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요즘 대중문화는 내용물보다는 포장에만 공들인 공장생산품 같아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요즘 대중문화는 내용물보다는 포장에만 공들인 공장생산품 같아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1/25] 환갑 맞는 70년대 '청년문화'의 가수 윤형주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청바지 차림에 장발을 하고, 통기타를 둘러맨 모습! 그리고 생맥주 한잔! 바로 70년대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모습인데요. 당시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통기타 가수들이 올해 나란히 회갑을 맞습니다.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조동진.. 이들의 서정적인 기타 선율과 노래는 70년대 청년들의 정신적인 자양분이었고 무엇보다도 기존 체제의 억압에 대한 한 자유로움의 표출이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70년대 청년문화 기수 중 한 명인 트윈폴리오 윤형주씨를 초대해.. 그의 노래 인생과 70년대 청년문화를 되돌아보겠습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가수 윤형주씨입니다. 윤형주씨는 1947년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와 경희대 의대에서 수학했고 1968년 송창식씨와 함께 트윈 폴리오를 결성해 하얀 손수건, 웨딩케익, 축제의 노래 등을 발표했습니다. 70년 솔로 가수로 독립해.. 어제 내린 비, 비와 나그네, 우리들의 이야기 등 80곡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꾸준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광고음악기획사인 (주)한빛기획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올 초에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를 모셨는데 그분도 47년생이시더라구요. 소감이 어떠시냐고 했더니 '마음은 소년인데 어느 덧 환갑이네요.' 그런 말씀을 하세요. 윤형주씨는 환갑을 맞으시는 소감이 어떠신지요?

윤형주 : 저는 숫자적인 데 민감하지 않아선지 하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별로 그런 실감을 잘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인규 : 요즘은 사실 회갑연 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긴 합니다만 생신 같은 것도 그냥 지나가실 계획이신가요?

윤형주 : 아마 아내와 여행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생일 전날만 해도 아마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회가 있어서 강사로 가게 될 것 같구요. 아마 가족끼리는 모여서 식사를 하겠죠. 그런데 특별한 이벤트는 없습니다.

박인규 : 지금 한 50,60대 아주머니들 중에 트윈폴리오 팬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 걸로 아는데 혹시 올해 공연 같은 걸 기획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윤형주 : 내년이 통기타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올해에 여러 가지 큰 규모의 통기타 공연이 준비되는 걸로 아는데, 거기 아마 출연하겠지만 내년 40주년 때 기회가 주어진다면 트윈폴리오가 69년 만에 해체됐는데 트윈폴리오 공연을 한 번 하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있고, 우리 40,50대 소녀들.. 제가 볼 땐 아직도 소녀거든요. 소녀들을 위한 이벤트들은 여러 가지가 나올 것 같아요.

박인규 : 개인적인 얘깁니다만 제 처도 엄청난 팬입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나이보다는 트윈폴리오라는 팀의 나이가 내년에 만 40년이 되니까 거기에 더 의미를 두시는 모양이죠?

윤형주 : 네. 아무래도 트윈폴리오의 시작은 통기타 문화를 열었던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트윈폴리오의 의미가 통기타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박인규 : 내년을 한 번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최근에 문화를 다룬 기사를 보니까 트윈은 쌍둥이인데 폴리오는 잘 몰랐어요. 그랬더니 악보라는 뜻이라는 말도 하고 원래는 트윈폴리오가 세 명이었다...

윤형주 : 그게 뭐냐면, 지금은 음악감상실이 없어졌지만 광화문 옆 무교동 가면 '세시봉'이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거기는 정말 팝송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서 앞에 차 한 잔 놓고 몇 시간이고 팝송 듣다 가는 곳에 우리 대학생들이 출연하는 '대학생의 밤'이라는 무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만나게 된 친구가 송창식. 저도 거기 출연했다가 송창식이 저를 보게 된 것이고

박인규 : 말하자면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다가..

윤형주 : 네. 송창식이 노래하는 모습을 제가 보았고, 그래서 세 명이 만나서 시작한 이익균이라는 친구와 함께 해서 만든 것이 '트리오 세시봉'. 세시봉에서 만들어졌다. 그 중 한 명이 68년 1월 말에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할 수 없이 남게 된 팀이 두 명이었죠. 그런데 프로듀서가 너의 둘이라도 나와라 그래서 급조해서 나간 것이 둘이라는 걸 강조한다고 2절지라는 뜻의 폴리오, 그리고 쌍둥이 트윈. 그래서 트윈폴리오. 그게 이름이 돼 버렸죠.

