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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그 날'을 미루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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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그 날'을 미루기로 작정했다"

[심층분석] 이미 실패한 이라크전쟁, 하지만 부시는…

다음은 영국 <인디펜던트>의 전쟁종군기자인 패트릭 콕번의 '초강대국에 타격을 입힐 것이 분명한 한 작은 전쟁(A Small War Guaranteed to Damage a Superpower)'의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패트릭 콕번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인 2003년 2월 티그리스강을 건너 바그다드에 잠입하는 등 이라크전쟁 이후 지난 4년여의 절반을 이라크에서 보내는 등 서방 언론인 중에서는 이라크 사정에 가장 정통한 기자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이라크 전쟁 보도로 지난 2005년 '마사 겔혼 전쟁보도상'을 받았고, 2006년에는 전쟁 3년간의 이라크 상황을 정리한 책 '점령: 이라크에서의 전쟁과 저항(The Occupation: War and Resistance in Iraq)을 버소(Verso)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책은 지난해 '전미 서평자그룹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 논픽션 부문 결선에까지 올랐다.

이 글은 올 가을 페이퍼백으로 출간될 이 책의 새로운 서문이다. 책이 출판된 2006년 이후의 이라크 상황이 추가된 이 글에서 패트릭 콕번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전쟁은 1950년대 프랑스의 알제리전쟁이나 80년대의 소련의 아프간침공과 마찬가지로 약소국을 침공, 점령했던 강대국에 치명적 손해를 안긴 채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내년 미 대선까지 무력에 의한 사태해결을 끝까지 고집할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 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로 미군의 이라크 철군 및 이란, 시리아 등과의 협상에 의한 사태해결이 예상되고 있는 데 대해 콕번은 이는 전적으로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미 부시는 지난 1월 10일의 연설을 통해 무력증강에 의한 사태해결을 천명했고, 이같은 미국의 의중은 바로 다음 날 행동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1월 11일 탈라바니 대통령의 공식 초청에 의해 이라크를 방문 중인 이란의 고위 관리 2명을 급습,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러한 '도발'을 통해 이란이 미국에 선공을 가해올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란의 선공을 빌미로 이란 이슬람정권을 무력으로 축출함으로써 중동지역 최대의 반미 보루이자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를 해소하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또한 지난 4월, 펜타곤은 이라크 내 미군의 복무 기간을 12개월에서 15개월로 늘린다고 발표했다. 그 대신 이라크 정부군 훈련 계획에 대한 언급은 슬그머니 빠졌다. 철군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미군 병력을 대체할 이라크 병력을 훈련하고 치안유지를 위한 장비를 갖춘다는 2005년의 계획 실행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기다. '미군 점령 장기화'를 알리는 전주곡인 셈이다.

따라서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군을 둘러싸고 현재 워싱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시행정부와 민주당 의회간의 줄다리기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콕번은 "가끔씩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이 잃을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꼬았다. 실패에 이토록 둔감할 수 있는 비결은 "미군의 점령에 대한 이라크 내부의 저항은 일부에 국한된 것이고, 이라크 인들의 진심이라기보단 이란이 부추긴 것이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프로파간다'에 부시 행정부 전체가 매몰돼 있기 때문"이었다.

부시 행정부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동안, 이라크 민중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갔다. 최근 1여년 간 시아파와 수니파 간 종파 분쟁이 격화된 것도 결국 미군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후세인 정권 아래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을 이웃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이라크 민족주의'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후세인을 제거한 데 대한 찬반이 시아파와 수니파로 갈리면서 양 세력 간 마찰점이 생겨났다. 수니파 정권의 독재 아래 20여년간 박탈감을 느껴왔던 시아파는 미군 점령에 환호했던 반면 수니파는 거칠게 항의했다.

