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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유혈사태, '난동' 이면의 '증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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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유혈사태, '난동' 이면의 '증오의 역사'

[러시아 리포트]소련군 청동상 철거와 동서 접점의 대리전

28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벌어진 2차대전 승전과 소련 전몰자 추모기념탑 철거를 둘러싼 시위대와 경찰의 무력 대치가 이틀째 계속되고 있다.

탈린 시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격분한 시위대에 의해 차량, 버스 정류장, 건물 유리 등 주변 기물들이 파괴됐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다. 살수차는 연신 물을 뿜어대며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근접한 시위대에게는 곤봉질과 발길질이 이어졌고 머리와 손에서 피를 흘리는 시위 참여자들이 2인 1조의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이미 600여명 이상이 경찰에 연행됐으며, 수용시설이 모자라 이들 중 상당수가 탈린항 선착장에 수용됐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사망자의 신원에 관해서는 러시아 시민권자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 지는 상황은 이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직접 나서서 진정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의 사주'인가, '러시아의 과민반응'인가?
▲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소련군 동상이 철거되는 것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 ⓒ로이터=뉴시스

사건의 발단은 지난 3월 에스토니아 국회가 탈린 시내에 위치한 2차대전 기념 조형물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킨 데 있다. 그리고 지난 26일 에스토니아 정부는 '청동병사' 혹은 '해방용사'라고 불리는 조형물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 아래 묻혀 있던 2차대전 당시 전사한 소련군으로 알려진 시신들을 수습했다.

탈린시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은 이 조형물 이전에 반대하며 이를 감시하기 위한 '나치노이 다조르(야간 초병)'란 모임까지 결성했지만 경찰을 동원한 철거 작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본격적인 철수 작업이 시작되자 백색 천막으로 가린 기념물 주위로 러시아계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이는 곧 기념물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대로 변했다.

나토 및 미사일방어체제(MD) 문제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러시아는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편치 않은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에너지 수급 및 무역에 있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 정부가 강경한 대(對)러시아 정책을 밀어부치는 것은 배후에서 이를 조정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세력은 서방이라는 것이 러시아 정부가 갖고 있는 의심의 요체다.

실제로 러시아 내 시위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서방 정가나 언론이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어 러시아 정부의 이같은 의심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자극을 받은 러시아 정계는 여차하면 에스토니아와의 국교단절까지 추진할 태세다.

연방 상원의장인 세르게이 미로노프는 27일 에스토니아와의 외교관계 단절을 제안했으며 의회에서는 국교단절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친 뿌찐 청년 단체인 '나쉬(우리의)'와 국회 제1당인 '단일 러시아'당의 청년조직인 '말라다야 그바르지야(청년 근위대)'는 2차대전 시절 구 소련군 복장을 한 회원들을 앞세운 채 모스크바의 에스토니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그 증오의 기원

이번 탈린 사태의 배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잠시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간 반목의 역사에 눈을 돌려보자.

7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현 에스토니아 지역은 독일계 튜톤기사단, 모스크바 공국,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 지역에서는 드물게 아시아계 혈통으로 알려진 에스토니아인들은 비록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대규모 반란을 몇 차례나 시도할 정도로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고, 19세기 중반 이래 그들의 민족의식을 구체화했다. 러시아 제국 하에서도 독립을 추구했던 이들은 1차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와중인 1918년 2월 24일 결국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에스토니아는 다시 스딸린 치하의 소련에 병합됐다. 1939년 8월 소련은 동유럽의 분할점령을 상호 인정하며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에스토니아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해 군대를 주둔시킨 후, 이듬 해인 1940년 에스토니아를 병합했던 것이다.

비록 1941년 독일군의 진주로 소련군은 물러나게 되지만, 소련이 지배했던 1년 남짓한 시기에 1만 명에 달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이 유형에 처해진 '피빛 역사'가 남았다. 이들 중 80% 이상이 여자, 아이, 노인 등 소련이 염려했던던 반체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 3년 남짓 나찌 독일 치하에 있던 에스토니아는 1944년 소련군이 다시 진주해오면서 소련 영토로 재편입된다. 소련군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7만여 명에 달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이 서방으로 탈출했다. 1939~1945년에 걸친 나찌 독일과 소련의 공방 와중에 에스토니아 인구의 20%가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났다.

2차대전 이후 소련군의 에스토니아 진주(소련의 공식적 입장에 따르면 '해방')와 전몰자를 기념하기 위해 13인의 소련군이 묻힌 기념물을 조성하고 그 앞면에 '해방용사'라고 이름 지어 세운 것이 탈린 시내 청동상인 것이다.

물론 1990년 소련의 해체에 따라 독립한 뒤 에스토니아는 수도 탈린이 옛 한자동맹의 주요도시였다는 역사적 사실 등을 부각시키며 강력한 '서유럽 지향성'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해외로 이주했던 재력가들도 상당수 귀국하거나 재원을 조달해 과거 소련에 유린 당했던 비극적인 민족국가 건설의 열망을 이어가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해방용사'의 살신성인으로 두 나라 악연에서 해방될까?

'청동병사' 해체 문제로 표면화된 양국간의 갈등은 시간에 따라 그 골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에스토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에서는 민족주의가 반 러시아주의와 겹쳐지면서 극단적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옛 소련 몰락 후 동유럽 지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극우 파시스트 단체들이 이 지역에서도 특유의 민족주의와 결합해 세를 더해가고 있다.

문제는 라트비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나찌 친위대 출신들의 행진을 허용하고 그들에 대한 예우 개선에 착수하는 등 국가 차원의 극단적 민족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정책들은 미국과 서유럽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러시아 측의 태도도 녹록치 않아 보인다.

스딸린이 발트 3국을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저질렀던 과오는 외면하면서 "발트 3국은 서유럽의 앞잡이"라며 비난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발트 3국이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면 "리보니아 지역(발트 3국 지역에 대한 옛 명칭 – 필자 주)은 원래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다"는 주장을 하며 회피하는 것이다.

발트 3국의 입장에서 이 지역에 있는 러시아 계 주민의 인권 및 권리가 침해 받고 있다는 점만을 강조하는 러시아의 주장은 적반하장에 가깝다.

이처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 사태는 러시아와 서방이라는 두 세력이 과거에도 겨루어 왔고, 지금도 경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부딪힐 것을 보여주는 한 접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트 3국은 토착 주민과 러시아계 이주민이 서방과 러시아를 뒤에 두고 대리전을 벌이는 '또 다른 한반도'라고 규정하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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