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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공동성명은 이후락의 개인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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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7.4 남북공동성명은 이후락의 개인플레이"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9/14] 김성진 전 문화공보부 장관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은 존경과 가장 많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오가며 그에 대한 재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1970년대 청와대 대변인과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내며 박 전대통령을 10년 가까이 보좌해온 김성진 전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기록한 책 <박정희를 말하다>를 펴냈습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김성진 전 장관을 초대합니다. 이제는 감정을 털어버리고, 이성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평가할 때라고 주장하는 김성진 전 장관.

그가 바라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박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김성진 전 문화공보부장관입니다.

김성진 전 장관은 1931년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해방 직후인 1947년 17세 나이에 38선을 넘어 서울로 건너왔고
서울중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육군대위로 제대했습니다.

그 후 한국일보과 동양통신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 때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를 현지에서 취재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동양통신 정치부장과 편집부국장을 거쳐 청와대 대변인, 문화공보부장관 등을 지내며 9년 넘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박정희를 말하다'라는 책이 나온지 보름쯤 된 것 같은데 책은 많이 나가고 있습니까?

김성진 : 잘 모르겠습니다. 요새 시비가 많았기 때문에 관심도 있었던 걸로 아고 있습니다.

박인규 : 70년부터 79년까지 곁에 게신 분의 기록이라 언론에서도 상당히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우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지 27년이 됐는데 지금와서 이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성진 : 특별한 이유는 없고. 이제 세월이 흐르다 보니 감정의 요소가 많이 여과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이제는 박정희라는 한 지도자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평가할 만한 시기가 되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을 해봤고. 또 더구나 사람은 현재 상황이 좀 불만족스럽다든가 위기의식을 느낄 때는 내가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돌이켜 보려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바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는 습성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과연 어떤 분이었던가를 나 나름대로 돌이켜 보고 싶었던 거죠.

박인규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역대 한국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항상 1등으로 평가되고, 일반적으로 산업화에는 큰 공을 남겼지만 민주화에는 흠결이 있었다는 게 일반적 평가거든요. 1970년 공보비서관으로 들어가셔서 79년 10.26때까지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셨는데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과 곁에서 보신 분과는 차이가 좀 있을 것 같아요.

김성진 :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는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잡한 구조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근대화 과정이 아직까지도 마무리 돼 있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전부 다르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박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이고 어떤 사람은 긍정적이고. 그건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다수였는가를 본다면 지금까지 각 여론기관과 언론기관에서 보도한 국민여론조사를 볼 때 가장 일을 많이 했고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꼽힌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거든요. 그러니까 국민의 절대 다수는 역시 박대통령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갖게 됐죠.

박인규 : 책 내용 중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몇 가지를 쓰신 것 같습니다. 그 중에 질문 드리고 싶은 건, 79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정이 저희로선 충격적이었고. 글 중에 아마 박 전 대통령은 83년도쯤이면 본인이 하야하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근거있는 말씀이십니까?

김성진 : 나로서는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썼죠. 첫째, 개인적 관계에서 근거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 박대통령이 나한테 이런 말씀을 했어요.'내가 앞으로 초야로 돌아가서 자서전을 쓸 경우가 있다면 임자가 나한테 와서 나를 도와주겠느냐.'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으시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서슴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데로 화제를 돌렸어요. 그 일을 겪고 난 다음에 나는, 아차 내가 실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아첨을 하면서 좀 더 오래 계시면서 나라를 다스리셔야죠. 이렇게 얘기해야만 되는 건데 눈치 없이 대답한 게 아닌가 하고 후회했어요. 그러나 한 편 생각해 보니까 아니다. 대통령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 그걸 도와 드리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난 내 대답 자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만족했죠. 그게 내 개인적인 하나의 판단의 근거고. 또 하나 객관적 입장으로 보면, 대통령께서 83년이라는 시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이, 향토예비군의 국산화 무기로의 무장화가 끝나는 게 바로 83년입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완전히 구축돼서 스스로 굴러갈 수 있는 시점이 83년. 또 한 가지는 그때 당시 헌법규정에 의해서 대통령이 임기를 1년 미만으로 남기고 그만 둘 경우에는 국무총리가 그 자리를 대행하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1년이라는 기간이 국무총리의 대통령 실습기간이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정권이양과정이 안전한 절차를 밟게 되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이 분이 그걸 머릿속에 넣고 계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런 걸로 봐서 이 분은 83년에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여생을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생활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판단했죠.