이에 콕번은 "2003년 이후 수니파는 경찰관으로 취직하는 시아파를 보면서 시아파는 다른 공동체의 일원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란 생각을 굳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 점령 이후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적 반감과 민족적 반감이 합쳐져 치사량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라크 전쟁은 승자가 없는 전쟁으로 간주됐다. 점령이 끝나기 전까지 이라크의 안정란 기대할 수 없고 점령이 끝난다 한들 외세에 휘둘린 정치와 사회는 그 후유증을 치료하는데 한 세대는 족히 걸릴 것으로 전망됐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강함이 아니라 허약함을 노출시켰다.

콕번은 "이라크 전쟁은 1950년대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일으킨 전쟁이나 1980년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 등과 함께 '점령자들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친' 소규모 전쟁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고 선언했다.

이 글은 지난 8일 미국의 진보매체 <톰디스패치>에 실려 있으며 원문은 'A Small War Guaranteed to Damage a Superpower'에서 볼 수 있다.
▲ 콕번은 지난해 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로 미군의 이라크 철군 및 이란, 시리아 등과의 협상에 의한 사태해결이 예상됐으나 이는 전적으로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진은 올해 초 바그다드에서 수니파 저항세력을 진압하는 미군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2007년 1월 11일 새벽 3시, 미군 헬리콥터 한 편대가 이라크 북부 도시 아르빌에 오래 전부터 개설돼 있는 이란 연락사무소를 급습했다. 미군의 임무는 모하메드 자파리 이란 국가안보의회 부의장과 이란 혁명수비대의 정보 총책인 미노자하르 프로우잔다 장군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습격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두 인사 모두가 자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의 공식 초청을 받아 이라크를 방문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탈라바니 대통령과 이 두 인사들은 동부 쿠르드 지역 두칸에서 회담을 가졌고, 쿠르드 지역의 수도인 아르빌에서는 마소드 바르자니 쿠르드 차지정부 수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쿠르드 TV 뉴스에 이 만남이 방영됐을 만큼 '숨길 것이 없는' 방문이었다.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려던 대한 미국의 공격은 무위로 끝났다. 대신 아르빌에 수 년 전부터 거주해 왔던 연락사무소의 이란인 하급 관리 다섯 명이 체포됐을 뿐이다. 체포된 직원들은 이라크 외무부가 최근 영사관으로 승격시킨 연락사무소에서 여행 서류 발급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쿠르드족 지도자들은 당연히 격분했으며 미군에 대해 따져 물었다. 긴밀한 동맹관계로 여겼던 미국이 왜 쿠르드족에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라크 대통령의 요청으로 이라크를 방문한 외국의 고위급 관료들을 납치하려고 했냐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미국이 지켜주기로 약조한 이라크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로 보였다. 이로부터 석 달이 지나서야 워싱턴의 관료들은 그들이 자파리와 프로우잔다를 체포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미 국무부와 이라크 정부는 그저 '잔챙이'에 지나지 않는 연락사무소 직원 다섯 명을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체니 부통령 측은 그들을 붙잡아 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만일 이란이 이와 비슷한 모험을 감행했더라면, 예컨대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을 공식 방문한 미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을 납치하려는 시도를 했더라면 워싱턴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공격은 이라크 안팎에서 고작 며칠동안만 화제가 됐을 뿐이다. 이라크 전역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유혈충돌 소식에 묻혀버린 것이다. 미국은 당연히 자신들의 공격 목표가 이란의 고위 관리라는 점, 이들이 결국은 공격을 피해갔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부시, '점령 장기화'를 예고하다
▲ 부시 통령과 그 측근들은 적어도 2008년 차기 대선까지는 이라크 점령을 이어가기로 작정한 듯 하다. 사진은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왼쪽)과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오른쪽) ⓒ로이터=뉴시스

미군의 아르빌 습격 사건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1월 10일 미국 전역에 중계된 연설을 통해 매우 중요한 미국의 정책적 결정을 밝힌 지 몇 시간 만에, 그 연장선상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가시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라크전쟁에는 그럴싸한 터닝 포인트가 아주 여러 번 있었다. 2003년 사담 후세인의 체포, 2004년 이라크 정부로의 주권 이양, 2005년의 총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순간들은 그 중요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혹은 과소평가된 채 넘어갔다.

