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선산 말고 나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족보가 아닐까 하는데요. 특히 세계의 많은 인류학자들이 우리 족보의 연구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국내에선 족보를 푸대접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가운데 잃어버린 가계의 뿌리를 찾아주는 족보도서관을 운영하는 분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족보 도서관 김원준 관장인데요. 오늘은 김원준 관장을 초대해 한 집안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는 족보에 대한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족보 도서관 김원준 관장입니다.
김원준 관장은 1951년 경북 상주 출생으로 군대에 있을 때부터 족보도서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도서관을 세우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0여 년간 직장생활과 사업을 해오다.. 드디어 1988년 10월3일 드디어 부천에 족보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김관장은 "내 조상은 누구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 아는 건 바로 나를 아는 것"이라며 족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족보만 모아 놓은 국내 유일의 도서관. 지난 연말 국내 신문에 상당히 많이 보도됐어요. 명절 때 가족들 모이면 족보 얘기가 많이 나오는가보다 했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은 모양이죠?
김원준 : 1년에 한두 번, 추석이나 설 명절 때 되면 매스컴에서 집중조명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가족들이 모이니까 족보 얘기가 새로 거론되고 이런 거겠죠. 미처 관계를 개선해 놓지 못했다든가 이런 부분, 또 새로 족보를 만들어야 되는 입장. 이런 부부넹서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전문가들을 찾는 그런 경웁니다.
박인규 : 그러고 보니 저도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버님댁 찾아가서 선조들의 함자를 한 번씩 써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서관히 꽤 오래 전인 1988년에 만들어졌어요. 어떻게 해서 족보도서관을, 그것도 혼자 힘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하시게 된 겁니까?
김원준 :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는 꿈이 많습니다. 국회의원, 대통령, 장군... 저라고 꿈이 없었겠습니까, 그 많은 꿈을 접고 이 생각을 가진 게 24살 때입니다. 지금부터 33,34년 전이죠. 그때 어떻게 보면 이른 나이에 꿈을 확고히 굳혔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고. 그때부터 꿈을 갖게 됐는데, 우연한 계기에 족보를 보게 됐고, 혹은 우리 조상들이 배우던 책자들이 무지에 의해서.... 제가 군대생활 할 나이쯤인 24살쯤에는 문맹률이 거의 70~80%였어요. 그때는 한 동리에서 대학 가는 사람이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는데. 그러니까 자기 조상들이 배우다가 물려 놓은 책들이 도대체 무슨 책인지, 어디 소용됐던 건지 모르고 그냥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해서, 아이들은 연을 만들어서 날린다든가 제기를 만들어서 찬다든가. 어른들은 옛날에 흙벽이었으니까 도배지로 사용하고. 또 화장실에 가면 거기에 또 책이 한 권 있고. 부엌에 가면 여름 같은 경우 날이 눅눅하니까 불쏘시개로 책이 한 권 뜯겨져 나가고. 이런 걸 볼 수 있었어요. 무지해서, 전혀 알지 못하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부분 같은데 그게 그냥 막 훼손된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걸 빨리 자료를 수집해 놔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죠.
박인규 : 김관장님이 20대셨으면 7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대접을 못했군요.
김원준 : 그렇습니다. 그때 누구 말처럼 고물상들이나 골동품 수집가들에게 마구잡이로.. 고무대야나 플라스틱 제품이 나올 때
박인규 : 엿 바꿔먹고.. 경북 상주가 고향이시라니까,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했거나 그런 집안은 아니셨습니까?
김원준 : 글쎄요. 크게 벼슬을 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궤짝 속에 책물림을 한 거 보면 참 공부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크게 벼슬을 하신 건 없습니다. 5대조인가 6대조 분이 훈장 하셨다는 말씀은 있어도.
박인규 : 족보도서관에 있는 족보가 국립도서관 다음으로 많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씨가 전부 몇 개나 됩니까?
김원준 : 1985년 제가 통계를 직접 냈는데 275개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이 김씨면 그 중에서도 광산, 김해, 안동 김씨 이런 식으로 쭉 있습니다. 그래서 그 김씨는 성 중 하나로 포함되지만, 실질적으로 본관으로 치면 김씨만 약 240개 정도. 그래서 본관을 합치면 3349개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성으로 볼 게 아니라 본관으로 보면 약 3400개 정도 성씨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박인규 : 김관장님이 운영하시는 족보도서관에는 몇 개 성 몇 개 본관이 있습니까?
