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19 공동성명은 북핵 해결의 종합총론이자 동북아의 평화장전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내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북한과 미국이 서로를 상호존중의 대화파트너이자 협상대상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2005년 9월 15일에 미국 재무부가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자금세탁 우려기관으로 지정함으로써 이른바 대북 금융제재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BDA 사건은 미국이 북한의 근본적 체제전환을 노리면서 대북압박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지금은 9·19의 기대와 9·15의 우려가 맞부딪치면서 결국은 대북제재의 기조가 우세한 형국으로 보인다. 즉 '9·19 공동성명'이라는 문제해결의 긍정적 흐름과 '9·15 대북 금융제재'라는 부정적 흐름이 교차한 지난 일년은 협상보다 대결이 주도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9·19 일주년을 즈음해 대북제재와 대미대결이 지배적인 국면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9월 14일 열린 한미정상회담이 어느 정도 위기 완충의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미국 내에서 강화되고 있는 대북 강경드라이브를 일단 완화시키고 북핵문제를 평화적·외교적으로 해결하는 원칙을 재확인함으로써 9·19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 양국 정상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공동의 포괄적인 접근' 방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한 점은 일단 미국의 제재확대 움직임을 주저앉히고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의 여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의 기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노무현정부의 임기중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9·19와 9·15의 흐름이 부딪치는 형국에서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대북제재보다 대화재개의 가능성을 시간적으로 벌어놓은 것은 사실이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는 북의 6자회담 복귀 의사가 있다면 그 전이라도 북미 양자회담이 가능하고 힐 차관보의 방북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유연한 입장을 보였고, 힐 차관보 역시 북이 회담 복귀 의사를 보이면 금융제재 종결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이 일단은 북한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정부가 나서 북한을 적극 설득하고 그 결과로 북이 6자회담 복귀를 결심하게 된다면 북미협상의 장이 서게 된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일단 확보한 한국 주도의 노력이 과연 북한의 회담 복귀라는 의미있는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최소한 북이 6자회담 복귀를 표명해야 어렵게 마련한 대화 노력의 불씨가 살아날 수 있다. 미국이 북에 공을 넘긴 상황에서 북의 완강한 회담 거부가 지속된다면 결국은 대북제재와 대미대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북을 설득하는 일에 한국정부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할 필요가 없다. 지금 북으로부터 회담복귀 의사표명을 얻지 못하면 향후 한반도 정세는 미국이 주도하고 북한이 저항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한국은 마지막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북한의 회담복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정부는 제2의 6·17 면담과 중대제안을 고안해내야 한다. 2005년 상반기 제4차 6자회담이 장기 소강 국면일 때 한국이 나서서 북·미를 회담장으로 끌어낸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특사로 북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6·17 면담을 갖고 그 자리에서 북의 회담복귀 의사표명을 얻어냄으로써 6자회담 복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른바 '중대제안'을 내세워 미국과 북한을 동시에 설득해내는 묘안을 찾아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제2의 6·17 면담을 추진하고 또 한번의 중대제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단된 남북 당국간 대화가 복원되어야 한다. 북핵 해결의 '출구'가 보여야 남북관계가 복원된다는 식의 소극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북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기 위한 우리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쌀과 경공업 원자재 지원 등 북이 절실히 원하는 것을 남측이 선조치함으로써 북을 대화복귀로 유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당국간 대화재개의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2의 6·17 면담을 위한 특사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이종석 통일부장관은 주저하지 말고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야 한다.
면담 추진과 함께 한국정부는 제2의 중대제안을 고안해야 하는 바, 지금 회담 재개의 최대난제인 BDA 문제를 푸는 묘책이 바로 '중대제안'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불법계좌와 합법계좌를 구별하는 이중접근이 하나의 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 즉 북한의 불법활동과 명백히 연관된 계좌에 대해서는 엄정한 제재를 가하되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계좌는 허용함으로써 미국의 입장도 살리고 북한의 체면도 세워주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특히 지난 3월 워싱턴을 방문한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이 미국 내에 북한의 계좌를 개설하자는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다.
'9·19'와 '9·15'가 상충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한미정상회담이 만들어놓은 '9·19 복원'의 기회를 한국정부는 온힘을 다해 성공시켜야 한다. 여기서는 국내 보수진영의 비판이나 국내 정치세력의 정쟁으로부터도 초연해야 한다. 미사일 발사실험으로 중단된 당국간 남북관계를 시급히 복원하고 이를 통해 제2의 특사방문과 6·17 면담을 성사시켜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북한과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BDA 관련 '중대제안'을 고안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그때보다 상황이 더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뒷짐만 지고 있기엔 너무 긴박하다. 정말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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