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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과 밀교 종파 신인종(神印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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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명랑과 밀교 종파 신인종(神印宗)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6〉사천왕사라는 절 (4)

문두루 비법으로 당군(唐軍)을 물리친 명랑(明郞)과 밀교 종파 신인종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신주편 '밀본최사'조의 한 구절, 의해편 '의상전교'조의 한 구절, 신주편 '명랑신인'조 전체, 기이편 '문무왕 법민'조의 일부 등으로 흩어져 실려 있다. 이 기사들을 모아보면 명랑과 신인종에 관한 스토리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 밀본 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있었다. 용궁에 들어가서 신인(神印; 범어梵語로는 '문두루'라고 한다)을 얻어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을 처음 세우고, 여러 번 이웃 나라가 침입해 온 것을 기도로 물리쳤다. (신주편 '혜통항룡'조)

'혜통항룡'조의 이 부분은 연문(衍文)으로, '명랑신인'조의 앞부분에 들어가야 할 것이 '혜통항룡'조의 뒷부분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문두루 비법 설행에서 단석(壇席)의 설치를 말해 주는 의해편 '의상전교'조의 대목으로 이어진다.

본국의 승상 김흠순(金欽純 혹은 인문仁問)·양도(良圖) 등이 당(唐)에 갇혀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은 몰래 의상을 권하여 먼저 돌아가게 하여,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의상이 이 일을 본국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의 고승 명랑에게 명하여 밀단(密壇)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기도해서 국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의해편 '의상전교'조)
▲ 관문성과 성벽의 자취. 울산광역시와 경주시 경계에 있는 관문성 유지(遺址). 동쪽 능선으로 올라간 성벽의 자취가 보인다. ⓒ프레시안

주지하다시피 문두루 비법은 관정경(灌頂經)에 근거한 밀교 주술(呪術)이다. 이 비법은 오방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는 것인데 명랑은 관정경에 따라 오방신상을 세우고 밀단을 만들어 주술로 외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렇게 위의 두 대목이 문두루 비법의 설행을 말해 주고 있다면, 신주편 '명랑신인'조는 명랑의 생애를 간략하게 전해주고 있다.

〈금광사(金光寺) 본기〉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로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 용의 청에 의해,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혹은 1,000근이라고도 한다)을 보시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 또는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 무림(戊林)의 딸 김씨이니, 곧 자장(慈藏)의 누이동생이다. 재량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 고종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이 사실은 문무왕전文武王傳에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신주편 '명랑신인'조)
▲ 원원사터의 동서 쌍탑과 석등 전경. ⓒ프레시안

나는 '명랑신인'조의 기사가, "문무왕이 명랑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당군을 물리치게 했다"고 한 후에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의 시조가 되었다(因茲爲神印宗祖)"라고 한 대목을 주목한다. 우선 '신인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이 범어(梵語)로 '문두루'라고 하는 비법(秘法)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흔히 종파 이름은 소의(所依) 경전에서 따온다든가, 종파 창시자의 이름에서 따온다든가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는 관정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비법 중 하나의 이름을 따서 쓰고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문두루 비법이 그만큼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내 귀에는 '신인종', 즉 '문두루종'이라는 이름이 어딘가 어색하게 들린다. 그리고 명랑이 신인종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도 그렇다. 앞뒤의 상황으로 보아 명랑이 신인종의 조사(祖師) 자리에 오른 것은 문무왕의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파 이름을 신인종이라고 작명한 것도 어쩌면 문무왕의 아이디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밀교의 한 종파가 왕권에 의해 탄생된 셈인데 이 경우, 종교가 정치에 예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신라 신인종의 연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신인종은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삼국통일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당(唐)과의 관계를 승리로 마무리짓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이 신인종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 데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이 신인종은 우리나라 역사의 진행에 큰 몫을 담당하였음이 틀림없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신인종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클로즈업된 특이한 불교 종파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불교가 국가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에 예속된 것을 국가불교(國家佛敎)라고 하는데 이 신인종은 그러니까 국가불교의 대표격이 되는 셈이다."
▲ 원원사터 동탑. 서면과 북면 탑신부의 사천왕상과 기단부의 12지신상이 보인다(좌), 원원사터 서탑. 서면과 북면 탑신부의 사천왕상과 기단부의 12지신상이 보인다(우). ⓒ프레시안

