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 회장은 이날 오후 서울 홍은돈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6주년 기념행사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하고 핵개발이 지속된 것이 햇볕정책의 책임이라고 하는 주장은 잘못되고 정당치 못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같은 평가가 눈길을 끄는 것은 조지 케넌이 소련의 팽창주의를 힘으로 막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냉전의 설계사'로 불렸던 케넌과,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의 유물'인 한반도의 상황을 종식하기 위해 남북화해협력정책을 폈던 김 전 대통령이 유사하다는 평가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케넌은 1944년부터 4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에서 일하던 중 소련의 정책방향을 분석한 장문의 전문을 워싱턴에 보냈다. 이 전문은 1947년 7월 외교안보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실려 미국이 대소련 봉쇄정책을 채택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케넌 주장의 핵심은 미국이 소련을 봉쇄하기만 하면 소련은 내부 모순들로 결국 붕괴한다는 것이었다.
"DJ와 케넌은 모두 개념의 중요성을 믿었다"
그레그 회장이 그런 케넌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사하다고 해석한 것은 소련과 북한에 대해 '더 강한 강압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비해 '전략적'이었다는 점 때문.
그레그 회장은 △한국전쟁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같은 위기 상황에서 대소련 봉쇄는 실효성이 없고 더 강압적인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미국에 있었지만, 봉쇄는 미국의 통찰력있는 전략가들에 의해 유효성이 유지됐고 다른 정책들이 이행될 수 있는 우산을 마련해 줬다고 평가했다.
그레그 회장은 봉쇄정책이 미소간의 핵협상을 장기화시켜 결국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한 정책들이 이행될 수 있도록 했다며 결국 "1989년 소련이 붕괴했고 실제로 총 한방 쏘지 않고 냉전이 종식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햇볕정책도 남북화해라는 장기목표가 다방면으로 이행될 수 있게 만든 하나의 개념"이라며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등을 예로 든 뒤 "남북정상회담은 지금까지의 남북화해 노력에 있어 정점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이 정상회담의 장기적인 중요성은 높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0년 동안 위기관리와 혼란을 겪은 뒤 북한은 (정상회담 이후) 한국의 도움과 격려로 외부로 더 나오게 됐다'는 미 콜롬비아 대학 찰스 암스트롱 교수의 언급을 들며 "김 전 대통령과 조지 케넌은 비전을 가진 지도자로서 '개념'의 중요성을 믿는다는 특징을 공유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케넌의 '봉쇄' 개념은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했다"면서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개념은 결과적으로 한민족 모두에게 화해를 가져오는 데에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닉슨 방중 때도 초기 평가는 나빴다"
그레그 회장은 또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1972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유사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닉슨 대통령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적으로 간주됐던 중국에 방문하면서 미국의 우방이었던 대만으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고, 미국 내 신보수주의자들을 경악시키는 등 한동안 큰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닉슨의 중국 방문은 중국을 미국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그 이후 공산권 분열과 소련 견제의 토대를 만들어 베트남전 실패로 얼룩진 1970년대 미국 외교의 숨은 성취로 평가받고 있다.
그레그 회장은 "한국 일부에서는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했고, 심지어 핵개발이 지속된 것이 햇볕정책의 책임이며, 이로 인해 10월 9일 북한이 결국 핵실험을 했다고 비난"하는 등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도 닉슨 중국 방문의 초기 비판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햇볕 책임론'자들의 주장이 정당치 못하다며 "김 전 대통령은 평양의 정책 결정을 좌지우지하기는커녕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없다"면서 "핵보유국이 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평양 내부정책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은 한국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북한의 의심과 두려움"이라고 주장했다.
DJ "北·美, 종래 주장 계속 고집하기 어렵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북한 핵실험 사태 해결을 위한 북미 접촉상황과 관련해 "아직 단언하기에 이르지만 북미관계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지 않느냐 하는 느낌이 든다"며 "터널의 출구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밴 플리트'상 수락연설을 통해 "최근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며 "미국은 북한 핵포기의 반대급부에 대해서도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북핵문제의 해결"이라며 "북미가 직접 대화하고 6자회담을 통해 협력하면 북핵문제는 풀릴 것이고 한반도 평화는 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북한이 핵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중국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고, 북한이 계속 핵보유국으로 남으면 유엔과 국제사회 제재 속에 경제가 파탄돼 생존권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아울러 "미국도 대화와 협상을 거부하고 제재만으로 북한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미국은 지금 북한에 대해 군사력을 사용할 여유가 없다.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나 유엔 제재 결의안으로는 북한을 굴복시키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미국이나 북한이 종래의 주장을 계속 고집하기에는 그 효력에 한계가 있다"며 "북미가 직접 대화하고 6자회담이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햇볕정책은 큰 성공을 하고 있지만 완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동안 북미관계가 경색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햇볕정책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은 국내외 전문가들과 국민여론이 일치하는 바"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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