박인규 : 송창식씨 같은 경우는 예고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윤형주 :
성악을 전공했죠. 제가 봤을 때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냐 하면, 기타를 치면서 '남 몰래 흐르는 눈물'. 그걸 기타를 치면서 부르더라구요. 저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죠. 클래식 아리아를 기타를 치면서 노래한다는 게. 그리고 제가 'lost love'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송창식이는 굉장히 충격이었대요.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있나.. 나한테 왔더라구요 같이 하자고

박인규 : 서로에게 반하신 거군요.

윤형주 : 저는 안 반했어요. 제가 안 한다고 했어요. 저는 이미 그전에 연세대학교 다닐 때 이장희하고 유종국이라는 친구하고 트리오를 해봤거든요. 그런데 어떤 때는 마음이 맞다가도 음악적인 해석이 다르고 이러다 보니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안 하겠다고 했는데 결국엔 하게 됐죠.

박인규 : 워낙 따져보면 이장희씨와 먼저 친하셨고..

윤형주 : 이장희와 원래 친구죠. 송창식은 저 때문에 이장희를 또 알게 됐고, 조동진은 저와 중학교 때 친구..

박인규 : 이전부터 다 알고 계셨군요. 트윈폴리오가 68년 2월부터 69년 말까지 22개월 동안 활동하셨는데, 그래도 히트곡이 상당히 많았죠?

윤형주 : 사실 우리 자작곡은 별로 없었고 그 당시 우리가 말하는 번안가요.. 외국 노래를 우리말로 바꿔서 한 하얀 손수건, 웨딩케익, 더욱더 사랑해, 축제의 노래, 에델바이스, 슬픈 운명 이런 노래들이 발표되면서 굉장히 사랑받았죠.

박인규 : 제가 68년도에는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리고 트윈폴리오의 노래를 들은 게 아마 고등학교 들어가서 70년대 초반인 것 같은데, 이런 말씀 여쭤보긴 그렇지만 60년대 후반, 결성 당시에도 인기가 굉장히 좋았습니까?

윤형주 : 굉장히 좋았어요. 좋았는데 그것이 요즘처럼 다양성이 없잖아요 문화가. 대중가요가 이런 가수 저런 가수가 없었으니까, 우선 그런 형태가 처음이었고 또 우리 또래가 TV나 어디 나와서 우리 감성을 만져 주는 가수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우리 세대가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마 희소성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박인규 : 하긴 스물 둘, 스물 셋 그러셨으니까..,

윤형주 : 가수가 무대에 나오면 소녀들이 소리를 지르잖아요. 처음 소릴 지른 게 저희였어요. 그 당시에는 노래만 듣고 돌아갔는데 누가 등장할 때 '아악!' 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게 트윈폴리오였어요.

박인규 : 클리프 리차드가 왔을 때가 그때인가요?

윤형주 : 그게 바로 69년, 우리가 해체되던 해에 11월 초, 10월 말에 왔었죠. 그때 영국 대사관에서 클리프 리차드와 같이 식사도 하고 그랬어요. 한국의 유명한 가수다 해서 같이 식사를 했는데..

박인규 :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OB's cabin인가요? 거기가 청년문화의 산실이라고 해서 뉴욕타임즈에 기사도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윤형주 : 69년 가을로 기억하는데, 뉴욕타임즈 기자가 한국에 아마 다른 것 때문에 취재 왔다가 거기 들러서 맥주를 한 잔 마셨나봐요. 그런데 후에 타임즈지를 보니까 south korea... 해서 거기에 쭉 글을 쓴 가운데 저희 부분이 한 15줄 정도 나간 것 때문에 온 매스미디어가 놀라서, 이게 웬일인가 해서 그게 또 기사화 됐던 적이 있어요. 저희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구요.

박인규 : 말하자면 그 사람은 한국이란 나라가 극동의 변방의 나라인 줄 알았더니, 자기네들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런 취지였군요?

윤형주 : 그렇죠. 우리가 미국의 포크송. 사이먼 앤 가펑클, 밥 딜런, 존 바에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굉장히 충격이었죠. 어떻게 이런 문화가... 벌써 여기 젊은이들이 거의 똑같이 불러내고 있는가... 그런 것에 대해서 감동받았다는 내용인 것 같아요

박인규 : 당시에는 청년문화라고 해서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가 말하자면 청년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그 당시가 군사독재정권이라고 할까요....

