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함세웅 신부입니다. 함세웅 신부는 1942년 서울 출생으로 1965년 가톨릭대학 신학대학을 수료하고 68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1974년 뜻을 함께 하는 신부들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해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고비고비마다 주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1987년 5월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1976년 '명동성당 3·1절 기념 미사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두 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과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 추진위원회' 상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박인규 : 벌써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지 20년이 됐습니다. 함세웅 신부님께서는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는 데 어떻게 보면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 중 한 분이신데 20년을 맞으면서 많은 생각이 오가실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이십니까?
함세웅 : 저 나름대로의 큰 감격,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사람은 과거를 잘 잊지 않습니까? 늘 초심을 지니고 초지일관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저도 좀 과거를 잊긴 합니다만... 우리 시대에 많은 분들 특히 젊은이들이 과거의 처절했던 삶의 기억을 잊고 사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2007년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을 잘 기리기 위해서 준비를 했었어요. 그리고 지난해 12월에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추진위를 결성하고, 올해 87년 1월 14일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군 추모제를 올리면서 기념사업회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래서 87년 1월부터 6월, 그리고 후반기 12월에 이르기까지 그 해의 삶을 2007년에 우리가 그대로 재현을 하면서 그 정신을 되살리자는 목표를 설정하면서 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했어요.
저는 87년 1월 14일 대공분실에서 목숨을 잃은 박종철군을 생각하면서 늘 역사적 빚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올해 2007년 1뤌 14일 바로 학생이 죽은 대공분실에서 20년 기념사업 발족식을 한 자체가 감동이었어요. 바로 그 학생이 죽었던 방 창가에 크게 저희들이 현수막을 붙이고서 6월의 그 87년의 희생의 넋을 기렸습니다. 특히 청화스님과 이해인 수녀님께서 추모시를 낭독해 주셨는데 정말 기도였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그 자체가 웅변이거든요. 대학교 3학년 학생의 억울한 죽음이 우리의 공포를 자아냈던 군부독재정권을 타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추모시와 함께 저도 기도를 올리면서, 아 이 억울한 의인의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고 예수의 죽음이고, 순교자의 죽음과 맥을 같이하고 있구나. 그 박종철군의 죽음이 바로 기폭제가 되면서 광주의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전두환 군부독재체제를 타파하는 데 결정적 일을 했다는 이 점을 제가 되새기면서 87년의 그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분들을 만날 때, 특히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의 열매는 바로 박종철군 이한열군과 같은 희생된 분들의 열매라는 이 점을 우리가 늘 생각하면서 선배들에 대한, 또 선조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살고, 또 그분들의 열정을 우리가 되새겨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20주년을 맞고 있고, 저희들 함께하는 분들과 함께, 또 많은 시민들에게 이 뜻을 전하고저 합니다.
박인규 : 87년 6월뿐만 아니라 87년 1월 박종철군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서 87년 12월 대선 때까지 20년 전 그날을 되새겨보자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아무리 봐도 87년의 백미라고 할까요 6월의 학생과 넥타이부대들의 민주화 외침이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6월 10일을 민주화기념일로 기억하고 있고 올해 법정기념일이 됐는데, 6월만 해도 20년 전 오늘을 기리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간단히 소개해 주시죠.
함세웅 : 우선 이번주간에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하면서 20년의 삶을 되짚어보고 오늘의 민주주의의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가치창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교협 교수님들과 많은 학자들이 애쓰고 계신데 이런 학술적인 모임도 있고, 이미 지난 3월에는 불교단체에서 박종철군 49재를 계기로 해서 스님들이 세상에 나오셨거든요. 그 측면을 우리가 장엄하게 기렸고 또 저희들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조작한 것을 폭로한 87년 5월 18일을 기리면서 광주항쟁 27주년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또 천주교쪽에서 장엄한 기억행사를 가진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는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조작사실을 처음 전했던 한재동 교도관에 대한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장한 민주시민상을 드렸어요.
