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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지루한 것에 관한 가장 멋진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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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지루한 것에 관한 가장 멋진 농담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10> 장벽 앞에서

당신의 글은 어렵고 촘촘하고 막막합니다. 당신은 나를 아주 좁은 길로 안내합니다. 마치 검은 장막 위에 탁구공만한 환등을 쏘아 그 작은 원형으로만 세상을 비춰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어떤 작가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따라,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동그란 발뒤꿈치를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발은 비행기 통로를 지나 입국 심사대 앞에 멈춥니다. 방문 목적을 묻는 질문에 당신은 잠시 침묵합니다. "가족 방문?"이라는 물음에 "네"라고 대답한 후에야 당신의 발은 심사대를 통과합니다. 추운 대기실을 통과하면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지루한 생각을 하면 보안요원들을 속일 수 있을 거야.' 아주 지루한 생각은 어떤 생각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생각은 어떤 생각일까요? 당신은 일층 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보통은 아홉 개가 세 줄로 걸려 있는데, 첫 줄은 휴지를 다 써서 비어 있고, 두 번째 줄 첫 번째 화장지는 풀려서 늘어져 있다'고.
  
  마지막 자동문이 열리고 당신의 발은 위험 지역을 벗어납니다. 당신의 가방을 실은 택시가 달립니다. 산들, 집들, 길들. 그리고 길을 좌우로 나누는 시멘트벽들. 나는 당신이 내 귀에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저걸 봐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게 저기 있어요. 일층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와는 비교도 안 되죠."
  
  정말이지 회색 벽들은 끔찍하게 길고 지루합니다. 벽들은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벽들은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거리를 변덕스럽게 절단합니다. 누구나 목적지는 다르지만 발이 멈추는 곳은 같습니다. 회색 벽들 사이에 썩은 이빨처럼 박힌 크고 작은 검문소들.
  
  당신의 발이 택시에서 내려 다른 택시로 바꿔 타고 다시 내리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 정류장을 세우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한반도의 길이보다도 더 긴 시멘트벽을 쌓고 그 사이에 촘촘한 검문소를 박는 일에 비하면.
  
  드디어 당신의 발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당신의 주먹이 딱딱한 나무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이 열리고 당신의 발이 문지방을 넘어갑니다. 발들의 만남, 발들의 반가운 춤.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올리브기름이 듬뿍 든 음식 냄새가 풍기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나도 덩달아 기뻐집니다.
  
  밤이 왔지만 당신은 쉽사리 잠들지 못합니다. 오렌지는 온통 점이 찍혀 초록빛으로 썩어가고, 발가락이 절단된 절름발이 비둘기들이 철조망에 내려앉습니다. 누가 악몽 없이 잠들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메마르고 썩어버릴 때까지 봉쇄되도록 명령받은 그 폐허에서.
  
  당신의 발뒤꿈치를 따라 여러 번 여행한 후에야 나는 알았습니다.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작가가 있다는 것을. 이런 식의 낯선 초대장이 필요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의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시선은 다리를 다친 절름발이 비둘기의 시선이며, 어머니 나무에 매달려 썩어가는 오렌지 열매의 시선입니다. 차가운 다락방에 버려진 어린 소녀의 시선이며,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는 소년 죄수의 시선입니다. 따뜻한 보호 대신 차가운 장벽을, 자유와 순환 대신 감금과 유폐를, 강물 같은 마음 대신 녹슨 쇠못을 심장에 박도록 강요당한 시선입니다.
  
  당신은 글의 말미에서 희망이란 단어를 말합니다. 아니, 당신은 '날아가다'라는 제목에서부터 희망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직도 나는 탁구공보다 작은 당신의 희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 친구들과 가족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멋진 농담만은 믿습니다. 바쉬르 샬라쉬가 알려주었지요. '그들'이 높고 튼튼한 잿빛 장벽으로 팔레스타인을 둘러친 진짜 이유는 "우리더러 날아보라고!" 그런 거였다고.
  
  나는 꿈꿉니다. 검문소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당신의 동그란 발뒤꿈치가 알이 깨지듯 찬찬히 금이 가고 마침내 그곳에서 어린 새처럼 작고 힘찬 날갯죽지가 돋아나기를. 내가 고개를 들면 미처 '그들'이 지붕까지 만들어 덮지 못해 환히 열린 하늘 위로 당신이 힘차게 날아가고 있기를.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쓸모없고 재활용조차 하기 싫은 회색 시멘트 장벽 위를 날며 당신이 내게 별처럼 멋진 농담을 뿌려주기를.
  
  "아무래도 재활용을 하는 게 좋겠어요. 암벽 등반 연습용 벽은 어떨까요? 검문소는 매점으로 바꾸고요. 아마 세상에게 가장 긴 연습용 등반 벽이 되겠죠. 전 세계 암벽 등반 동호인들이 몰려와 이 장벽을 오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정말 장관일 거예요."
  
  그래요. 그날이 오면 '그들'도 자신들이 그토록 높고 튼튼한 회색 장벽을 쌓은 진짜 이유를 알게 되겠죠. "우리도 기어오르려고!" 그런 거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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