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원로 의원들이 설파한 대북정책에 대한 '독특한 신념체계'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면서 일면 미소를 자아내게도 했다.
지난 26일의 통일부 국감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대변인'이라던 김용갑 의원의 '독무대'였다면 31일 국감에서 단연 돋보인 인물은 박희태 의원이었다. 하지만 박 의원의 신념체계는 김 의원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다. 김 의원이 고집스런 '우완 정통파'였다면, 박 의원은 구질을 파악하기 힘든 '마구(魔球)'를 던지는 기교파 투수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의원의 질의를 다 들은 김원웅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장(열린우리당 의원)은 "정부의 통일정책 목표와 방법의 문제점을 경륜을 갖고 심도있게 질의한 박 의원님께 고마운 말씀을 전한다"고 말했다. 대체 어떤 '경륜'과 '심도'가 묻어났길래 상대 당 의원으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정책이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던 박 의원
박 의원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의 입씨름 1라운드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포용정책 때리기에 몰두한 한나라당 의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한적한 오후의 국감장에서 박 의원은 "떠나는 이종석 장관의 감회를 듣고 싶다. 이 장관의 통일정책으로 가면 우리나라가 통일 되나"라고 다소 비아냥조로 입을 열었다.
- 이종석 장관 : 새로운 방법도 있겠지만 이런 길로 가면 평화를 통해 우발적 상황을 관리하면서 (통일로) 갈 수 있다고 본다.
- 박희태 의원 : 통일은 언제쯤 된다고 생각하나? 지금 같은 통일정책으로는 통일 안 된다. 포용정책인지 햇볕정책인지 6년을 하지 않았나? 그걸로 통일의 그날이 가까워졌나? 북한이 변했나? (이종석 "북한이 변했고 가까워졌다") 어떻게 변했나?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게 변한 건가? 금강산 받아주고 개성공단 만든 게 변한건가? (이종석 "그건 우리가 필요해서 한 거다") 우리가 금강산 못 가서 환장했나? 우리 경제 발전을 위해 개성공단 만드나? 정책이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
"퍼주기도 좋고 햇볕도 좋고 불볕도 좋다"
두 사람의 공방을 듣던 이들의 정신이 혼미해진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남한의 자유시장경제와 북한의 배급·통제 경제가 한 나라에 공존할 수 있냐"는 박 의원의 말에 이 장관이 "우리가 원하는 통일도 (박 의원 말대로) 북한이 개혁개방을 위해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받았다.
바로 그 순간, 박 의원은 "남북이 경제적 동질성만 확보되면 설령 정치적인 통일이 안 되도 같은 나라나 마찬가지"라며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그에 따른 대북정책을 써야 한다"고 이 장관과 사실상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장관도 이에 질세라 "그 부분이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이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어 경제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게 그거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 뒤로는 박 의원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주제는 중국과 대만의 사례로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중국과 대만은 정부끼리는 안 만난다. 그래도 작년 한 해 동안 410만 명의 대만인들이 본토를 방문했다. 87년 이후 현재까지 4000여만 명이 본토를 방문했다. 결혼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투자는 500억 불이 넘고, 87년 이후 양안 교역액은 5000억 불이 넘는다. 전화나 서신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다. 통일된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산의 고통이나 분단의 아픔이 없다. 왜 그렇게 됐나? 바로 중국의 개혁개방 때문이다.
개혁개방이 되면 각각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어도 통일된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북정책의 초점이나 목적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퍼주기도 좋고 햇볕도 좋다. 불볕도 좋다.
식량이나 비료 갖다 줘도 소용없다. 한번 먹으면 그만이다. 낚시 하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속담이 있지 않나.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라. 집단경작에서 개인경작으로 가도록 유도해라. 중국에서는 인민공사라는 집단농장의 일부를 농민 개인에게 주면서 세금으로 반을 내게 해도 생산량이 10배가 늘었다는 주장이 있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이 그래서 나왔다.