정말 그분들은 음지에서 그야말로 그늘에서만 사셨는데, 이제는 세상에 밝히고 저희들은 어떤 의미에서 민주화에 대한 공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음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목숨을 걸면서 교도관의 신분으로서 독재정권 타파에 앞장서서 박종철군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모범을 보이셨던 교도관들을 기려야겠다. 그래서 그날 미사와 함께 그분들을 기억했는데 이런 내용들 우리가 이 시간에 한 번 되짚어보고 싶고. 특히 이번주간에는 해외민주언론인들을 저희들이 초청했습니다. 그 당시 청년, 시민, 학생들 전역에서 다 노력을 했습니다만... 저희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저희들의 순수한 뜻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군부독재정권에 윤리적인 압박을 가하셨던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분들이 세계 언론인들이에요. 일본 동경, 홍콩에서 언론인으로 종사하셨던 분들이 전부 그날 그 주간에는 한국에 오셨었는데 우리가 살아계신 그분들을 초청해서 한 4박5일 동안 행사를 갖습니다.
7,8,9,10 행사를 갖고, 또 9일에는... 바로 전일인데 전국 남북 하나로 잇기 운동이 있어요. 임진강에서 출발해서 서울, 서울에서 대전, 광주, 목포로 이어지는 한줄기. 또 서울에서 강원도를 향해서 강릉 쪽으로 가는 한줄기. 그리고 대구, 부산 쪽으로 가는 한줄기. 그래서 전국 하나로 잇기 운동이 있습니다. 이 전국 하나로 잇기가 더 번져서 남북의 일치와 화해를 이룩해야 된다... 이런 지향으로 오전 9시부터, 저희들은 임진강에서 10시에 공식행사를 합니다. 그래서 그 행사, 많은 젊은이들, 또 YMCA가 주최가 되면서 열심히 주관하고 계신데 이런 행사가 있고. 또 그날 오후 4시에는 시청앞에서 20년 전 목숨을 잃었던 이한열 열사에 대한 추모식을 많은 분들과 함께하고. 또 그 당시의 감격과 감동을 기리면서 이애주 교수님이 중심이 된 춤놀이... 춤 표현이 있고, 또 7시부터 시민이 함께하는 축제가 있습니다.
그날 전야행사를 우리가 갖고, 6월 12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그날 오전 10시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과 함께 저희들이 올해 6월 10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거든요. 그래서 대통령님을 모시고 한 3천여 명 이상의 민주인사들이 모여서 첫 번째로 장엄하게 기념행사를 치르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이 내용을 삶으로 표출하기 위해서 KBS가 주관하는 6.10항쟁을 기리는 열린음악회 행사가 KBS홀에서 있습니다. 이런 모든 내용들... 외적인 행사인데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87년 6월의 정신, 뜻을 마음 속에 되새기고 오늘을 어떻게 재현하느냐 의미를 찾는 것. 그리고 더 아름다운 미래를 창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 이 부분이 저희들이 지향하는 사업의 내용입니다.
박인규 : 6.10항쟁이 20년이 됐는데 이제야 국가기념일이 된 건 늦은 감이 없지 않긴 합니다만, 그 당시로 돌아가서 87년 6월 당시 전 사실 여당지라고 하는 신문사의 기자였는데,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그날엔 전혀 몰랐구요. 87년 4월 13일인가요 호헌선언도 있었고 전두환 정부에서, 언론계 내부에선 살생부라고 해서 어떤 기자들은 쫓겨난다더라.. 아주 흉흉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1월에 죽은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을 5월 18일날 5.18항쟁 기념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밝혀내고 그때부터 상황이 바뀌면서 6월 항쟁으로 이어진 거 아닙니까. 그 당시 함세웅 신부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용기있는 행동을 하셔서 거기까지 가게 됐는데,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이 은폐·조작됐다는 게 알려지기까지는 이부영 의원이나 김정남씨나 많은 분들이 활동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됐는지 소개 좀 해주시죠.
함세웅 : 87년 1월에 보도를 들으신 국민들은 아무도 경찰의 발표를 믿지 않았죠.