윤형주 : 그래서 그 당시에 우린 참 제약이 많았어요. 기성세대가 보는 우리 20대.. 그러면서 우리가 뭔가 기성세대의 잘못된 것에 대한 우리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제일 먼저 나오기 시작한 게 사실 음악, 통기타 문화를 통해서 김민기의 아침이슬, 작은 연못, 강 건너 등불, 이런 우리가 항변하는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 부르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것이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돼서 우리가 여러 가지 형태로 억압을 받기 시작하는 시대가 열린 거죠.

박인규 : 그 당시 윤형주씨께서는 가수만 하신 게 아니고 '0시의 다이얼'이라는 음악프로그램 DJ를 하셨죠?

윤형주 : 그 전까지는 가수가 방송진행을 하는 일이 없었어요. 그때 심야방송 진행자는 최동욱씨, 이종환 씨 등 대선배들이 심야방송을 꽉 쥐고 있었는데, 어떤 일로 인해서 제가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이란 프로를 맡게 됐는데, 그 프로그램이 3개월 만에 청취율 1위를 해버렸어요. 그것은, 아마 그런 기성세대.. 10년이 넘는 선배들이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아예 스튜디오에 기타를 갖다 놓고 매일 밤 라이브를 했어요. 통기타 가수들이 나오고 기존에 알려진 가수도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이용복, 이연실이라는 가수도 나왔고, 거기서 라나에로스포 같은 팀이 등장하게 된 거죠.

박인규 : 말하자면 '0시의 데이트'를 통해서 데뷔하신 건가요?

윤형주 : 그렇죠. 거기 나왔다 하면 모든 젊은이들 세계에 소개가 되는 거죠.

박인규 : 몇 년 동안이나 진행하셨습니까?

윤형주 : 저는 한 2년 정도 하고 다시 가수로 돌아갔죠.

박인규 : 2년이면 그래서 상당히, 방송을 하시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아요.

윤형주 : 그 당시 우리가 엽서를 통해서 신청곡을 받고 들려주고 전화로 대담하는 구성으로 이뤄졌는데 한 번은 암으로 죽어가는 어떤 부잣집 딸이 아버지에게, 제가 공부하다가 방송시간이 돼서 오려다가 택시를 못 잡고 하니까 힘들었다는 얘기, 지각할 뻔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아마 유언이라면서 윤형주씨한테 자동차를 하나 사 주면 좋겠다. 그게 새나라인가? 신진자동차에서 나온.. 그걸 놓고 우리 친구들이 다 모여서 한쪽은 받아야 된다, 한 쪽은 어떻게 받냐...이러고...

박인규 : 요즘의 차하고 그 당시의 차하고는 전혀 의미가 다를 텐데요..

윤형주 : 그 당시에는 교통혼잡이라는 게 없잖아요. 차 다니면 다 쳐다봤죠.

박인규 : 차가 있다면 엄청난 부자라는 의미였는데...

윤형주 : 그렇죠. 그런 거며... 또 그때 나하고 통화했던 중학교 3학년짜리 남학생이 한 20년 후엔가 비행기 안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다가 저를 보더니.... 내가 그랬대요. 이 심야에 아주 싱그러운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그랬다면서, 그 다음날 아주 스타가 됐다는 거예요. 누가 윤형주하고 통화했냐고... .또 비행기를 좋은 자리로 옮겨 주더라구요.

박인규 : 그 차는 받으셨습니까?

윤형주 : 안 받았어요.

박인규 :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예술적 감수성으로 선풍을 일으키신 건데, 보기에 따라 다르지만 예를 들면 80년대의 산울림, 90년대의 서태지 그런 사람들이 새로운 대중예술의 충격을 갖고 왔다고 애기하는데 요즘의 대중문화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 갖고 계세요? 우선 규모는 굉장히 커진 것 같던데....