비료만 준다고 해결 안 된다. 남쪽에서 식량이 남아도는 이유는 비료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윤동기가 있어서 그런 거다. 북한에게 '중국에서 하는 개혁을 왜 안 따라 가느냐? 왜 당신들은 상해식으로 천지개벽을 안 하느냐?'고 물어라. 그걸 권유해야 진정한 통일정책이다."
박희태 의원이 통일부 차관을 찾은 이유는?
물론 연설 중간중간에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을 끼워 넣음으로써 야당 의원으로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긴 했다. "개성 열어줘서 개혁개방 됐나?" "금강산도 개방이라고 할 수 있나?" 등 주로 포용정책의 성과에 관한 추궁이었다.
그러나 이 장관이 "지금 말한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고 실제로 우리 정부가 그간 이런 것들을 내면적으로 외향적으로 추구했다. 이 단계에서는 평화와 개혁개방이 중요하다"고 추임새를 넣자 '정체성'은 간데없이 한 발 더 나아갔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안 하는 것은 정권이 무너질까 싶어 그렇다는 얘기가 많다. 그래서 개혁개방을 해도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중국 공산당도, 베트남 공산정권도 무너지지 않았다. '북한 너희들에게는 든든한 우방이 있다'고 설득해라. 동구처럼 넘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줘라. 원자탄 만든다고 정권 안 무너지는 게 아니다. 원자탄 몇천 개를 가진 소련 정권도 무너졌다."
긴 '질의'를 마무리하던 박 의원은 갑자기 신언상 통일부 차관을 찾았다. 신 차관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차관도 후임 장관에게 잘 전해주라"고 단속했다. '박희태식 포용정책'에 몰두한 나머지 이 장관이 곧 떠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 장관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박 의원 말마따나 과연 성과가 있었는지, 제대로 하긴 했는지는 따로 논할 얘기지만, 현 정부 대북정책의 기조만으로 볼 때 거의 같은 얘기를 하는 그에게 따로 토를 달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
사실 박 의원의 이같은 지론은 이날 처음 나온 건 아니다. 박 의원은 전부터 '포용정책에는 찬성하지만 방법이 틀렸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해 왔다. 따라서 이같은 박 의원의 말은 '돌출발언'보다는 '신념체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대표적으로 박 의원은 대북 송금 특검문제가 불거졌던 2003년 2월 "햇볕정책이라는 용어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대북 포용정책에는 동의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었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박 의원은 "북한을 동족으로서 우리가 평화통일을 달성해야 할 상대로서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을 우리(한나라당)도 바라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며 "북한에 왜 돈을 줬나 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왜 돈을 주는데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몰래 범죄적인 수법을 동원해서 줬느냐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용갑,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
한편 "광주는 해방구" 발언으로 지난 26일 국감을 파행으로 만들었던 김용갑 의원이 이날 국감에서는 한층 부드러워진 모습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김 의원은 통일부의 민주노동당 방북 승인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로 질의를 시작하더니 대뜸 "이종석 장관하면 햇볕정책"이라며 "그런데 아파트 삽니까. 햇볕은 잘 들어옵니까"라고 농담을 건네 회의장을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어진 질의에서도 김 의원은 특유의 독설 대신 '차분함'과 '점잖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김 의원은 "6.15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지원했다고 하는 5억 달러는 현대에서 사업권을 사면서 준 것이며 금강산에 들어간 돈도 사업을 위해 들어갔다"는 이 장관의 말에 "그건 해석의 차이"라며 통일부의 논리를 묵살하지만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 "우리사회에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던 사람이 과거에는 참 어려움이 많았지만 (요즘엔) 도리어 혜택이 많다"고 말하면서 "이런 것을 지적하면 또 색깔론이라 얘기한다. 도리어 얻어맞는다"고도 했다.
김 의원이 이처럼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자 일각에서는 지난 번 일로 한나라당 내에서 강력한 경고를 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요즘과 같은 '대공세기'에, 의원들의 '오버'와 '실수'를 경계하는 한나라당이 김 의원에게 '또 사고를 치면 출당시키겠다'는 정도의 강한 압박을 가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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