박인규 : 이번에 내신 책을 보면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이 70년도에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내용이.. 이후락 본인이 간청해서 간 거고, 이른바 3대원칙이라는 자주 민족단결 원칙 등이 북한에 넘어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김성진 : 아마 관심이 많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처음에 이후락 부장이 평양에 갔다 와야겠다고 대통령께 간청했을 때 박대통령은 극구 만류했습니다. 가지 말라고. 그러면서 심지어는 독일에 히틀러 정권 때 헤스라는 참모가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교섭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에 혼자서 몰래 갔던 일이 있었어요. 그때 영국의 처칠정권에서는 그 사람의 밀입국을 인정하지 않고 감옥에 넣었어요. 상대하지 않았거든요. 박대통령이 그 사건을 인용하면서, 당신이야말로 우리나라 정보의 총책임자인데 2차대전 말기에 헤스사건을 생각해 봐라. 얼마나 위태롭고 무모한 짓이냐. 그러니 가지 말아라 했는데 이후락 부장은,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서 북쪽 사정을 보고 돌아와서 보고 대통령께 드리겠습니다. 여차저차 해서는 제가 자결을 하겠습니다 하고 독약을 가지고 가겠다고까지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는 할 수 없이, 정 그렇다면 우리가 남북대화는 해야 할 처지니까 가봐라. 그 대신 미국 정부와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고 가라. 그렇지 않고 독단으로 가선 안된다. 그래서 아마 내가 알기로는 이후락 부장이 그때 당시 여기 있었던 미국의 정보책임자와 그 문제에 대해서 긴밀한 협의를 사전에 하고 떠난 걸로 압니다. 그렇게 갔는데 떠나기 전에 박대통령께서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지켜야 한다는 내용은 추호도 양보해선 안된다는 지시를 하셨어요. 그랬는데 북조선 사람들이 말하자면 별종이거든요. 그 사람들은 외교적인 관례나 예법을 전혀 무시하기 때문에 이후락 부장이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전날까지도 김일성과의 면담스케줄을 통보 안했어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출발한다고 돼 있을 때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가자고 했던 겁니다. 그 때 말에 의하면 막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칠 때 와서 김일성이 만나자고 하니까 가자. 이렇게 돼서 갑자기 놀라서 옷을 갈아입고 오밤중에 어딘지 모르게 자동차를 타고 갔다는 거거든요. 거기 가서 만나서 얘길 하는데 어떻게 된 심판인지 이북의 통일 3대 원칙만 나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언급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돌아와서 보고할 때 박대통령은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죠. 그러나 여하튼 남북대화의 진전은 있어야겠다는 절박한 여건 때문에 그대로 넘어간 거죠.

박인규 : 말씀은 7.4 공동성명에서 나온 3대 원칙은 말하자면 우리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다.

김성진 : 난 그렇게 봅니다.

박인규 : 어쨌든 당시 이후락 부장이 2인자 행세를 했지만 결국 정리를 했습니다. 그 뒤에는 사실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아첨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리를 제대로 못하신 것 같아요.

