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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현실보다 추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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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현실보다 추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은 누구인가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20>

아랍에는 무엇이 있을까?
  
  폭도, 테러리스트, 원리주의자, 광신도, 악의 축, 이교도, 악마, 인질, 무지, 야만, 무질서, 폭력, 공포, 그리고 길바닥과 강과 사막에 널린 시체들!
  
  아마 쉽게 이런 이미지들을 그러모을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사막에는 뭐가 있지 하는 질문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사막에 있긴 뭐가 있어?
  
  당장 터져 나올 이런 반문도 아주 자연스럽다. "석유가 있지" 하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어쩐지 그 대답이 더 슬프다. 차라리 단순무식하게 "있긴 개뿔, 아무것도 없지"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고마울 정도다. 석유가 나오면 나올수록, 아랍이 어떤 고통을 당할지 빤히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거기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거나, 있다고 해도 오직 있어서 차라리 슬픈 것들만 있을까?
  
  천만에!
  
  살다보니 엊그제 다행스러운 일이 있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이 그것. 개막식을 보면서 아마 많은 이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석유가 그토록 황홀한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구나 하는 감동에 쉽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개막식을 통해 나는 그 땅에 엄연히 존재했던 많은 것들을 새삼 보게 되었다. 고대 아랍의 천문관측기기 아스트롤라베, 홍해를 가로지르는 카타르 범선의 기막힌 아름다움, 동서양 온갖 문물이 교차되던 실크로드의 풍요, 그리고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까지, 그때 아랍은 할리우드 영화나 CNN 뉴스에 나오던 그 아랍이 전혀 아니었다.
  
  이미 황홀경에 흠뻑 젖어버린 내게는 더 많은 아랍이 보였다. 한밤중 티그리스 강변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고, 낙타를 몰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으며,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막에 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는데, 주먹만한 별들이 그 꿈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영생불사를 꿈꾸며 모험을 떠난 길가메시가 보였으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바벨탑과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 바그다드,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는 고대 도시 바빌론이 대추야자 잎사귀 너머로 보였다.
  
  나는 서둘러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자 대수, 천문학, 의학, 광학, 연금술 등에서 일찍이 아랍세계가 이룩한 성과가 오늘 우리가 뽐내는 과학문명의 바탕이라는 사실도 쉽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문학은?
  
  아랍어 권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집트의 소설가 나집 마흐푸즈에 대해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가 쓴 글을 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인물이었노라 회상했다.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가족도 마찬가지여서, 아다니아의 언니 오빠들은 다투어 마흐푸즈를 읽어치웠다. 이집트로 여행가는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선물도 한결같이 마흐푸즈였을 정도. 다만 한 사람, 막내인 아다니아만 예외였다. 그녀는 서른이 다 되어서야 타지에서 겨우 마흐푸즈를 읽고서는 솟구치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아랍 친구들에게 말하고 돌아다닌 모양인데, 그들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나 역시 오래 전 마흐푸즈의 장편소설 <우리 동네 사람들>을 읽고서 큰 감동을 받은 바 있다. 내가 20세기 최고의 소설 중 한 편으로 간주하는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못지않았다. 한 마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탐욕, 배신, 우애, 도전, 사랑 등 온갖 종류의 서사가 신화적 상상력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책을 덮은 뒤에는 한동안 그 서사구조며 상상력을 통째로 베끼고 싶다는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마흐푸즈를 우리 독자들은 얼마나 알까? 그가 현실에서는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저 무수한 아랍인들의 꿈을 영원히 되살려 놓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물론 마흐푸즈로 인해서 "우주의 어머니" 카이로가 두고두고 "아랍문학의 어머니"(아다니아 쉬블리의 글, '한 소설가의 힘')로도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지만.
  