김원준 : 지금 우리나라 275개 성씨 중에는 족보가 없는 성씨도 있습니다. 새로 생겨난 성도 있기 때문에, 275개 중에서 120~130개 정도의 성의 족보를 보유하고 있다면 거의 웬만한 성씨는 다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고 보면 되고. 지금 한 3만권 정도 되니까 웬만한 집의 처음 시작보부터 최근자의 보까지 거의 완벽하게 갖추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족보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족보 중에서는 거의 문화재급의 귀중한 족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개해 주시죠.
김원준 :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급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제가 얼굴이 붉어지는 부분인데, 족보도서관은 100년이든 200년이 됐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료를 보자고 할 때는 그걸 보여줘야 되는 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게 진본 같으면, 300.400년 된 원본 같으면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대한민국에 한 권 정도나 두 권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보기는 진짜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습니다. 대신 저희들은 도서관이니까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하는 쪽이지, 내가 500년 된 족보를 갖고 있다 이런 건 아닙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진본보다는 자료로서 갖고 있다. 120개 성씨의 족보 약 3만 권을 혼자 소장하시고 수집하시고 운영하시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경제적인 부담이 상당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운영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김원준 : 처음 제가 그걸 시작하기 전에는 전문도서관을 지어서 참 그럴듯하게 해보겠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에 도서관 개념은 학교에나 있고 정부에서 하는 게 있고 시에서 하는 것도 극히 드물었습니다. 요새는 구 별로 도서관이 생기지만 제가 도서관을 생각했을 때는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할 정도의 사고였을 가능성이 있다 싶은데요. 진짜 그야말로 맨 손으로 시작한 겁니다. 지금은 번듯하게 60,70평 정도 장소를 확보하고 있고 자료도 3만권 정도 되고 하니까 국내외 뿐 아니라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람합니다. 그런데 생계는 거의 집사람이 유지해 가고 있고...
박인규 : 부인을 고생을 많이 시키시는 군요. 족보를 아무리 모아 놔도 활용이 안 되면 의미 없는 거 아닙니까? 어떤 분들이 족보도서관에 많이 오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원준 : 그것도 한 서너 부류로 얘기할 수 있는데요, 첫째는 한동안 분단상태였기 때문에 월남하신 분들. 6.25 혹은 일정 치하 때 본의 아니게 고향을 떠나왔던 분들이 족보개념은 생각지 못하고 단신월남해서 남쪽에서 50평생 보내신 분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통일이 되면 내 가족을 찾아야 되는데 어떻게 찾을까, 이것은 족보밖에 길이 없다고 해서 족보를 찾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쪽에 넘어와서 결혼해서 자식 보고 하니까 이북에 있는 가족과 연계를 시키자면 족보 아니고는 별 수 없으니까 상당히 많이 찾았구요. 그리고 자기 인생을 마감하는 분들.. 쉽게 얘기해서 바쁘게 생활전선에서 살다가 정년퇴직 했다든가 일손을 놓는 입장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될 게 뭐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보편적으로 나는 족보를 다시 닦아 놓고 후손들이 볼 수 있게끔 해놓고 죽는 것이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그리고 대학 교수 분들이나 석박사 논문 쓰는 학생들 중에서 인물사를 연구할 경우 찾아오고. 또 초등학생들 경우는 방학과제 속에 나의 뿌리를 알자는 부분이 있나봐요. 그래서 엄마 손 잡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구요.
박인규 : 하루 평균 몇 명이나 오십니까?
김원준 : 특수성이 있어서 일반 도서관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보통 하루에 7,8분. 팀으로 볼 땐 족보 찾으러 혼자 오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형제들, 사촌, 육촌 규합해서 오는 사람들. 보면 한 20,30명 다녀가시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이북에서 오신 분들이 잃어버린 족보를 찾는다고 하셨는데, 잃어버린 족보는 어떻게 찾는지 궁금하네요.