부시 발언의 무게가 이해되는 데에는 다소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의 연설이 있기 전 몇 달 동안 미국은 전쟁을 끝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것 같았다.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상·하원 모두의 주도권을 잃었다. 전쟁에 대한 비난 여론이 예상 외로 막대한 참패를 안긴 것이다. 곧 제임스 베이커와 리 해밀턴이 이끄는 초당파 자문기관인 이라크연구그룹(ISG)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전쟁 실패를 적시하면서 미군의 이라크 파병 규모를 줄이고 이란, 시리아 등과 협상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베이커와 해밀턴이 한 제안과는 정 반대로 나아갔다. 그는 이란과 시리아를 이라크 내 미군의 주적으로 규정했다. "이 두 정권은 테러리스트와 무장단체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이용해 이라크를 넘나들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말한 것이다. 파병 규모를 줄이라는 제안에는 바그다드 치안 작전을 위한 2만 명 추가 파병으로 답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미국은 전쟁 실패에 대한 대응으로 이라크 내의 전쟁을 확장하고 중동지역 전체 차원에서는 이란과의 대립 강도를 높인 셈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중동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면 부시는 이제 그 불안정의 정도를 심화시키려 하고 있다.

미군의 아르빌 공습은 1월 10일 부시 대통령 연설에 의한 새 이라크정책이 단지 레토릭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라크 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사태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부시의 연설은 점령이 길어질 것이란 의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정치학자인 가산 아티야 씨는 부시 연설이 끝나자마자 내게 이렇게 전했다. 미국은 지난 2월 14일 시작된, 바그다드 치안 확보를 위한 미군 증강이 일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강된 미군 병력이 계속 주둔할 것임은 명확해 보였다.

지난 4월, 펜타곤은 이라크 내 미군의 복무 기간을 12개월에서 15개월로 늘린다고 발표했다. 또한 미국 관료들은 아무도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새에 이라크 병력에 대한 훈련을 미국의 최우선 과제에서 슬그머니 빼 버렸다. 미국의 우선과제가 바뀌었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이라크 병력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보강해서 미군을 대체케 한다는 것-이를 통해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군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2005년 이래 미 군사 계획의 핵심과제였기 때문이다. 그 계획이 모두 폐기되진 않았지만 은근슬쩍 하향조정된 것이다.

새 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 보이는 얘기다. 미국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이라크를 안정화하는 데 실패해 왔다. 이제 미국 대중들이 전쟁에 대한 노골적인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부시 대통령은 승리를 위한 또 한 번의 시도를 다짐하고 나선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안팎에서 미국의 적들을 하나씩 줄여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새 전략은 적을 늘려가고만 있다.

미국은 바그다드 점령 이후 500만 명 규모의 수니파 이라크인들과 맞서 싸워 왔다. 수니파는 미국의 철군 시간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동시에 1700만 시아파 세력들과의 관계도 점차 공격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미국은 바그다드 대부분과 이라크 남부의 통제권을 놓고 메흐디 민병대와 싸움을 벌여왔다. 이 강력한 민병대는 시아파 이라크 인들로부터 광신도에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는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이끌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워싱턴은 이라크의 이웃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인 이란과도 대치 정도를 높여가고 있다.

부시 정권의 수많은 정책들이 그랬듯이 새 이라크전략도 미국의 국내 정치 목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는 '재앙을 불어오는 처방전(a recipe for disaster)'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에서 이란을 악마로 만들기는 쉽다. 4년 전 전쟁 발발 당시 사담 후세인에게 이라크와 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웠던 것처럼 이란을 몰아붙이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당시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백악관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되뇌던 <뉴욕타임스>는 이번에는 이란이 만들어 수출한 정교한 도로 매설용 폭탄 때문에 미군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기사를 1면에 거침없이 실어내고 있다. 이런 폭탄들이 이라크 내 바그다드나 바스라 지역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당황스런 발견'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무엇보다도 부시 정권은 '그 날'을 미루기로 작정했다. 적어도 이라크 내 미국의 실패를 자인해야만 하는 2008년 대통령 선거일까지는 말이다.

