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수니파인 후세인 정권 아래서 40년 간 억압받았던 시아파 주민들은 '이라크로 쳐들어온' 미군에 이 같은 기대감을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후세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지난 1월, 챠이찬은 깊은 애도를 담은 추모시를 지었다. 이번 시에는 후세인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묻어났다. 챠이찬은 "후세인은 아랍세계를 구원할 '기사(Knight)'였다"며 "역사는 후세인을 자랑스레 기록할 것"이라고 노래했다.
챠이찬 시심(詩心)의 변화는 비단 개인적인 변덕의 산물이 아닌 듯 했다. <맥클래치 신문>은 지난 7일 '침공 4주년, 침공 전을 그리워하는 이라크 주민들'이란 제목의 르포 기사를 통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4년 만에 사담 후세인이 바그다드 파도스 사원을 늠름하게 지키고 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후세인 죽었으니 이라크엔 평화가 왔나?
후세인 사형 직후 부시 대통령은 <CBS> 방송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키로 한 내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비록 후세인이 갖고 있으리라 여겼던 무기를 찾지는 못했지만 후세인이 중동세계 불안정의 주요 원인이었던 점에는 변함이 없다."
부시의 발언은 바그다드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불안정의 주원인이 후세인이었다는 부시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라크 주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 대신 이라크 주민들은 지난 4년 간 계속된 혼돈상황에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매일 쏟아지는 테러 소식과 언제나 테러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 탓에 심신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무법지대가 된 세상에 시달리다 보니, 고문과 처형이 난무하긴 했지만 그나마 '법과 질서'가 존재하던 후세인의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는 주민들이 하나둘 씩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투표소에서 꿈꿨던 '자유의 날'은 언제…
수니파인 라일라 모하메드는 아이 셋을 둔 엄마이자 동네 약국의 약사다. 모하메드는 교수대에 선 후세인을 보며 "롤러코스터의 꼭대기에서 추락을 앞두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모하메드 가족은 후세인 정권이 축출된 후 열렸던 세 번의 선거(과도정부 선출, 새 헌법 제정, 자치정부 선출)에 모두 참여했다.
"투표를 하면서 이게 사람다운 삶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 의견에 정치적 힘이 실리니 말이다. 내 일생에 가장 귀한 순간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지장을 찍기 위해 잉크를 묻힌 손가락을 들고 '민주주의의 도래'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투표장에서 도장을 찍으며 그의 가족들이 희구했던 '자유의 나날'은 아직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이제 그의 아들들은 이라크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작년 연말을 기해 주민들이 거의 떠나 버린 탓에 약국 운영도 신통치 않다. 집 난방비를 댈 수 없을 정도다.
"속은 거야…."
후세인이 사형 당하던 날 모하메드는 혼잣말로 중얼댔다.
"이 대량학살을 끝낼 수 있었던 사람이 가버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석유쯤은 내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숨은 내 줄 수 없다. 우리의 목숨은 너무 비싸지 않은가."
"가족 둘을 잃었다…이유는 없다"
시아파인 아미드 알 야세리는 후세인의 몰락을 바라보며 느꼈던 희열을 기억한다. 그는 당장 위성방송 청취용 접시 안테나를 설치해 아랍어 뉴스와 해외 방송을 시청했다. 휴대 전화도 구입하고 인터넷 서비스도 신청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4년 어느 날, 쇼핑을 다녀온 야세리는 집안에서 총에 맞아 벌집이 된 형의 시체를 발견했다. 형은 후세인 군대 장교 출신이었다. 야세리는 조카들과 함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했다.
석 달 후, 이번엔 그의 삼촌이 죽었다. 휘발유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총을 맞았다. 야세리는 이번에도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가족 둘을 잃었다. 왜일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유가 없다."
요즘 야세리가 기거하는 곳은 바그다드 중심가인 만수르 주변이다. 부유한 쇼핑가였던 이곳도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가 일하는 쇼르자 시장은 수니파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들이 군침을 삼키는 표적이다. 지난 몇 주 새 벌써 폭탄을 실은 차 석 대가 시장 통으로 들어왔고 67명이 죽어나갔다.
"이제는 멀쩡한 몸으로 죽는 사람이 부러울 지경이다."