김원준 : 참 그것이 아이러니한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요, 우리나라 족보가 183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850년대에 만들어졌고, 192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1920년대 같으면 1910년 경술국치.. 아주 일정치하에 있던 입장이잖아요. 그런데 192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어요. 참 아이러니하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겠다고 산에 말뚝도 박고 중앙청 문도 새로 내고, 이런 식으로 할 정도로. 또 향교가 있던 자리는 완전히 폐쇄해서 다른 이름을 붙일 정도였는데 어떻게 족보는 허락했는가. 그때 많이 만들어졌다는 거죠. 그때는 분단되기 전이니까 평안북도 의주, 철산, 함경남도 함흥 쪽에서 만들어진 족보들이 그때는 조선총독부에 강제로 납본했어야 되기 때문에 그때 자료가 모여져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으로 월남하신 분들 고향을 물어서 그쪽 지역에서 발간한 족보를 볼 때 그네들이 등록돼 있다든가 올려져 있든가 하면 찾을 수 있는 조건이 되죠.
박인규 : 족보라는 게 전주 이씨,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이른바 양반들만 갖고 있는 거 아닙니까?
김원준 : 당연히 그렇죠. 어느 한 시기, 시절에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죠. 재산이 많거나 혹은 지금으로 말하면 벼슬을 한다거나 이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양반의 씨라야 족보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런 건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반이 아니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드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제가 생각하는 족보의 개념은 그게 아니다.
박인규 :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김원준 : 쉽게 얘기해서 오늘부터 내가 기록을 유지해서 내려가게 되면 200년 300년 흘렀을 때 나란 사람의 가계가 훌륭하게 전해져 내겨갈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럴지 않고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쓰러져 버리게 되면 내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거죠. 후손들이 보고 싶고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박인규 : 우리나라 성씨가 275개고 본관까지 따지면 3천개가 넘는다고 하셨는데, 그 중에서 공식적 조직적인 족보를 가진 성씨가 대략 몇 퍼센트나 됩니까?
김원준 : 예를 들어 성이 하나고 본관이 하나에 사람도 하나인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 독일 이씨인 이한우씨 같은 경우에는. 그 분은 우리나라에 와서 성을 얻고 본관도 독일로 하고. 그럼 그 양반 한 분 혹은 그 가족 정도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들이 전시가 됐다.. 예를 들어 피치 못하게 전쟁해야 될 입장이면 그런 분들이 전선에서 돌아가시게 된다. 그러면 성이 있다가도 소멸되겠죠. 그래서 성은 항시 평온한 시기에 늘어놨다가 전시나 변란이 있을 때는 줄어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275개 성씨 중에 약 200여 개가 족보가 있다고 보면 되구요. 본관별로 치면 상당히 한 1000여 개 정도의 본관이 족보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방송 들으시는 분들 중 혹시 집안에 족보가 없는 분들은 궁금해 하실 것 같은데, 족보도서관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홈페이지도 있다고 하셨는데 차제에 소개를 해주시죠.
김원준 : 부천시니까.. 경기도는 031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천은 인천을 따라서 032에요. 032 664 4707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031로 전화를 거니까, 거기가 수원 쪽인 모양인데 웬 아주머니가 피해를 많이 보시나봐요. 그래서 엊그제도 전화가 왔어요. 마침 제가 받았는데, 그럼 마음을 바꿔 보세요.. 친정 동생이 이런 걸 하고 있는데 친정동생 전화번호를 몰라서 누님에게 전화한 거다. 동생 전화번호 가르쳐 주듯 기분 좋게, 기분을 바꿔서 하게 되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겁니다 얘길 하고 끊었습니다. 그리고 홈페이지는 www.jokbo.re.kr입니다.
박인규 : 지금부터는 족보에 대해서 공부해 볼까 합니다.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본관이 생긴 게 신라말 고려초입니다. 말씀하신 중에 족보가 많이 만들어진 게 1830년대라고 하셨는데, 족보라는 게 대충 언제부터입니까? 족보도 여러 가지라고 들었는데 족보라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소개해 주시죠.
김원준 : 신라시대 중국을 내왕하면서 공부한 분들에 의해서 성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경주 김씨 시조가 김알지라면, 김알지가 처음부터 김알지가 아니라 어찌 보면 한참 후에 후손들이 조상에게 성을 붙여줬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그런 경우인데,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 족보가 태동하기 시작한 건 고려 문종조입니다. 1037년 이후부터 과거시험을 보기 시작했는데 시험을 볼 때 시험지 답안에 내 신상명세를 기록합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누구며. 그래서 나까지의 사대를 기록합니다. 그런 기록들이 남기 시작해서 족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안동 권씨입니다. 1476년에 나온 것인데, 그때 만들어진 족보 내용들은 과거 조상들이 급제하면서 남겨 놓은 조상들의 이름으로 인해서 기록들이 남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록이라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
박인규 : 안동 김씨 성화보라는 것이 가장 오래된 족보군요.