박인규 :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함세웅 : 그 당시에 참 기가 막힌 발표였는데, 정말 어이가 없다고 다 생각했는데 또 공개적으로는 그 말을 못하지 않습니까? 무서운 시대였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시대였는데, 그래도 박종철군의 시신을 처음 검시했던 의사, 또 그 보도내용을 추적했던 기자 분들, 법의학자 이런 분들이 끊임없이 노력을 하셨어요. 그나마 부분 부분 내용들이 밝혀지게 됐는데, 결정적으로는 그 당시 이부영 전 의원이 감옥에 갇혀 계셨는데, 감옥에 묘하게 경찰 두 분.. 조한경 경위와 또 다른 경찰이 감옥에 들어와 있었는데.
박인규 : 당시 박종철씨를 죽였다고.. 책임진...
함세웅 : 네. 그 분들이 생각해 보니까, 감옥에 와보니까 약속대로 잘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잠깐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신문에 계속 보도되고, 그래서 이분들이 억울하니까 감옥에서 좀 하소연을 했어요. 푸념도 하고.. 교도관들 앞에서. 이게 뭐냐 우리만 희생양이다. 억울하다. 사실 진범은 따로 있는데... 이런 내용들을 교도관이 들으면서 또 이부영씨도 옆에서 들으면서 기자적 감각이 있으니까 메모를 했죠. 메모를 해서 이부영 전 의원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서 전병룡 선생님이라고 그분도 교도관이셨어요. 그분께 전달해 주셨고. 그리고 김정남씨에게 전달되면서 김정남씨가 기본적인 내용을 좀 종합한 다음에 저희 사제단에게 내용을 건네주셨는데, 사제단밖에 없다 이것을 발표할 단체는.. 이걸 꼭 발표해야 된다.
해서 저희들도 발표해야 된다는 사명감, 소명감은 지니게 되는데 시대가 좀 어려웠던 때니까 이걸 언제 발표해야 되는가 고민하고 좀 신중하게 생각했어요. 한 3월 말인가 4월 초쯤,, 한 3월 하순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의논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께도 말씀드리고 유현섭 변호사님, 황인철 변호사님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우리 정의평화위원회의 회원이시고 인권변호사시거든요. 그분들께도 알려드리면서 의견을 종합했어요. 그러던 차에 좀 빨리 이 부분을 공개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국회 쪽으로도 알아봤죠. 그 당시 신민당 의원들... 김영삼 그 당시 국회의원 그런 분들을 통해서도 했는데 그분들이 하시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 그럼 잘됐다. 국회의원들은 면책특권을 갖고 계시니까 그분들이 하시면 더 좋은 일이고 또 선명한 야당 의원으로서의 위치가 확인되니까 참 좋다. 그랬는데 또 며칠 뒤에 연락이 오는데 못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분들이... 그러니까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그러던 차에 또 4.13 이른바 호헌조치가 나지 않았습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단임제, 대통령 간접선거 이런 거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던 차에 광주에서 신부님들이 단식을 하면서 호헌철폐주장을 펼쳤어요. 이 호헌철폐주장이 광주, 전주, 대전, 부산, 대구, 춘천 수원, 서울, 원주 전역으로 퍼지면서 한 5백여 명의 신부님들이 단식을 하셨어요. 한 주일씩 순차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그러면서 5월이 되면서 교려대학교 이문영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이 호헌철폐와 함께 민주화,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는 뜻에서 성명을 발표하시게 됩니다. 이 시기가 참 무르익었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또 저희들이 주춤거릴 때 김정남씨 이런 분도 공개적으로 다니기가 어려워서 숨어 다닐 때인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아주 신중한 의견을 주신 게, 혹시 우리가 이걸 발표할 때, 인혁당 사건에서 보듯이 전두환 군부독재가 무자비한 사람들인데 그냥 경찰 두 사람을 교도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이걸 걱정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들도 좀 두려운 마음도 한 편 있고. 또 혹시 저희들이 이걸 공표했을 때 그분들이 정말 재판도 없이 그냥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그 부분도 걱정이 돼서 저희들도 보름 늦춰졌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제가 홍보국에 있었기 때문에 홍보국에서 그 문건을 준비하면서 유현섭 변호사님과 황인철 변호사님이 문안을 다 검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발표하든지 이것이 법적으로 가게 될 때 그 변호사님들이 변론을 맡으셔야 되니까 그 사안들을 완전히, 변론을 염두에 두시고 문안을 다 완전히 검토해 주셔서 발표할 문안은 완성이 됐는데, 또 김수환 추기경님의 그런 염려하시는 신중한 의견도 있어서 조금 멈칫멈칫하고 있었는데 5월이 다가왔습니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 7주년 미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저는 그 당시 교구홍보국에 있어서 주일에 좀 자유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에 추천한 신부에게, 그분이 구파발성당에 있었는데 제가 주일마다 구파발성당에 다녔거든요 미사하러. 어린이 미사도 하고 11시 미사도 하고 점심을 먹고 왔는데 5월 초순 쯤 됐죠. 구영구 변호사님의 부인이 천주교 신자세요. 그분이 구파발 성당에 미사를 오셨어요. 오셔서 쪽지를 하나 전해주시는데 김정남씨가 그 댁에 숨어 계셨어요. 그러면서 이 일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말할 수 있고 또 십자가를 져야 된다.. 이런 취지의 내용인데.
