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미사일방어(MD) 기지 설치문제, 코소보 독립 문제 등 주로 지역 패권을 두고 미국과 대치해 온 러시아가 이번엔 국제금융·무역기구의 '근본적 재편(radical overhaul)'을 요구하고 나섰다.
서구 다국적기업 CEO들 면전에서 '도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10일 세계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세계무역기구(WTO) 등 기존의 국제금융·무역기구를 싸잡아 "낡고 비민주적이고 덩치만 커서 다루기 힘들다"고 혹평하며 "러시아를 포함한 신흥시장 국가들의 경제력 성장을 반영한 새로운 국제·금융무역기구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안정적인 경제 발전을 함께해 온 국가들은 이제 신뢰와 호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제경제기구의 창설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날 발언이 나온 자리도 의미심장했다.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의 경제 회복을 과시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주최한 '페테르부르크 국제 경제포럼'에는 도이치 뱅크, 브리티시 패트롤리엄(BP), 로얄 더치 셸, 네슬레, 셰브론, 지멘스, 코카콜라 등 서구 중심 경제 질서의 혜택을 받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참석해 푸틴 대통령의 '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존의 국제금융무역기구가 서방선진공업국들 위주로 짜여있어 신흥국가들에게 불공정한 원칙을 강요한다는 것이 '개혁'을 요구하는 이유였다.
푸틴 대통령은 "50년 전에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0%가 G7 국가(미국, 캐나다,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나왔으나 이제는 전 세계 GDP의 60%가 G7 이외 국가에서 나오고 있다"며 러시아도 속해있는 서방선진공업국 모임인 G8을 "특혜를 입은 부자들(fat cats)"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루블화가 세계경제교역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러시아 미국의 파워를 지탱하고 있는 '달러 헤게모니'에도 도전할 의사를 내비쳤다.
푸틴 대통령은 "현재 국제금융시장에서 기껏해야 2가지 국제통화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며 "다른 나라의 통화도 국제금융시장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추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전 총재의 스캔들 사태를 계기로 좁게는 세계은행, 넓게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무역기구 전반에 대한 개혁 필요성이 남미와 아시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제기돼 온 상황이니 만큼, 푸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신흥시장의 공감대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시킬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이로써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선은 지역 패권을 넘어 경제·금융부문으로까지 확장됐다.
동유럽 미사일방어기지(MD) 설치를 두고 미국과 힘겨루기 중인 러시아는 지난 8일 미국이 계획 중인 체코와 폴란드 대신 중앙아시아의 아제르바이잔에서 공동 기지를 설치하자는 대안을 내놓았지만 백악관으로부터 거절의 말을 들었다. (관련기사: 부시, 결국 'MD 외통수'에 빠지나)
세르비아에서 코소보를 독립시키는 문제를 두고도 미·러 간의 갈등은 깊어지는 분위기다. 미국은 유럽연합과 손을 잡고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통과시킬 방침이지만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정부 편에 서서 안보리 결의안 상정시 거부권 행사를 경고하고 있다. (관련기사: 미-러, 코소보 독립 두고 '제2 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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