미군이 이라크 장악? 현실을 직시하라.
▲ 미군의 이라크 점령은 이라크 내 미군의 적들을 줄여가긴 커녕 날마다 늘여가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은 지난 4월 초,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지령에 따라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를 향해 반미 행진을 벌이고 있는 수십만의 시아파 주민들. ⓒ로이터=뉴시스

부시 연설 직후 나는 바그다드에 갔다. 나는 상황이 그렇게 나쁜 줄은 추호도 몰랐다. 운전사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꾸불꾸불한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갑자기 유턴을 해 좁은 길로 돌진했다.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경찰 특공대들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가끔 시아파 암살대가 되기도 하는 자들이었다. 티그리스 강 만곡부인 자드리야의 알 함라 호텔까지 가는 여정은 평소 때의 세 배가 더 걸렸다. 그 이후로도 나는 메흐디 민병대의 검문소를 볼 수 있었다. 총을 든 민간인들이 차 한 대로 길을 가로막고 그린 존으로 이어지는 '7·14 다리'가 보이는 곳까지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초반 3년반동안 미군 실패의 정도는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외국언론들은 미군과 이라크 정부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영토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를 절대 보도하지 않았다. 하물며 바그다드 복판에서도 그 범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올해 초, 함라 호텔 북쪽 창을 통해 티그리스 강 다른 편의 하이파 거리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소용돌이치며 솟아오른 것은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거리는 (미군이 통제하고 있는) 그린 존으로부터 북쪽으로 1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2마일 길이의 거리로 수니파가 장악하고 있다. 미국은 전쟁 초기부터 수니파를 몰아내기 위해 이라크 군과 함께 전투를 벌여왔지만 아직도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반군 세력을 쫒아내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미군 지휘관들은 이라크 상황에 진척이 있다며 미군을 따라 움직이는 언론인을 비롯해 그들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한다. 그 사례의 하나로, 나는 미국 신문에서 하이파 거리 상황에 대한 길고 낙관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이라크 거리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요지였다. 요컨대, 무장 세력의 괴수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됐고 대규모 무기 은닉처들이 발견됐으며 저항 세력의 공격의 강도는 약해지고 빈도는 낮아진 반면 이라크 정규군은 마침내 효율적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나서 미군과 그의 지역 내 동맹들이 마침내 뭔가 해 낸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기사가 쓰인 날짜를 보고 "끙"하는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2005년 3월, 거의 2년이 지난 기사였던 것이다.

가끔 미군 지휘관들은 어떤 도시나 마을을 장악하게 됐다고 진정으로 믿는 경우가 있다. 그 지역 경찰을 포함한 이라크 인들은 수니파 무장단체나 시아파 민병대의 통치 아래 있다고 말하는데도 말이다. 2007년 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미국과 이라크의 고위 관료들이 수니파 격전지인 다이알라에서 화상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신 있게 수니파 저항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때 마침 다이알라의 수도인 바쿠바의 시장실이 무장 세력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시장실을 불태운 후 시장을 납치해 달아났다. 이에 다일라 정부는 무장 세력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경찰 1500명을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내가 경찰 대장 한 명에게 해고 사실을 확인하자 그는 "넌더리가 나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단 한 명도 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시가 약속한 미군 5개 여단의 추가 파병은, 처음으로 수도 바그다드의 치안 상황에 다소 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고문을 받은 채로,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거리에 내다 버려지는 시체의 숫자가 최악의 수준이었던 2006년에 비해 줄어든 것이다. 암살대에 의한 살인은 주로 대부분이 수니파들의 소행이었고, 나머지는 메흐디 민병대나 그들과 연합한 군경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바그다드 치안 작전이 개시되기 며칠 전, 시아파 최대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는 그의 민병대원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바그다드를 떠날 것을 지시했다. 증강된 미군 병력의 정면 대치를 피하려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시아파의 공격으로 죽어 나가는 수니파 숫자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수니파 저항 세력은 여전히 시아파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계속했다. 대량 살상용 자살 폭탄은 차량에 장착돼 혼잡한 시장통을 향해 내달리기도 했다. 지난 2월 3일 채소 트럭을 가장한 테러 차량이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함께 사는 사드리야 지역으로 돌진해 135명이 죽고 305명이 다쳤다. 치안 작전이 시작되고 10주 후에도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127명이 죽고 148명이 다쳤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현장에 도착한 미군과 이라크 정부군에게 지역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절규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치안 작전을 환영했던 일반인들이 이 작전을 실패로 규정하게 된 주된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 혹은 그들 가족에게 치안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지받지 못한 점령…미국의 패인