저도 늘 마음속으론 우리가 해야 된다고는 했는데 때를 아직 찾지 못했던 터에 5.18 기념미사도 다가왔고 그러한 호소문도 오고 그래서 제가 그 편지를 갖고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홍제동 성당에 계시는데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가서 그 내용을 말씀드리고 그동안의 과정을 종합하고, 하여간 명동에서 예정된 미사를 계기로 이 내용을 우리가 발표하자. 그래서 김승훈 신부님과 대화를 하면서 저희들이 합의를 했습니다. 발표하기로. 그래서 그 내용이 명동성당에서 발표가 된 것이죠.
박인규 : 그 당시 김승훈 신부님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셨나요?
함세웅 : 우리가 법적으로 대표라고는 안 그랬는데 저희 중에 제일 선배시고 또 마음이 넓으세요. 그래서 그냥 이심전심으로 우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니까 단장님 단장님 했는데, 사실상 그 당시 저희들의 대표로서 일하셨어요. 저희들이 모신 거죠 말하자면. 그래서 농담 삼아, 신부님은 끌려만 다니시고 감옥은 아직 안 가셨으니까 이번 기회에 별 좀 다셔야 합니다. 그래서 감옥 가실 각오를 하고 큰 일을 수락을 하셨어요.
박인규 : 그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를 부탁하시기 전에 신민당이라는 야당에 했다가 안 했다고 하셨는데 혹시 언론을 통해서 해보겠다는 생각은 안 드셨던 모양이죠?
함세웅 : 그 당시 언론은, 잘 아시는 대로 7, 80년대는 그냥 정권의 시녀, 관보 역할 밖에 안 했거든요. 74, 75년에 동아언론자유투쟁위원회가 건립되면서 동아투위, 조선투위 기자들 몇 분 계셨지만 그분들 다 쫓겨나시고 나서는. 또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자들이 다 현장에서 쫓겨났잖아요. 그래서 기자들에게 이걸 맡긴다는 건 저희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입니다.
박인규 : 모두에 말씀하시면서 6월뿐만이 아니라 87년 1월부터 12월까지를 돌아본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6.29선언이 있었고 직선제 개헌이 되고 나서 12월 대선에서 어떻게 보면 민주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김영상 후보가 안 되고 다른 분이 되셨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민중들이 얻은 민주화를 정치인들이 빼앗겼다. 그 뒤에 우리나라 정치의 과정도 지역주의랄지, 어쨌든 마무리가 안 좋았다, 여러 가지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물론 민중들의 힘으로 민주화를 얻은 건 사실입니다만 요즘의 정치를 보면 뭔가 정리가 안 돼 있고..