김성진 : 하려고 많이 했는데 결국은, 내가 보기에는 북한정권의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간접침략이 상당히 깊이 추진돼서 들어왔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타격을 많이 받은 겁니다. 나는 지금도 우리정권이 그 문제에 대해선 심각하게 대비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뤄져서 자기네 경제성장을 압도하게 되자 김일성은 자기네 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박정희를 살해하도록 지시합니다. 그것은 뭐냐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저지해야만 자기들의 간접침략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본 거죠. 또 간접침략을 위해서 제일 중요한 대목은 미군철수죠. 그래야만 안보의 저지력을 와해시켜서 한국의 안전을 파괴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한국경제 자체가 망가지는 건 필시의 사실이고. 이러한 등등의 여건을 만들어 놓는 것이 간접침략을 승리로 이끄는 첩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전략을 그대로 추진해온 거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살해도 사실은 박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서였는데 실수로 육여사를 살해한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여파가 자연히 미치게 되는 겁니다. 개인 생활에 있어서 불가피한 일이죠. 그런 일 등등이 있어서 결국은 박대통령의 결단력과 의지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박인규 : 저는 사실'박정희를 말하다'라는 제목이라서 처음에는 책을 봤을 때 박정희 대통령과 김 전장관과의 인연들이 중심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은 6분의 1정도이고, 해방 이후의 정치사를 쭉 정리하셨어요. 그리고 위기상황이라는 말씀도 하셨고. 좀 전에 북한의 간접침략을 우리가 경계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6.15 이후 남북교류와 협력,화래를 많이 얘기하고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정세인식에서 차이가 많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김성진 :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왜 북한얘기를 끄집어냈냐면 우리나라 발전과정 등 모든 건 북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정권이 어떻게 탄생했느냐부터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정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나는 그걸 끄집어냈습니다. 또 그것은 나 개인적으로 볼 때도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할 때 처음 부딪힌 하나의 문제였기 때문에 자연스런 일이죠. 그런데 결국 북한정권이라는 건 스탈린의 극동지배를 위한 군사기지의 형성을 위해서 생겨난 거지 우리 한국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부터 우리가 잘 이해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시비는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박인규 : 말씀대로라면 7.4공동성명의 3대 선언도 문제가 있고, 6.15 공동선언도 좀 문제가 있고.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도 문제가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김성진 : 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련의 공산당 제 20차 전당대회에서 후르시초프가 스탈린의 격하보고서를 내고 그것이 채택됐을 때 동구라파의 모든 위성국가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서 공산당으로부터 떠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체제를 민주화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아시아의 중국과 북조선은 정 반대로 나가요. 오히려 스탈린을 옹호하거든요, 일종의 역사의 반동이죠. 이러한 역사의 반동에서부터 계속 반역사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는 냉전이 종식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된 거죠. 구라파나 다른 동구라파에서는 냉전이 전부 종식된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만 냉전이 종식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지역에서 끝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종식된 양 착각해서. 말하자면 사이비 환경에 사로잡혀 버린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부터 비롯된 모든 오차가 오늘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걸 설명하는 것이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 속에서 박정희라는 지도자를 볼 때에 박정희에 대한 시비도 자연히 가려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박인규 :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개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통치 중에서 이런 것은 문제가 있었다고 보시는 부분은 없습니까?

김성진 : 있었어요. 그 분은 너무 인정에 약해서 잘못한 사람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와서 눈물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사죄를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그 사람을 딱하게 봐서 용서한다는 겁니다. 난 그건 잘못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에 너무 약해요.

박인규 : 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분의 친일행위랄까요, 만주군관학교를 나오고 일본군 장교를 하고 해방 직후 남로당 활동을 했던 부분은 흠결이 아니냐고 하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성진 : 일본군대에 있을 때 우리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했다는 얘기는 잘못 안 거예요. 일본 군대에 있으면서 박대통령이 주둔하던 지역은 독립운동과 아무 관계가 없었어요. 그건 억지춘향이고, 남로당활동은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하에서 얻은 피해가 이중적인 피해인데, 일반 백성들이 착취당한 것에 첨가해서 젊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공부한다고 유학가서는 거기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배워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해방될 때 완전히 팽배해 있었어요. 이것이 그대로 지속됐으면 아마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공산국가가 됐을 겁니다. 그랬는데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머리가 없어서 6.25 전쟁을 도발했기 때문에 우리가 공산화 되지 않고 오히려 민주화 되기 시작한 전화위복상태로 들어왔다고 봅니다. 그런 과정에서 결국은 자기 인척이 남로당 활동을 한 건 숨길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본인은 그런 걸 완전히 단절하고 청산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는 건 박대통령의 행적이 입증하고 있거든요. 난 오히려 떳떳하다고 봅니다.

박인규 : 일단 책을 내셨는데, 앞으로 우리사회 진로와 관련해서 더 활동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김성진 : 이제 내 나이에 활동할 건 별로 없고, 우리나라가 되도록이면 빠른 시일 내에 자유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길 바랄 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북한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하는데 김정일 정권과 그 추종자들, 선군정치를 하는 사람들하고 북한에 있는 불쌍한 백성들을 따로 나눠서 이중 잣대를 갖고 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북한정권과 북한의 백성들을 한 데 묶어서 우리 민족이라고 생각해가지고는 한이 없을 겁니다. 그건 우리가 수렁에 같이 빠지는 길이죠. 우리가 나눠서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김성진 장관이 내놓으신 것들이 사회적으로 깊이있는 대화와 토론의 주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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