지난 4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얻은 주요 교훈은 점령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정도가 나날이 심해져 간다는 것이다. 이는 이라크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명확히 아는 사실이지만 부시와 토니 블레어는 절대 거론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 반미 게릴라나 민병대들이 활동할 공간은 항상 충분했다. 이라크 내에서 미군의 주둔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있긴 하다. 바로 쿠르드족이다. 쿠르드 지역은 점령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지원의 부족이 미국이 이라크에서 해온 모든 정치적·군사적 행동의 운명을 정한 것이다. 외국군이 비교적 환영을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여론조사에도 이 같은 상황이 꾸준히 반영돼 있다. 지난 3년 간 매년 <ABC>, <USA 투데이>, <BBC>, <ARD> 등은 이라크 인들에 대한 종합 여론조사를 해 왔다. 2007년 3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이라크 인들의 78% 이상이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수치는 2005년 11월 65%, 2004년 2월에는 51%였다. 2004년 2월 조사에서 미군에 대한 폭력행위가 용인될 수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7년 3월 조사에선 그 수치가 51%로 증가했다. 수니파 저항세력이나 시아파 민병대에 대한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돼 있고 그래서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뿐더러 제거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후세인이 권좌에서 제거된 지 1년여 만에 정적이었던 시아파에서조차 "후세인 시절이 좋았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다. 미군 점령이 시아파와 수니파 간 종파갈등을 심화시켜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는 사이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해 연말 처형된 후세인의 묘지를 찾은 수니파 주민들. ⓒ로이터=뉴시스

계속되는 암살과 폭탄 테러는 이라크 군과 경찰에 무장 세력들이 침투해 있음을 방증한다.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유명한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2007년 4월, 이라크 의회 내 카페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그린 존 내 삼엄한 경비가 뚫린 것이다. 범인은 7,8겹이나 되는 경비망을 교묘하게 뚫었다. 지난 3월 23일에는 살람 알 주바이에 부총리가 폭탄테러로 중상을 입었다. 경호원들의 묵인 아래 접근이 가능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최근 사고에서도 이라크 치안 부대의 충성에 금이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난 3월 6일, 수니파 무장단체 '이라크 이슬람 국가'는 모술 북서쪽의 바도우시 교도소를 기습했다. 2003년 이래 최대 규모의 탈옥 사건이었다. 탈옥한 68명 중 57명이 외국인이었다. 교도소에 상주하는 교도관 수가 1200명이었고, 당시 400~500명이 근무 중이었다. 그러나 무장단체의 기습도, 죄수들의 탈옥도 막지 못했다. 미군들 중에서는 문제가 일부 '침투자' 수준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병대의 한 미군은 "아직 암살당하지 않았거나 암살의 표적이 되지 않은 이라크 관리들은 모두 무장단체에 정보를 주거나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무장단체에 연계되지 않은 이라크 관리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설명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1990년 이후부터 미국과 영국이 직면해 왔던 몇 가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일은 미국에 위협적이지 않은 후임 정권을 세우는 일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침공 후 4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후임 정권에 대한 딜레마는 풀리지 않고 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란에 대한 후세인의 전쟁에 미국이 지원을 보냈던 이유는 이라크의 시아파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숙적인 이란에 동정적인 세력이 이라크의 정권을 잡는 것을 우려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91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군을 쳐부수고 난 뒤 바그다드 진격을 중단하고 후세인정권 축출을 포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이 성공하고 난 뒤, 워싱턴은 그 당시와 다를 바 없는 곤경에 빠졌다. 선거가 열린다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지만 오랜 기간 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시아파가 이기도록 돼 있는 것이다.

