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으로 최고조에 달한 한반도의 긴장상황은 같은 달 31일 북한과 미국의 수석대표가 베이징에서 만나 6자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하면서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달 28~29일에 베이징에서 다시 만나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돌아갔고 20여 일이 지난 후 막이 오르는 회담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달 베이징 접촉 이후 보이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태도는 회담 전망을 엇갈리게 하고 있어 정부 당국자의 표현대로 "뚜껑을 열어 봐야" 알겠지만 낙관적인 결과를 예상하는 시각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美, 겉으로는 일단 '적극적'
우선 북한이 핵을 폐기했을 경우 미국이 제공할 '대가'가 과거에 비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미국이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대북 상응조치의 최대치는 △2008년까지 핵을 폐기할 경우 조지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만나 한국전쟁 종선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경제·에너지를 지원하며 △궁극적으로 북미 관계정상화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힐 차관보는 이같은 내용을 전하며 '부시 대통령의 뜻'임을 강조했다고 전해졌는데 뉴욕타임스는 6일자 기사에서 힐 차관보가 '깜짝 놀랄 보상'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궁극적인 핵폐기에 대한 보상 말고도 미국은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 등 핵폐기를 위한 4대 초기이행조치를 북한이 수용할 경우에도 '북한체제 안전보장'을 서면으로 약속할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연합뉴스>가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14일 보도했다.
미국은 6자회담 재개의 걸림돌이 됐던 대북 금융제재 문제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적으로는 실무그룹을 만들어 논의해보자고 했다는 게 전부지만 '북한과 함께 금융제재 종식 방안을 찾겠다고 약속했다'는 뉴욕타임스의 6일 보도는 조금 더 나간 것이다. '논의만 하겠다'는 공식 발표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한 '위장'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북한의 長考
베이징 북미접촉 이후 보여준 북한의 태도도 6자회담의 전망을 낙관케 한다. 지난 20여일간 북한의 공식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김계관 부상은 힐 차관보의 말을 듣고 '본국에 돌아가서 답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즉각적인 반발보다 '장고(長考)'를 택했다는 점에서 전례없는 태도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다만 북한은 6일과 7일 러시아의 유력 통신사를 통해 "한국에 배치한 미국의 핵무기를 없애지 않으면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흘림으로써 태도변화가 없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러시아 통신사에 인터뷰한 북한 관리들의 신원이 불분명했고, 그 후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이 이어지지 않았으며, 8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현재의 북미관계가 2000년 관계정상화 일보직전까지 갔던 때와 유사하다고 평한 사실 등은 북한 내부의 입장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관측을 지속하게 했다.
뉴욕타임스는 북미협상에 참석했던 한 미국 관리가 힐 차관보의 제의를 북한이 "주의깊게 경청하고 이를 꼼꼼히 분석하는 자세였으며, '미국측으로부터 그같은 얘기를 들어 기쁘다'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중국은 북한이 금융제재 해제나 에너지 지원 등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핵실험장 폐쇄나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 등 '초기이행조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관련국들에게 전달했다는 일본 NHK방송의 14일 보도는 북한의 유연한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회담 전망을 밝게 하는 이같은 근거에 앞서 회담 재개 자체만으로도 북핵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징조라는 평가도 있다. 또 미국의 제안에 대한 북한의 답변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참가국 모두가 회담의 모멘텀을 살리기 위해 연내 개최를 받아들인 것도 관련국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선(先)핵폐기'라는 난제
하지만 힐 차관보가 김 부상에게 전했다는 몇 가지 보상책이 모조리 핵폐기와 그에 앞선 초기이행조치를 대전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 즉 북한의 선제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 모든 장밋빛 청사진이 '말잔치'에 불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6자회담을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핵심 이유로, 미국이 제시한 대가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구체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위장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북핵위기가 발발한 2002년 10월부터 지금까지 4년 넘게 벌어진 북한과 미국의 공방은 핵포기와 보상·관계정상화를 누가 먼저 할 것인가로 요약된다. '우크라이나 핵폐기식 동시행동'과 '리비아식 선(先)핵폐기'로도 표현되는 이 줄다리기는 지난해 9.19공동성명에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라는 표현으로 절충됐다. 그러나 9.19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핵폐기가 먼저냐 경수로 제공이 먼저냐'하는 논란이 벌어지며 선제행동을 둘러싼 공방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핵폐기를 당연한 전제로 여기며 보상책을 운위하는 것은 '행동 대 행동' 원칙에서도 후퇴한 것으로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현실적인 협상안인지 의문이다.