함세웅 : 8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양김분열과 함께 민주세력이 분열된 점...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고 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저는 사제이기 때문에 성당 현장에 있어서 그 아픔을 그렇게 크게 실감하지 못했는데 제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보면서 현실에 더 깊숙이 와서 활동하면서, 그 상처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어요 20년 동안. 그래서 그 상처를 마무리해야 되는데 이 점이 참 우리에게 역사적 숙제구나, 이렇겐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 당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 쪽을 선호했습니다. 저는 공개적으로 선언은 안 했습니다만, 왜냐하면 그분이 더 고생을 하셨고 민주화를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또 연세도 좀 위고 그분이 되는 게 순리적으로 맞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도 애쓰셨던 분이니까 그분이 돼서 상관없다.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그분들이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된 것은 두 분 뿐이 아니라 그 두 분을 따르던 모든 민주동지들의 전체적인 분열을 가져왔어요. 이 부분이 가슴 아프고 아직도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고. 또 지금 두 분이 발언하는 걸 보면 대조적이잖아요. 이런 게 가슴 아픈데 두 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객관적인 표현을 하긴 어렵지만 두 분 다 역사적 죄인입니다. 국민들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욕심, 사익에 눈이 멀어서 목숨을 잃었던 민주동지들, 또 민주화를 외쳤던 젊은이들, 시민들의 열기를 짓밟았던 역사의 죄인들이니까, 적어도 그 두 분들은 20년을 맞이해서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두 분들의 행보가 조금 차이가 있어요. 이 부분을 볼 때 연세에 막바지에 역사적 행업이 저희 앞에 보여졌으면 하는 마음 새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인규 : 언론인이고 일반 시민이고 간에 87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하고 그때의 느낌을 가져야 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물론 7, 80년대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 많은 역할을 한 건 아는데 일각에서는 정치와 종교는 떨어져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고. 또 이제 사회가 많이 민주화 됐는데 신부님께서 자유 평화 부분에서 일할 필요가 있겠느냐 말도 하시는데. 정의구현사제단이 지금 시대에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함세웅 : 그 말씀 전에 저의 체험을 좀 알려드려야겠는데 제가 대학교 1학년... 대신학교에서 4.19를 맞이했거든요. 4.19를 맞이할 때 저희들은 신학교 기숙사에 있었으니까 밖에 나가지 못할 때인데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때 학장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당시 경무대 앞에서 희생된 많은 학생들... 이 분들이 피 흘린 덕분에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어선 안 된다. 이분들이 무리 민주화 실현을 위한 희생제물이다 .그러시면서 불사조 신화를 말씀해 주셨어요. 불사조는 글자 그대로 죽지 않는 새인데, 중동신화의 새인데 이 새는 죽을 때 나무둥지에 가서 막 몸을 비벼서 스스로를 불태워요. 그럼 자기가 불타서 죽습니다. 재 밖에 안 남아요. 그 재가 식으면서 하나의 알이 생기고 그 알이 터지면서 새로운 불사조가 하늘로 날아간다는 겁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생명을 이어주는 새가 바로 불사조인데, 바로 희생된 분들이 우리 시대의 불사조다. 그때 대학교 1학년 때 참 감동을 받고 4.19혁명의 의미를 생각했는데 그 다음 5.16군사혁명에 짓밟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무려 19년 동안 박정희 독재 때 인권을 빼앗기며 살아왔는데, 또 그 뒤 7,8년 동안 전두환 독재시절이 진행됐는데, 그러면 신앙인 종교인으로서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해야 되는가. 성서를 보면 출애굽에 해방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고 하느님의 뜻이다. 그리고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은 세상의 빛이 돼라 소금이 돼라 그러셨거든요. 그럼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빛도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어요. 그냥 성당 건물 안에서 기도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존재 이유는 역사와 함께, 민중과 함께, 또 그 속에 스며들면서 그분들의 아픔, 고통을 함께하면서 불의한 세력을 타파하는 것, 의로운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구원이고 종교적 사회적 사명이라는 걸 느꼈죠.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 종교의 본질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면서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어떤 것이든, 정치체제든 사회체제든 우리가 바꿔야겠죠. 바꾸는 작업이 회개작업인데 이러한 신앙의 사회적 소명을 많은 분들이 잊고 계세요. 잊고 계신 이유는 불의한 독재정권이 종교를 건물 안에 가둬 놓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건물을 뚫고 나와서 불의한 세상을 맑게 정화시켜야 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는 게 아니고 다만 구별이 됩니다.
