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되는 학문, 가난한 사람이 할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B씨에 따르면, A씨는 줄곧 생활고에 시달렸다. 틈틈이 아르바이트해서 학비를 마련했고, 한 푼이라도 모으려 학사장교로 군 복무를 했다. 그러면서도 철학 공부가 좋아 대학원행을 택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A씨는 "공부가 가장 좋다"며 힘겹게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B씨는 "돈 안 되는 학문, 가난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A씨처럼 기초학문을 공부한 대학원생이 졸업 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운이 좋아 대학교수가 되지 않으면 길어진 가방끈은 오히려 이들의 목을 죄고 들어올 뿐이다. 긴 시간과 많은 돈을 들여 공부했지만 최종 관문인 교수 임용을 넘지 못하고 비참한 백수로 전락한다면? B씨는 "A의 선택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한다"고 말한다.
서울대 박사 4명 중 1명 백수…기초학문은 더 심각
그렇다면 박사 졸업 후 백수가 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서울대 통계연보 중 '졸업생 취업/진학 현황'을 보면, 지난해 기준으로 취업하지 못했거나 진로가 확인되지 않은 '미취업/미상' 항목으로 집계된 박사 졸업자 비율은 27.4%에 달했다.
이는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에서도 박사 졸업생 4명 중 1명 이상이 교직과 연구소, 기업체 등에 자리를 잡지 못해 사실상 직장이 없는 처지라는 의미다. 이 비율은 최근 10년간 통계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통계에는 졸업 후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운 공학, 경제·경영, 의·약학 계열 대학원생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실용학문 학과 정원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문학·자연과학 등 기초학문 박사 졸업생의 사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교수 임용 하나만 바라보고 20년 달린다"
결국, 인문학·자연과학 등 기초학문 전공 박사 졸업생들이 꿈꿀 수 있는 미래는 '교수'뿐이다. 모 사립대의 한국사 박사 과정 학생 C씨는 "인문대 학생들에겐 하나의 피니시 라인밖에 없다. 모두 교수 임용 하나만을 바라보고 10년에서 20년을 달린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단연 대학교수들이다. 교수 임용 권한과 추천 권한, 즉 학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대학교수들은 봉건영주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C씨는 "내가 속한 연구실에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 두 명이 더 있다"며 "교수가 휴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날이거나 명절 때가 되면, 어떤 선물을 사들고 교수를 찾아갈지를 두고 학생들끼리 신경전을 벌인다"고 말했다.
그래도 선물이면 나은 편에 속한다. 지도하는 학생에게 자신의 논문을 대필하도록 강요한 교수, 교수 임용을 약속하며 성관계를 요구하는 교수, 학생 장학금이나 연구 인건비를 갈취하는 교수, 가방·시계 등 고가의 물건을 선물할 것을 요구하는 교수 등 대학 교수의 전횡을 보도한 기사가 끊이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 (이 사진은 기사과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
국내 박사에겐 더욱 높은 교수 문턱
교수를 향한 문을 더 좁게 만드는 것은 '해외 유학파'를 극단적으로 선호하는 학계 풍토다. 심지어 국문학이나 국어학, 한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조차 미국, 일본 등으로 유학을 떠나는 실정이다.
C씨는 "교수가 나서 한국사 석사 과정생들에게 미국 유학을 추천하는 모습도 흔히 본다"며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교수 임용 경쟁에서 밀릴까 걱정돼 나도 유학을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재작년 <한국대학신문>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인문사회계 교수들의 박사 학위를 조사한 결과, 국내 박사 학위자는 20% 수준에 불과했다. 외국에서 유학한 비율이 80% 수준이라는 말이다. 반면, 일본 도쿄대 교수 가운데 해외 박사 비율은 5.2%에 불과하다.
해외 박사 출신이 교수직을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국내에서 박사를 받은 이들이 교수직을 얻을 가능성은 줄어든다. 결국 교수 임용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국내 대학원생들의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지도교수의 눈에 들기 위한 경쟁 역시 거세진다.
교수 눈밖에 나면 월 40만 원, '애제자' 되면 월 800만 원
어쨋건 분명한 것은 모두 교수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인문학·자연과학 등 기업 수요가 거의 없는 분야를 전공한 박사 가운데 상당수는 교수 임용에서 탈락해 평생 가난한 시간강사로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대학 강사 교원 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운동본부'의 김동애 교수에 따르면, 재작년 기준 시간강사의 평균 연봉은 500여만 원 수준이다. 반면, 서울 소재 주요 사립대학의 정규직 교수 평균 연봉은 1억 원을 웃돈다.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이런 차이는, 누구보다 대학원생들이 제일 잘 안다. 교수 임용에서 탈락하면 월 40만 원, 정규직 교수가 되면 월 800만 원. 이런 갈림길에서 운명을 정하는 건 지도교수다. 교수의 눈밖에 나면 월 40만 원, 극빈층의 삶이다. 교수의 '애(愛)제자'가 돼 교수 임용에 성공하면 월 800만 원, 상류층의 삶이 기다린다.
"'극과 극'의 진로, 중간지대는 없다…'지도교수에게 충성' 외엔 선택지 없어"
여기서 중간지대는 없다. 굳이 아등바등하면서까지 '월 800만 원'의 삶을 택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들을 위한 선택지는 없다는 말이다. 극빈층으로 살지 않으려면, 설령 싫어도 교수의 '애(愛)제자'가 되는 걸 목표로 삼는 수밖에 없다.
교수가 성추행, 연구비 횡령 등 범죄를 저질러도 대학원생들이 쉬쉬하는 문화는 이런 구조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비록 소수지만, 일부 교수들은 이런 구조를 악용한다. 자신의 연구실을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군림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최근 보도된 것처럼, 대학원생을 성추행한 교수를 동료 대학원생이 오히려 보호하려 드는 경우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대학원 수준 떨어질수록 교수 전횡 막기 어려운 '악순환'
더불어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이 뻔한 현실을 알면서도 대학원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 대학 철학과를 지난 8월에 졸업한 D씨는 "철학과 졸업생이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는 정말 어렵다"며 "같이 졸업한 과 동기 중에 기업에 취직한 친구들은 전부 경영학 또는 경제학 복수 전공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취업난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취업 시 학벌을 따지는 관행 때문에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수요도 있다. 과외 교습 등 아르바이트가 본업이나 다름 없는 대학원생도 있다. 이들 모두가 학문이 아닌, 다른 목적이 앞서는 경우다.
이런 경우가 늘어나면 국내 대학원의 교육 및 연구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는 '국내 박사'를 무시하고, '해외 박사'를 숭상하는 한 이유가 된다. 결국 '국내 박사'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몇 안 되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한 대학원생들의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이 과정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수들의 전횡을 제어하기란 더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기초학문 키우기 위한 사회적 노력 필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임은희 연구원은 "순수학문 대학원 졸업생들의 열악한 진로문제는 대학이나 학생들만의 노력으로는 풀 수 없다"라고 말했다.
임 연구원은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전체 학문이 발전할 수 있다"며 "순수학문 전공자를 위한 정부 차원의 일자리 양성과 학업 지원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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