검은색 터번을 두른 종교 지도자들이 바그다드의 권좌에 앉는 것은 워싱턴으로서는 악몽 같은 일이다. 테헤란과 같은 꼴 아닌가. 미국은 일단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면서 선거를 미루려고 애썼다. 그러나 시아파 최대 지도자인 아얄톨라 알리 알 시스타니의 고집으로 2005년 두 번의 선거가 열렸고 시아파 정당이 승리를 거뒀다. 시아파와 쿠르드족 연합으로 정부가 구성되자 워싱턴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수니파와 화합에 힘쓸 것을 요구했다. 시아파와 쿠르드족 지도자들도 하고자 하는 바이지만 수니파가 미군의 철군 시간표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난망한 기대일 뿐이다.

시아파의 입장에서는 미국과 영국이 선출된 이라크 정부에 치안 통제권을 넘길 의사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점증할 수밖에 없다.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들은 많다. 예를 들어 중동 지역의 모든 국가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치안의 토대는 정보기관이다. 이론상 이라크 정부는 미국 주도의 연합군 과도행정청이 2004년 설립해 둔 '이라크 국가정보원(INIS)'으로부터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INIS의 예산 체계에 괴상한 점이 있다. 예산이 이라크 재무부가 아닌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지급되는 것이다.

지난 3년간 INIS는 활동비로 30억 달러를 썼다. 이 기간 동안 INIS는 모하메드 샤흐와니 장군의 지휘 아래 움직였다. 샤흐와니는 1996년 CIA 주도로 후세인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도모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이라크 내각 회의에 참석하는 것조차 금지돼 왔었다. 한 때 이라크 국가안보회의의 일원이었던 이라크의 한 전직 장관은 내게 "우리는 CIA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정보만 얻을 수 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이라크 인들 역시 그들이 선출한 정부의 권력이 통제당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2007년 봄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라크 인들의 34%만이 이라크가 이라크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59%는 미국의 통제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 이라크 국민들조차 이라크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점령이 수니파와 시아파를 등지게 해

2006년과 2007년을 거치면서 바그다드는 서로서로 전쟁을 벌이는 10여 개의 작은 부락으로 나뉘어졌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이웃하며 살아가는 경우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테러는 유독 가스처럼 온 시내를 뒤덮었다. 세력의 수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많다. 수니파 저항 세력 단체들과 시아파 군대와 메흐디 민병대, 그리고 바드르 여단, 경찰과 경찰 특공대, 이라크 정부군과 미군까지.

어느 날 나는 오랜 친구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어제 내 의붓 사촌이 형제가 바드르 여단에 체포된 지 사흘 만에 사살됐네. 시체는 알 슐라 지역의 쓰레기더미에서 찾았어. 심한 고문 후 죽임을 당한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더군. 죽은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니네. 그저 카다미야 지역의 한 섬유 공장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을 뿐이지. 가족들은 그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네. 팔에 사마귀가 있어서 시체를 알아봤지."

수많은 이라크인 친구들이 요르단이나 시리아로 떠나기 시작했다. 비자를 얻을 수 있는 경우는 서유럽으로도 갔다. 얼마 있지 않아 내가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찾으면 주로 가는 호텔인 '포시즌즈'의 커피숍에선 항상 이라크인 서넛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택지란, 위험 속에서 일자리를 유지하며 이라크에 머무를 것이냐, 형편이 나은 곳으로 떠나는 대신 영구적인 실업자가 될 것이냐, 두 가지뿐이다.