구분되는 것이고 정치와 종교는 같은 실체의 양면입니다. 같은 사람이 신앙인이고 같은 사람이 시민, 국민 아니겠습니까. 100% 국민이고 100%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벽을 넘나들면서 성당에서 기도할 때의 거룩한 마음을 갖고 이 세상에서 그런 거룩한 자세로 살고 세상을 바꿔야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사회적 책무는 저희들이 존재하는 한 늘 함께하는 것이 되고. 오늘 이 시대는 또 많은 분들이 사회를 위해서 투신하고 계시니까 저희들은 이제 우리들의 반성, 교회의 반성과 쇄신을 위해서 더욱 집중하고. 특히 다른 분들이 조금 힘들어하시는 남북일치와 화해 쪽. 사실 저희들은 공식적으로 남북의 통로가 열리기 전에 90년대 초부터 북한돕기운동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환경운동 쪽에 관심을 갖고. 또 무엇보다도 교회쇄신운동 쪽에 저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무엇보다도 정의를 말하기 전에 스스로 정의로워져야 된다는 가르침을 늘 되새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박인규 :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가 됐다곤 합니다만 많은 분들이 민주화가 밥먹여주냐... 이런 분들도 있고. 말하자면 민주주의에 대한 고마움을 잊는 측면도 있는 것 같은데, 6.10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으면서 일반 시민들에게 이 날이 갖는 의미는 어떤 거다. 이런 말씀을 마지막 말씀으로 부탁득리겠습니다.
함세웅 : 역사교육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만이 기억하는 존재인데,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민족만이 더 아름다운 미래를 이뤄낼 수 있거든요. 과거를 잊는 민족은 현실적으로도 또 미래를 위해서도 창조적 삶을 살지 못합니다. 기억이 인간존재의 가치고 역사의 핵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조금 가깝게는 20세기 초반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함께 나라를 찾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삶을 마음에 간직해야 되고. 또 해방 이후 자유당 독재, 군부독재 때 자유를 찾기 위해 숨져간 분들의 고귀한 삶도 늘 기억해야 됩니다.
80년 희생자들도 기억해야 되고 무엇보다 올해는 87년 6월 항쟁의 불꽃을 일으킨 주역들, 익명의 모든 분들, 정의와 평화와 희망을 간직한 그분들을 함께 우리가 되새깁니다. 다만 정치현실에서 현재 뛰시고 있는 분들의 미흡한 점이 다소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민주세력의 모두는 아닙니다. 그런 측면 속에서 우리가 한 부분, 또는 한 부류의 부족한 점을 갖고 너무 보편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혹시 오늘 우리시대의 부족한 부분을 우리가 노력해서 보완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오늘로 이끌고 내일로 잇는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지녀야 되는데, 그를 위해서 저희 6월 항쟁 20년 사업추진위원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설정한 세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6월 축제가, 또 87년 20년의 축제가 우리 시민 모두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시민 모두 함께하는, 익명의 선의의 모든 분들이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두 번째는 국민의 화합과 일치, 통합을 위해서 우리가 더 힘을 모아야겠다. 각자 다른 점을 인정하고 서로 공통된 점을 찾으면서 큰 꿈을 이룩하자. 이 꿈을 이룩하면서 남북의 일치로 통일로 잇자.
이러한 두 번째 설정이고. 세 번째는 미래가치를 추구하자. 그래서 아시아에서 귀감이 되고 자랑이 되는 한국의 민주화를 우리가 표본으로 내세우면서, 특히 20년 전에 현장에서 살지 못했던 우리 후대들이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더 열정을 가진 삶을 살면서 창조적 미래를 이룩하는 미래지향적 교육사업에 저희들이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통해서 87년 6월 항쟁 20년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박인규 :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의 고통과 투쟁을 잊어선 안 된다. 정말 저희들이 마음 속에 새겨야 할 교훈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함세웅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6월 민주항쟁 20주년 특별기획'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함세웅 신부와 함께 20년 전 민주화를 갈망하던 그때의 함성과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2007년 오늘, 우리 사회에 민주화가 제대로 정착됐는지 얘기 나눴습니다. 내일은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전대협 의장을 맡았던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과 함께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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