야세리는 더 이상 죽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팔 다리가 찢어진 시체로 공시소에 방치돼 있지 않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죽고 죽이는 '종파 분쟁'의 사슬
역시 시아파인 40대 가장 바랄 알리는 지난 2003년 미군이 후세인을 생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벽장에서 AK-47 소총을 꺼냈다. 마음껏 축포를 쏜 알리는 노모와 일곱 살 난 아들에게도 총을 건넸다.
"서른 발짜리 탄창 다섯 개를 갈아가며 온 가족이 축포를 올렸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외면하지 않은 신의 선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알리의 가족에게 그토록 원했던 평화는 깃들지 않았다.
성난 수니파가 시아파 집단 거주지 인근 시장이나 상점을 공격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발생했다. 곧 시아파도 민병대를 조직해 반격에 나섰다. 머리에 총을 맞은 수니파 남자들이 공시소에서 발견되기 일쑤였다.
혼란 중에 전기 사용도 어려워졌다. 처음에는 하루에 8시간 정도 전기가 들어오더니 요새는 하루에 전기 들어오는 시간을 모두 합쳐도 3시간이 되지 않는다.
물가상승도 살인적이다. 암시장에선 주방용 가스 한 통 가격이 60달러로 치솟았다. 그보다 싸게 사기 위해선 하루 종일 줄을 서야 한다. 한 달에 100달러 하던 발전기 사용료는 오르고 올라 300달러가 됐다. 급료가 오르긴 하지만 물가 속도를 따라가긴 벅차다.
그래도 알리는 후세인이 죽은 건 잘된 일이라고 여긴다.
"후세인이 잡혔을 땐 앞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비록 기대와 달리 치안은 나빠졌지만 그래도 후세인의 최후를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상이 된 죽음의 공포
시아파인 모나 알리는 '싱글 맘'이다.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세 아이들을 바라보며 저녁에도 이 아이들과 온전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지를 확신키가 어려워 우울하다. 네 살짜리 아들을 집에 두고 딸 아이 둘을 등교시키는 길에선 간혹 총알이 머리 위를 스쳐가기도 한다.
"아이들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일상이 돼 버렸다."
하루는 근처 시장 야채가게로 폭탄을 실은 차 한 대가 돌진했다. 야채를 사러 가던 모나는 한 발 앞에서 죽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흘린 피 앞에 망연해졌다. 자신의 세 아이가 고아가 되는 악몽은 더 이상 꿈만이 아니다.
"내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도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그다드는 무서운 도시가 됐다. 해가 지면 쥐처럼 숨어서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1년 전 사마라 지역의 시아파 사원이 폭파됐을 때의 비통함은 여느 때와 달랐다.
"그때 비로소 이 모든 일들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됐다. 오랫동안 고통이 계속될 것을 알았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시아파의 보복도 끝이 없었다. 더 이상 수니파와 시아파가 이웃으로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멀리하려다 보니 결국 하나둘씩 이라크를 떠났다.
후세인이 죽던 날 알리는 눈물을 흘렸다. 독재자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잃었던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이 죽었기 때문에 울었다. 그는 앞으로의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후세인 시절이 그나마 우리에겐 안전했던 때였다."
침공 4주년의 성적표…인구 8%가 난민 신세
미국의 침공 이후 이라크를 떠난 압바스 챠이찬은 다시는 이라크로 돌아오지 않았다. 챠이찬과 같은 '이라크인 디아스포라'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유엔 고등난민판무관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전쟁 이후 이라크를 떠난 난민은 200만에 달한다. 이라크 내 떠돌이가 된 주민도 170만 명가량이다.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당한 이래 최대 규모의 난민이다.
전체 인구의 8%가 난민 신세가 됐고 매달 5만 명에 가까운 이라크 주민들이 주거지를 옮기고 있다.
공시소는 시체들로 넘쳐나고 팔다리가 잘려나간 아이 때문에 부모들이 흘린 눈물도 넘쳐난다.
이라크 주민들은 지난 4년 간 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았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에 눈물을 흘릴 뿐이다. 이라크엔 자유도, 민주주의도 찾아오지 않았다. 미국의 침공이 이라크에 남긴 것은 죽음과 상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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