문명대 교수는 또, 문두루 비법의 설행을 '밀교식 대호국법회'라고 표현하면서 "명랑법사는 이 법회를 주관했던 법주였으므로 당연히 사천왕사의 창건주가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신인종이라는 종파를 정식으로 공인받았다고 생각된다."라고 했다. 문무왕이 명랑의 종파를 '신인종'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인종은 국가불교의 대표적인 지위를 얻게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점, 신인종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는 시기에, 왕권 강화 및 전제화 과정에서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일정하게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밀교 법사 명랑이 신라 왕실의 이데올로그 노릇을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명랑 이후에도 신인종이 정치적 성격을 짙게 띄고 있었던 점은 '명랑신인'조 기사의 후반부에 나오는 신인종 승려들의 활동상에서도 분명하다.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 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 대연(大緣) 등 두 고승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그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의 근본을 삼았다. 또 신라의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源寺)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네 대덕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네 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네 고승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 하겠다."

여기서 태조는 고려 왕건을 말하는데, 명랑의 법맥을 이어오던 신인종 승려 광학, 대연 등이 문두루 비법으로 해적을 진압하여 왕건을 도왔음을 가리키고 있다. '명랑신인'조는, 속설에 안혜 등 네 고승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원원사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고 있으나, 남아 있는 유물, 유적들로 볼 때 원원사는 8세기 후반 내지 9세기 초반에 세워졌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따라서 학계 일각에서는 원원사를 세운 것은 김유신 등 삼국시대 말기 신라의 원로 정치인들이 아니라 김유신 집안의 후손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 원원사터 금당터 이웃에 있는 용왕정과 그 안의 용왕상. ⓒ프레시안

원원사는 서라벌의 동남쪽 모화촌(毛火村)에 있는데 근처에 왜병을 막기 위해 쌓은 군사적 요충인 관문(關門)이 있어 사천왕사, 감은사 등과 같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세워졌던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원원사에 있는 쌍탑의 기단부에 12지신상이, 그리고 탑신부에 사천왕상들이 새겨져 있는 것도 외적 방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밖에도 원원사 터에는 금당터 이웃에 근래 세워진 '용왕전'이라는 작은 전각이 있는데, 전각 속 석조(石槽)로 물이 솟아나고 이 물은 다시 돌로 만든 수로(水路)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고 있다. 이 유구(遺構)는 원원사가 창건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용신(龍神) 신앙의 상징물로 여겨진다.

신인종의 법맥은 명랑 이후에, 안혜, 낭융 등으로 이어지다가 통일신라 말기에 광학, 대연 형제에게 이어졌다. 고려 왕건이 세워주었다는 현성사는, 이후 신인종의 본산이 되어 고려 후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의 행행(行幸)이 끊이지 않았는데 『고려사』에는 인종(仁宗) 대에서 공민왕 대에 이르기까지 69회의 행행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원종 14년 4월조에 "왕이 현성사에 거동하고 5교양종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남산궁에 도량을 설하여 적(賊)을 평정하기를 기원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성사가 여전히 호국을 위한 기도 도량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밀교 종파 신인종이 당시 불교계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명랑에서 시작된 신인종이 밀교의 문두루 비법을 동원하여 외적을 물리침으로써 왕실의 안위(安危),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정권안보에 큰 기여를 하게 되어 국가불교의 대표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전통은 안혜, 낭융을 거쳐 통일신라 말에 이르렀고 이 무렵 광학, 대연 등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해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이후, 고려 왕조에서도 신인종이 계속 맥을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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