나는 바그다드 서부의 후리야란 지역에 알 마사다니란 성을 가진 수니파 가족을 알게 됐다. 가장인 칼리드는 기차역에서 일하는 기술자였다. 그러나 그의 직장이 시아파 민병대원들의 수하로 넘어가면서 그는 일자리를 내놓으란 압력을 받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시아파 동료에게 그의 주급을 대신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방법은 시아파 민병대가 알아채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시아파 민병대가 시아파라 할지라도 수니파에게 주급을 전달하는 경우는 가차 없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일자리를 찾아 시리아로 떠나야만 했다. 그의 아내 나디아와 8살 맏이를 비롯한 4남매는 바그다드에 남았다. 그들의 집엔 나디아의 동생 사라도 함께 살고 있었다. 사라의 남편은 석유부의 건물을 지키는 경비원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협력자'로 간주돼 저항세력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2006년 12월 25일, 시아파 민병대는 이들 가족에게 살림살이를 모두 놓아둔 채 즉시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야밤에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인정 많은 버스 운전사가 이들을 태워주기 전까지 길 가에 앉아 있어야 했다. 결국 이들이 찾은 곳은 학교 안에 있는 난민촌이었다. 나디아는 "우리는 29일 동안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방에 쳐박혀 있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수업 중인 상황에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리아에서 남편이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말렸다. 그가 돌아오면 가족 중에 돈을 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디아는 그의 가족들의 삶을 망쳐놓은 종파 간 분쟁을 일으킨 것은 미국이라고 비난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같이 살고 있었다. 이라크 인들 사이에선 어떤 종파 간 차별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국이 쳐들어와 종파주의를 부추기면서 서로를 '외국인 테러리스트'로 만들어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많은 이라크 인들이 나디아처럼 종파주의를 미국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 주장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종파 간 차별은 지금 이라크 인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후세인 시절이 더 심했다. 그러나 외국군의 점령이 종파주의를 자극하고 심화시켰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이전에도 수니파들은 시아파들에게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이라크 인이라고 생각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 달랐지만 그들 사이엔 이라크 민족주의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 점령에 반대하는 수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이들에게 협조하기 시작하면서 두 세력 간의 입장이 갈렸다. 2003년 이후 수니파는 경찰관으로 취직하는 시아파를 보면서 시아파는 다른 공동체의 일원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란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종파적 반감과 민족적 반감이 합쳐져 치사량이 된 것이다.

2003년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 군사적으로 두 전쟁은 전혀 다른 전쟁이다. 이라크의 전투 규모는 1914~1918년 사이에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작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의 정치적 함의는 엄청나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뒤엎고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겠다는 생각에 쉽게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허약함을 보여줬다. 엄청나게 비싼 미국의 전쟁 기계들은 제한된 숫자의 수니파 게릴라들에게 패배했다. 워싱턴의 전쟁 개시에 호기롭게 합류해 자신들이 승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던 토니 블레어 같은 세계의 지도자들은 신용을 잃었거나 권력을 잃었다.

가끔씩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이 잃을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점령에 대한 저항은 한정적이고 국외에서 추동된 것이라는, 자신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를 너무 깊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2007년에도 부시 행정부는 이란과 거리가 먼 수니파 저항 세력이 이란으로부터 장비를 제공받고 있다는 주장에 핏대를 세우고 있다. 4년 전 이라크를 침공할 때, 사담 후세인이 알 카에다를 후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 같은 논리다. 이 '환상의 세계'에서 미국 유권자들에게는 실패가 성공으로 둔갑했으니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미국의 점령은 이라크와 중동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점령이 끝나기 전에는 안정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린 존에 갇혀 있는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인들에게는 외세에 기대 있는 꼭두각시로 비쳐지고 있다. 그들이 독립을 도모한다고 한들, 그들이 살아 온 '의존의 문화'를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다. 정부와 군의 허약함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미 이라크 전쟁은 1950년대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일으킨 전쟁이나 1980년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 등과 함께 점령자들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친 소규모 전쟁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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