  얼마 전, 내가 속한 문학단체에서 팔레스타인 작가 사하르 칼리파(1941년생.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는 팔레스타인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장편소설 <가시선인장>(송경숙 역, 외대 출판부, 2005)이 번역되어 있으며, 2006년 11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다)를 초청했다. 미리 보도협조 공문을 보냈지만, 기자들의 반응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몇 년 전 아랍권에서 최초로 두 명의 작가를 초청했는데, 그때는 마침 김선일씨 사건이 터져 부르지 않은 기자들까지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 이번에 초청한 작가 사하르 칼리파는 문학적으로 훨씬 비중이 큰 작가인데도, 기사로서의 '가치'는 그때만 못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다행히 한 신문에서 크게 기사를 썼다. 사진까지 실어서.
  
  나는 아침 일찍 호텔 로비에서 작가에게 자랑스럽게 그 신문을 펼쳐 보였다. 작가는 물론 무척 고마워했다. 그렇지만 사진에 박힌 눈빛은 어딘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듯싶었다. 내가 묻자, 작가는 조금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게 바로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 어디서나 다 그래요. 이렇게 심술궂고, 심각하고, 어딘가 사람들을 긴장되게 만드는 얼굴을 한 사람들…."
  
  작가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지만, 내심 왜 웃는 얼굴 사진을 싣지 않았는지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작가가 지적하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작가는 세상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편견이 고스란히 그 사진에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몰랐다.
  
  이튿날, 다른 신문 기자가 기자 회견을 했다. 작가는 내내 사진에 대해 강조했다.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그런 고투(?)의 보람일까, 그 신문에는 전혀 딴 얼굴 사진이 실렸다.
  
  작가는 폭소를 터뜨리며 제 사진을 가리켰다.
  
  "어이구, 이번에는 미소가 아니라 아예 목젖이 다 드러날 정도로 웃는 사진이네!"
  
  아랍은 아직도 무수한 편견의 대상이다.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훨씬 더 심하다. 그들은 다만 검은 두건 속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비겁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아니면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맥없이 쓰러져 아무렇게나 널부러지는 시체이거나.
  
  딴 얼굴, 말하자면 우리처럼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얼굴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껏 나는 사하르 칼리파 이외에도 이미 다섯 명의 팔레스타인 작가를 만났다.
  
  자카리아 모하메드, 나는 그처럼 균형 잡힌 지식인을 쉽게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마흐무드 아부하쉬하쉬, 나는 그처럼 쾌활한 청년 시인을 만난 게 여전히 행복하다.
  
  키파 판니, 그는 늘 세상의 무게 그 자체다. 어느 누가 그처럼 진지할까.
  
  바쉬르 살라쉬, 그는 이스라엘 공산당의 당원인데, 공산당원이 그처럼 멋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다니아 쉬블리!
  
  그녀는 얼굴도 마음도 예쁘지만, 나로 하여금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깊이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탱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그녀는 다만 검문소를 오갈 때마다 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한없이 길게 늘어선 줄에서 속절없이 먼지를 뒤집어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쓴다. 그 먼지가 엄연히 살아 숨쉬는 한 인간의 하루를 얼마나 비참하게 부서뜨리는지에 대해서 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렇게 쓴다.
  
  "아홉 시가 다 되어 일기 예보도 들을 겸 라디오를 켰다. 어쩌면 해에 관한 좋은 소식이 나올지도 모른다. 탱크 이백 대가 라말라에 있는 무카타(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를 점령해, 아라파트가 그 건물 몇 층에선가 포위 공격을 받았다. 다시 부엌으로 갔다. 생각해보니 일기 예보를 못 들었다. 그러나 몇 초도 안 되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만져볼 사이도 없이 아몬드 잎이 다 떨어졌다. 이 생이 끝나기 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봄이 오면 봄이 만발한 것을 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어떻게 무슨 권리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 아다니아 쉬블리, '희미한 고요의 흔적들', 2002년. 3월 29일 일기.
  
  이스라엘이 온 팔레스타인 땅에 쌓아올리는 9미터짜리 장벽 아래, 바로 그들이 있다. 테러리스트나 시체가 아닌! 그들은 봄이 오면 다만 그 만발한 봄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바라노니 제발 "꿈이 현실보다 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 같은 글. 3월 27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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