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페트라스 빙햄튼대 교수(사회학)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앙숙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남미가 억만장자 38명을 '육성해 온' 과정을 통해 설명했다. 차베스를 중심으로 한 '남미 좌파 벨트'는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협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남미 출신 억만장자 77%가 포진한 멕시코와 브라질은 지역 내 신자유주의 추종의 선두 주자다. 미국 정권이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역대 멕시코와 브라질 정부의 정통성을 문제 삼지 않는 대신 이들 나라가 기존 사회민주주의를 버리고 PDD, 즉 민영화(privatization), 탈규제(de-regulation), 국유화 해제(de-nationalization)를 골자로 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결과다.
PDD의 과실은 정치권에 꾸준히 뇌물을 바치며 '끈'을 유지해 온 백만장자들에게 떨어졌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비호 아래 시장가 이하 가격으로 고수익을 내는 공기업들을 매입할 수 있었고 소위 '개혁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민영화 한 기업들 간 인수·합병의 토대가 마련됐다. 백만장자들이 '그들만의 제국'을 키워 억만장자로 뛰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도 적잖은 실익을 챙겼다.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은 웃돈 조금 더 얹어 비교적 헐값에 사들인 민영화된 기업을 굴려 지금도 높은 이윤을 얻고 있으며 세계은행과 IMF를 통해 빌려준 자금에 대한 이자수익도 쏠쏠하다.
억만장자들과 미국의 합작 사업이 번창한 나라에선 예외 없이 빈곤이 급증하고 평균 생활수준이 급락했다. PDD가 사회연대를 약화시키고 사회보호입법, 연금제도, 건강보험, 교육제도 등 '사회안전망'을 퇴행시킨 주범으로 꼽힌다.
이에 페트라스 교수는 차베스 대통령을 "억만장자들의 성장과 대중들의 빈곤을 양산해 낸 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틀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라고 규정했다.
베네수엘라 최대의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와 전기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천연가스와 오일에 대한 국가 통제권을 강화하는 등 국가적 사회주의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은 "남미와 러시아, 중국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억만장자들의 제국'을 뒷받침한 PDD 체계를 향한 심각한 도전"이기에 부시 대통령의 견제 또한 심한 것으로 풀이됐다.
다음은 페트라스 교수가 이 같은 분석을 담아 지난달 21일 미국의 진보성향 매체 <카운터펀치>에 기고한<억만장자와 세계 지배 계급의 결탁 과정: The Billionaires and How They Made It Meet the Global Ruling Class> 중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억만장자가 어떻게 결탁해 왔는지를 분석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억만장자가 1000명이 되기까지
다소간의 지식이나 기업 운영 기술, 혹은 시장에 대한 지식 등도 러시아와 남미 억만장자를 만드는 데 제 몫을 했겠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부가 축적되는 단계마다 목격 되는 정계와 재계의 고리다.
1. 초기 국가통제주의 하에서 억만장자들은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임으로써 정부 계약을 따내고 세금을 공제받고 보조금 같은 해외 경쟁자들에 대한 국가의 보호 혜택을 누렸다. 신자유주의로 이행되기 전까지 정부의 지원은 억만장자 후보자들이 억만장자로 가는 발판 역할을 했다.
2.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이들은 수익성이 높은 공공자산을 시장가 이하의 가격으로 따 내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받았다. 민영화는 '시장거래'로 포장됐지만 사실상 '정치적 거래'에 가깝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과 불투명한 인수자 선정 과정을 고려했을 때, 또 매각 금액 중 일부가 리베이트로 나갔다는 점과 민영화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의제가 됐다는 점을 감안해 내린 결론이다.
은행, 광산, 유전, 통신, 발전소, 교통시설 등이 매각되는 과정에서 부는 축적되고 개인의 부채는 국가가 인수하게 된다. 여기서 백만장자가 억만장자가 되는 발판이 마련된다. 남미에서는 이 과정이 부패의 고리를 통해서, 러시아에서는 암살과 갱들 간의 전쟁을 통해서 완성된다.
3. 세 번째 단계(현 단계)에서 억만장자들은 인수합병과 더 많은 민영화, 그리고 해외 시장 개척 등을 통해 자신들의 제국을 강화하고 확장한다. 이동전화와 통신 그리고 다른 공공재 독점과 더불어 생필품 가격이 상승은 이미 집중돼 있는 이들의 재산에 억 만 달러를 더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백만장자들은 최근 인수한 고수익의 민영화 기업을 외국 자본에 팔아 억만장자가 되기도 했다.
남미와 러시아의 백만장자들은 정통 신자유주의 정권(멕시코의 제딜로-살리나스, 브라질의 콜로르-카르도소, 러시아의 옐친)의 비호 아래 고수익 정부 자산을 획득하고 소위 '개혁주의' 정권(러시아의 푸틴, 브라질의 룰라, 멕시코의 폭스) 아래에서 그 자산을 늘려왔다.
칠레,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등 나머지 남미국가에서는 군부의 쿠데타나 사회정치적인 흐름을 파괴하고 민영화 수순을 밟은 정권이 억만장자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잡은 우파나 중도우파는 이 과정을 '열정적으로' 계승·발전시켰다.
