를 받았다(첫 재판).
  2003년 2월 26일 마지막 무죄 선고를 받았다(다섯 번째 재판).
  
  화영이가 살아 있었으면 중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마가 싹을 틔우고 있다. 한 뼘 정도가 되게 자랐다. 여름이 오기엔 아직 이른데 더위가 극성을 부린다. 햇볕이 뜨겁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연의 순리에 맡기고 범인에 대한 단죄는 하느님의 손에 넘겼다. 그러나 기다림의 연속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또 찾아왔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꽃을 피운다. 용서와 인내가 큰 덕목에 속한다.
  
  사건 후 수박을 먹지 못했다. 수박을 무척 좋아했던 나는 그것에 대한 아픈 기억이 연결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다시 수박을 먹지만 아픔은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 감옥에서 나와 한동안 여자 어린이를 보면 화영이가 생각났고 이름을 잘못 부른 적이 있어 스스로 놀랐던 적이 있다. 사랑이란 단어를 되뇌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총을 난사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자기도 죽었다. 이라크에서는 자살 폭탄테러 소식이 전해온다.
  
  1997년 12월 31일 한국에서 무더기로 사형 집행이 있었다. 요즘 인터넷 UCC 동영상이 유행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두려움을 이용해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의 수단이 사형제도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은 금기시되는 영역이다. 화형 총살 교수형 작두 망나니 기요틴 전기의자 약물을 이용한 사형은 과거와 현재의 방식들이다. 언젠가는 테러범들이 잔인하게 행하는 사형 장면 동영상을 국가가 유사하게 적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인가.
  
  일본은 사형을 몰래 하고 미국은 사형 반대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사형제도는 변화하고 있다. 사형을 시키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리고 검증을 다시 한다. 독재자가 집행하는 사형은 예외이겠지만….
  
  나는 사형제도에 정통한 법률가나 이론가는 아니다. 단지 사형과 무죄 선고를 받았으며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8년간의 재판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또 4년이 흘렀다. 범인은 현재까지 단죄를 당하지 않고 있다.
  분노를 하느님께 맡긴 지금 조금은 자유롭지만 편안한 것은 아니다.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것은 무엇인가. '적선인가' 아니면 '목숨을 건졌으니 그만 만족하라'인가. 국가 구성원인 국민은 결정을 해야 한다. 항상 희생양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피해간다 해도 아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봄이 싫다.
  
  새로움이 시작되는 계절이 싫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이 두렵다. 개인의 복수를 국가가 모두 대신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 구성원이 생각하는 혹은 찾고 있는 범인을 국가가 대신 찾아내서 해결해 주는 것이 현재의 제도이다. 사형제도의 주인은 우리들이다. 사형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나 자신의 몫이고 책임이다. 역사적으로 변화되어 온 사형 방식(예를 들면 효수에서 교수형으로)을 다시 다른 형식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것인가 아니면 후퇴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내가 싫어하는 봄은 그러나 새로움을 잉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대한민국이 새로움을 잉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죽음)을 잉태할 것인가. 사랑과 용서 자유 그리고 평화를 찾을 것인가. '사형제도가 없는 세상에서 하루라도 살아 본다면'이라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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