김원준 : 앞에 나온 것도 있다고 하지만 실물은 보지 못했고. 그 뒤에 1567년에 나온 문화 유씨. 유성룡 집안 족보가 있고. 그러니까 100년의 갭이 생기잖아요. 그때부터 서서히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따지고 보면 한 500년 역사 정도 됐다고 보면 됩니다. 그 와중에 지금까지는 옛날엔 식구도 얼마 안 되고 인구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때는 이름이 그냥 문화 유씨 족보, 혹은 문화 유씨 세보, 안동 권씨 족보, 안동 권씨 세보 이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인류가 늘어나고 집안이 번성하다 보니까 안동 권씨 대동보. 또 대동보를 하다 보니까 너무 광범위하다 그래서 어느 한 파만 빠져나가서 안동 권씨 추밀공 파보. 또 파보 속에서도 우리 것만 갖고 싶다.. 그러니까 가성. 누구누구네 가성. 또 가성만 갖고 있는데 나는 늘상 소지하고 다니고 싶다 이럴 경우 가첩. 이런 식으로 족보, 세보, 대동포, 파보, 가성, 가첩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박인규 : 족보에 대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이, 예전에는 양반만 갖고 있다 보니 봉건적이란 생각. 또 하나는 족보에 여자는 안 올라가니까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이라고 보시는 것 같아요.
김원준 : 그건 잘 모르는 데서 기인한 거구요. 여성들이 족보에 안 올라간다는 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제일 먼저 나왔다는 안동 권씨 족보를 보게 되면 남녀 구분 없이 똑같이 기술해 내려갔어요. 조선조 중기 이후부터 이제 남자 우선, 그리고 여자들은 시집을 가니까 뒤로 미뤘습니다. 그런데 처음 나온 족보에는 딸 먼저 생산됐을 때는 딸 이름을 먼저 기록하고. 남녀 구분 없이 나이 순서대로, 5대를 하든 6대를 기록하든 딸의 집안에 관한 내력도 기술했습니다. 그러다가 인쇄 부분이나, 아까 얘기한 인구가 늘어남으로 인해서 들어가는 경비라든가 이런 부분 때문에 축소되고 변이됐을 뿐이지, 어떤 누구를 홀대하고 누굴 천시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박인규 : 요즘 만들어지는 족보 중에는 여성분들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습니까?
김원준 : 우리가 확연히 구분해야 될 구분이, 문중 차원에서 할 때 여성들을 다 넣어줄 경우 상당히 방대한 양이 됩니다. 또 여성들이 시집을 가게 되면 집 족보에 올라가게 되잖아요. 그러면 친정과 시집 양쪽에 다 방대한 물량을 제공하는 겁니다. 여성들이 시집을 가면 시집 족보에 어르니까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그것을 생각했죠. 그러나 지금은,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이건 가계 기록이기 때문에 내 딸도 시집갔어도 족보에서 유지시켜야겠다 싶은 것이 과거의 생각과 동일하게 물려가는 입장이구요. 그리고 지금은 아들 딸 구분 않고 딸만 낳고 더 이상 안 낳는 경우. 그런 경우는 졸손되고 만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죠 이제. 딸로도 승계해서 내려갈 수 있는 조건으로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딸도 아들과 똑같이 취급합니다.
박인규 : 족보도서관을 20년 가까이 어렵사리 운영해 오셨는데,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실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계획 같은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김원준 : 이것은 범국민적 내지는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구한 5천년 역사 얘길 하고, 족보역사 천년을 얘기하고. 실질적으로는 2000년입니다. 따지고 보면 신라가 개국 때부터 족보가.. 기술이 있으니까 2000년 역사고 족보가 벌써 만들어진 것만 해도 500,600년입니다. 이런 훌륭한 역사와 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록돼야 할 이런 문화유산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당한 대접을 못 받고 있다. 미국의 예를 들면 지금 하버드 대학에는 족보학과가 설립돼서 박사를 배출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네들이 그네들 족보를 가지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것을 연구합니다. 이런 부분들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그렇습니다. 족보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우리도 빨리 어느 대학에 족보학과가 설립돼서, 그런 친구들이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면 정부 차원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서 연구는 이뤄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인규 : 우리 족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성씨가 족보를 갖게 됐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때까지 노력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원준 :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첩을 갖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박인규 :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국내 유일의 족보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원준 관장과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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