남미와 러시아의 예에서 백만장자가 억만장자로 4배 가까운 재산 증식을 하게 되는 데에는 대대적인 민영화와 고수익 공공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국유화 해제 작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누구를 위한 富인가
지난 25년 동안 남미 극소수 엘리트가 번 돈이 1570억 달러, 해외 은행에 상환한 돈이 990억 달러, 이자, 로열티, 임대료, 돈세탁 등의 명목으로 빠져나간 돈인 1조 달러란 사실을 감안한다면 왜 남미 인구의 3분의 2는 계속해서 생활고와 경제성장 지체에 시달려야 했는지를 충분이 이해할 수 있다.
남미 억만장자들의 성장과 대중들의 빈곤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정치단체, 재계 엘리트, 학계와 언론계의 거물 등 전 방위에 걸쳐 다층적으로 연계돼 있다.
미국은 백만장자를 양산하는 경제 모델을 설계한 군부 독재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들을 후원했다.
정보와 재정을 지원해 옐친을 권좌에 올려놓고 1993년 러시아 의회 해산이나 1996년 선거 부정을 눈감아 줘서 결국 올리가르히의 성장을 뒷받침 한 것은 다름 아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백악관 경제 보좌관들, 그리고 CIA인 것이다. 1998년 미 의회 재정경제위원회 은행소위가 폭로했듯이,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미국 은행에서 수천 달러 규모의 돈세탁이 가능하도록 한 것도 미 행정부였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남미 전역에서 군부 독재의 민영화 작업을 후원하고 시민들의 저항을 억압한 것은 다름 아닌 닉슨과 키신저, 카터와 브레진스키, 레이건과 부시, 그리고 클린턴과 올브라이트였다.
그리고 미국의 지령을 받은 IMF와 세계은행은 남미 국가들과 대출 협상 전 어김없이 PDD, 즉 민영화, 탈규제, 국유화 해제를 요구했다.
미국의 경제 학풍과 이념은 소위 경제 컨설턴트 명함을 가진 다국적 기업 대리인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작동한다. 이들은 남미나 러시아에서 아이비리그 출신 경제·금융 기관 수장들과 중앙은행장들에게 PDD를 강요했다.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기업과 은행들은 신흥 남미 억만장자들과 공동사업을 벌인 대가로 수조 달러를 이자로 가져갔다.
이들 나라에서 억만장자들의 재산은 미국의 반민족적이고 반공산주의적 정책의 산물이자 부산물로 공기업을 '약탈'한 결과인 것이다.
'억만장자의 급증'='시민사회의 해체'
러시아와 남미, 그리고 중국(중국 역시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억만장자 20명을 배출했고 이들의 총 자산은 294억 달러를 넘어섰다)의 엄청난 소득격차와 신분격차를 감안한다면 이들 나라를 설명하는 데에는 '신흥 시장(emerging market)'이란 용어보다 '억만장자들의 급부상(surging billionaires)'이란 말이 적당할 것 같다. 이들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자유시장 원리가 아니라 정책을 결정하는 억만장자들의 정치권력에 있기 때문이다.
'억만장자들이 급부상'한 나라들은 빈곤이 급증하고 생활수준이 급락했다. 억만장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시민사회를 해체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연대를 약화하고 사회보호입법, 연금제도, 건강보험, 교육제도 등을 퇴행시킨다.
중앙권력을 잡으면서 과거의 정치 구호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카르도소 전 멕시코 대통령과 노조위원장 출신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억만장자를 양산하는 정책들을 발전시키는 데 팔을 걷었다. 공산주의자였던 푸틴은 올리가르히들에게 더 많은 투자 기회와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억만장자 육성에 앞장섰다.
'좌파'에서 '신자유주의의 완성자'로
남미와 러시아의 생활수준이 급락한 것은 과거 민족주의, 대중영합주의, 공산주의 정권이 만들어 놓은 경제체계의 해체와 연계됐다.
1980년과 2004년을 비교해 보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멕시코의 국민소득은 1% 가량 올랐을 뿐이다. 1996년의 러시아 GNP는 1990년과 비교했을 때 50% 가량 줄어들었고 생활수준은 80% 정도로 낮아졌다. 물론 일부 기업도둑과 경제 깡패들의 경우는 제외하고서 하는 얘기다.
이들 나라의 경제가 최근 들어(2003년부터 2007년까지) 성장한 데에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기보다는 석유와 금속, 농산품 국제가격이 이상 상승한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억만장자들의 성장이 '자유시장 경제가 낳은 번영'의 증거라는 <포브스>의 주장과 현실은 거리가 멀다.
억만장자들이 불법 점유한 고수익 공공기업은 공산정권 아래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노동자들이, 또 민족주의 정권 아래에서 남미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것들이다. 억만장자들은 상속받은 재산과 정치적 '끈'을 이용해 그들의 제국을 확장한 것이지 사업 수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남미의 억만장자들과 백악관에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은 그가 일부 억만장자들의 성장과 대중들의 빈곤을 양산해 낸 정책을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유전과 공공재를 다시 국유화 했고 부동산을 대거 몰수했다.
이는 남미 내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남미와 러시아, 중국,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억만장자들이 제국을 건설하는 주춧돌인 PDD 체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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