윤형주 : 커졌는데 제가 우려하는 건 너무나 규모가 큰 문화의 집단. 말하자면 에이전트라든가 투자액이나 시장성도 그렇고, 그러다 보니까 가수로서의 재능의 본질을 정말 아름답게 승화시키기보다는 추세나 유행의 흐름에 따라서 어떤 시장으로 보고 막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 같은 게 우선... 산업화 되고 규모가 커진 건 좋지만, 예술의 본질에서 좀 멀어질 때가 있지 않은가 하는 거고. 그리고 노래도 메시지거든요. 대중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라고 본다면 중요한 주제가 사랑인데, 사랑의 표현이 우리 세대는 고뇌하고 기다려 주고 참아 주고 또 막 슬퍼하고 이뤄지지 못하면 안타까워하고... 그런 것보다는 쉽게 만나고 껌 씹다 단물 빠지면 뱉어버리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의 모양으로 바뀌는 것, 바꾸기도 하고 쉽게 헤어지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하고. 이런 것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우리 10대, 자라나는 세대에게 과연 메시지로서의 가요가 전해주는 가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어떻게 보면 좀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박인규 : 저희 프로그램에 지난 가을에 신중현씨도 한 번 나오셨는데, 대중예술이든 순수예술이든 간에 예술이라는 게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건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윤형주 : 어떤 패키지로 자꾸 가는 것 같아요. 안에 있는 내용물보다는 어떻게 포장했느냐, 이 사람들이 어떤 컨셉으로 가느냐, 그런 것에 오히려 묻혀버리는 거 아닌가 아는...

박인규 : 그것이 요즘 대중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의 책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일 수도 있고. 또 연예산업이라는 산업적 이익도 있을 수 있고, 어떤 게 가장 문제가 있을까요?

윤형주 : 모든 게 빨라졌어요. 모든 게 스피드, 템포가 빨라지면서..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IT산업이 발달한 것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든 걸 다운받아서 음반이 나오기도 전에 음반시장이 다 죽어버렸잖아요. 가수만 해선 안 된다 연기를 해야 된다, 개그맨으로 나가는 이런 추세는 결국 우리가 너무 급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문제.. 좀 급한 것 같아요. 또 거기다가 인스턴트 음식도 그렇지만 그저 빨리빨리, 좋으면 빨리 만족하고 그 다른 걸 기다리고 새로운 게 없나.. 모든 게 템포가 빨라진 데서 오는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인규 : 하시는 분들의 잘못인지 세태가 그런 것인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윤형주씨의 노래 한 곡을 들어보겠습니다. 최인호 작사 정성조 작곡의 '어제 내린 비' 들으시겠습니다.

(윤형주 노래 '어제 내린 비'를 듣고)

어떤 분이 평하기를 송창식씨 목소리는 흙과 바람으로 빚은 듯한 목소리, 윤형주씨 목소리를 창공의 맑은 공기 같은 미성이다.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네요. '어제 내린 비' 이 노래를 윤형주씨께서 부르셨는데 상당히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윤형주 : 1973년에 이장호씨가 '별들의 고향'으로 큰 선풍을 일으킨 후에 최인호씨가 또 다시 쓴 소설이 '어제 내린 비'였는데, 이 소설을 고등학교 친구였던 이장호 감독이 감독을 다시 하게 되죠.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였던 정성조씨가 작곡을 하게 되는데, 동기생들 세 명에 의해서 영화가 만들어진 경우죠. 이 주제음악인 '어제 내린 비'를 제가 부르게 됐는데, 인호 형하고 여관방에서 취입하기 전날 뒹굴면서 노랫말 하나하나 다듬는 거예요. 이건 노래하기 어떻고 이건 어떤가, 참 열심히 가사를 손대고 해서 발표된 게 어제 내린 비인데, 여기 보면 '사랑의 비가 내리네 두 눈을 꼭 감아도. 사랑의 비가 내리네 귀를 막아도' 사실 사랑이라는 게 눈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게 사랑인데, 이게 벌써 30년이 넘어선 곡임에도 굉장히 메시지로서 아직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사더라구요. 그래서 아마 지금도 이 노래 좋아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박인규 :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은 영화로 대박을 냈다고 하면 최소한 500만은 돼야 하는데, 그 당시에 '별들의 고향'같은 건 30만만 들어서도 신문에 크게 났어요.

윤형주 : 그때 '별들의 고향'만 50만이었죠.