일례로 북한의 체제안전에 대해 서면보장을 하겠다는 것도 북한이 이미 오래전에 거부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3년 10월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다자틀 내에서의 서면 안전보장'을 언급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 제의를 "가소롭다"고 일축했고, 그 후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던 2003년 10월 25일의 외무성 대변인 논평에서도 "동시행동원칙에 기초한 일괄타결안을 실현하는데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가 있을 때만이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불신으로 가득한 북미관계에서 동시행동 원칙은 버릴 수 없는 북한의 입장이다. 이는 핵폐기 단계로 진입하지 않은 북한에 미국이 먼저 중유를 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은 현재의 북한은 핵실험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원자로 가동중단 같은 초기이행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미국의 논리이자 희망사항일 뿐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이에 대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임원혁 박사는 13일자 <프레시안> 기고에서 "상호위협감축과 동시행동이라는 원칙에 따라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관계정상화를 일괄 타결하겠다는 입장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라며 "근거없이 낙관적인 전망을 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이 '실질적인 초기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언론플레이 가능성도 제기
북한의 핵폐기에 대해 미국이 제공하겠다는 보상책도 불분명하다. 일부 관측통들은 미국이 제안했다는 중유 제공 같은 사항은 실제로 미국이 아닌 중국이 내놓은 절충안에 들어 있는데 미국안과 절충안이 혼합돼 흘러나오기 때문에 과장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9일 복수의 미국 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힐은 김계관과의 회동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데 동의하면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임원혁 박사는 이에 대해 "북한의 원자로 가동 중단 등 실질적인 행동을 전제로 미국은 금융제재 해제 검토 등 상징적 조치만 취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같은 상황은 북핵폐기와 상황진전에 대한 미국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보상책만을 집중 조명하면서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미국이 제시한 경제·에너지 지원이나 관계정상화 방안은 이미 9.19공동성명에 다 나온 것이라는 점,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는 선핵폐기를 요구하며 9.19공동성명보다 후퇴했다는 점 때문이다. 북한이 동시행동을 요구하며 보상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미국은 북한이 '그 좋은' 인센티브를 뿌리치고 핵을 추구하고 있다고 몰아붙일 가능성도 있다.
미 행정부의 불법 금융활동 단속 총괄 책임자인 스튜어트 레비 재무차관이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보다 강력한 금융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BDA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힐 차관보도 그저 '논의해보겠다'가 전부였다.
북한의 '핵보유국' 주장, 근본적인 걸림돌 될 수도
북한이 6자회담을 핵군축회담으로 성격을 전환시킬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도 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소다.
북한이 이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전망은 핵실험 후인 지난 10월 17일 외무성 대변인이 핵보유국을 자처하며 "핵군축과 종국적인 핵무기 철폐를 추동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을 밝혔다"는 성명을 내면서부터 나왔다.
그 후 조선신보는 "다음번 6자회담이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조선(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참가하게 된다는 데 있다"고 강조했고,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10월 1일 "핵보유 이전과 이후는 상황이 다르다"면서 "앞으로 6자회담은 핵군축 회담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신보는 이어 지난 11월 8일에도 "현시기 지역에 형성된 국제관계의 구도는 '4 대 2'다"라며 "동북아시아의 리해당사자들 가운데 조,미,중,로의 4개국이 핵보유국이라는 것이야말로 엄연한 현실"이라고 핵군축회담의 구도까지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푸단 대학 한국문제연구센터 스웬화 주임은 지난 12일 중국 동방조보와의 인터뷰에서 "핵보유국이 된 북한이 이번 회담에서 몸값을 높여 새롭게 평가를 받으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의 과거 언급과 전문가들의 전망으로 미뤄볼 때 북한이 회담 초반부터 핵군축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고 그렇게 된다면 회담은 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어두운 중국 측의 전망
실질적인 회담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의장국인 중국 측에서 나오고 있는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도 주목된다.
스인훙 중국 인민대 교수는 15일자 연합뉴스 보도에서 "북한은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핵무기 포기를 원하지 않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며 "북한의 핵보유는 안보문제 및 국내정치와 많은 관련이 있다. 미국과 북한 입장의 충돌은 매우 분명하다"고 말했다.
상하이 국제문제연구소의 위잉리 박사도 "북한은 자국을 핵보유국으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이번 회담에서 '강화된 지위'를 활용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하겠지만 미국이 기본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이에 따라 북미간 쟁점이 과거보다 더욱 커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칭화대학 국제문제연구소 류장융 교수도 12일자 동방조보와의 인터뷰에서 "실질적 진전을 거두게 될 것으로 낙관하기는 힘들며, 6자회담 재개는 단지 다음번 회담을 위한 토대를 만들고 9.19공동성명의 최종적인 이행을 위한, 평탄한 길을 까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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