박인규 : 요즘 보면 7080이라고 해서 그 세대 문화들이 하나의 트렌드라고 할까요? 나름대로 그런 걸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윤형주 : 우리가 10대 문화에 많이 밀려 있었잖아요. 1999년.... 밀레니엄 전 해에 저와 송창식, 김세환, 양희은이가 콘서트를 하면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우리들의 문화를 만나게 되는 접촉점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7080의 정서가 형성되면서 방송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이 생기고 했는데, 그것은 방송의 다양성으로 본다면 당연한, 어떻게 보면 좀 늦은 일 아닌가 싶은. 그래서 사실 40,50, 60대가 열심히 살아 왔잖아요. 그리고 유일하게 정서를 어루만져 줬던 문화가 통기타 문화라면 그분들을 위한 문화의 형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참 바람직하다고 봐요. 당연하다고 보죠.

박인규 : 작년에 저희 프로그램에 남진씨와 한 번 나오셨는데, 그 당시에는 가수협회 창립 때문에, 말하자면 가수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건 잘 돼 가고 있습니까?

윤형주 : 네 좋습니다. 1년 동안 한국가수권리찾기협의회를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 했는데 그 결과 드디어 지난 해 6월 가수협회가 창립됐고, 또 지난 가을에는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로 드디어 탄생하게 되죠. 모임은 한 400명의 가수들이 모여서 지금 열심히 권리 찾는 일을 하고 있고, 저희 가수권리찾기협의회는 법적인 지원, 행정적인 것들을 계속 공급하는.. 서로 협력관계에 있는 단체들로 가고 있죠.

박인규 : 아시는 분들은 아시지만 윤형주씨께서는 민족시인 윤동주 선생의 6촌 동생이기도 하고 아버님도 교수님이시고 해서 젊었을 때 의사공부를 더 해라. 가수를 해야겠다... 그 사이에서 갈등이 많으셨던 걸로 아는데 이미 60년을 사셨고 가수로 40년 활동해 오셨는데 후회는 없으십니까?

윤형주 : 없어요. 그런데 제가 의대를 하기 싫었던 건 아니고 사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의과대학에 들어갔는데 제가 보니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요. 의사는 한 군데 앉아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해야 되는데 어떻게 보면 방랑벽 같은 게 있어서, 지금도 1년 중 4개월, 5개월 반은 해외를 다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도대체 의대생이 노래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학자셨기 때문에 이해하실 수가 없었고. 우리 가문에 또 그런 풍각쟁이가 없다고. 또 윤동주 시인도 문학, 문학을 한 집안이었죠 저희가. 그런데 어느 날 저희가 만든 노래들이 히트하게 되면서 제가 아버지께 윤동주 시인의 새로 노래를 만들어 보겠다고.. 그 윤동주 시인의 유해를 안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조카의 유해를 안고 북간도 땅에 묻으신 분이 아버지거든요. 그리고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게 유골을 가지고 알리셨죠. 그런데 그 아버지가, 제가 작곡해서 부르겠다 하니까 가만히 한동안 대답도 안 하고 계시더니 하신 말씀이 있어요. '시도 노래다.' 아서라, 시 다칠라 이거죠. 시도 화음이 있고 리듬이 있고 음이 있다는 거예요. 억지로 자꾸 하려고 하지 마라. 그래서 한 번도 윤동주 시에 손을 댄 적이 없고 '윤동주님에게 바치는 노래'는 만들었죠.

박인규 : 오히려 다른 분들이 많이 만들었다면서요?

윤형주 : 서시만 해도 스물 몇 명이 만들었던데요, 막상 동생은 못 만들었죠.

박인규 : 친척이라는 게 오히려 불리하게 됐군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연예인 되는 게 굉장히 큰 꿈입니다. 예술을 즐긴다는 게 자기 직업과 꼭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젊은이들에게 대중예술이나 음악을 어떻게 즐기는 게 삶에 도움이 되는 건지, 그런 말씀을 마지막으로 해주시죠.

윤형주 : 우선 연예인이 되기 원한다면 그 일에 밥 먹는 시간 외에 다 빠질 수 있으면 하는 게 좋고. 연습하다가 좀 힘들다면 아예 빨리 집어치우는 게 좋다고 저는 그렇게 단언하는 편이고. 즐기는 것은 워낙 장르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기가 가야 될 길, 음악이라는 건 자기 정서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런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면 좋겠어요.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고..

박인규 :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만드실 거죠?

윤형주 : 그렇습니다.

박인규 : 저희는 내년에 혹시 트윈폴리오 40주년 공연이 열릴 수 있을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윤형주 : 결정되면 또 나오겠습니다.

박인규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가수 윤형주씨와 함께 그의 노래인생과, 70년대 청년문화에 관해 말씀 나눠봤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