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국제반도체대전 행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행사장 밖에 흰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섰다. 지나가던 행인이 방진복을 가리키며 "부직포처럼 생긴 이게 뭐냐"고 묻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활동가 공유정옥 씨가 이렇게 설명했다.
▲9일 오전 방진복을 입고 추모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반올림 활동가들 ⓒ프레시안(남빛나라) |
반도체 산업의 첨단기술을 전시하고 그 성과를 기념하는 행사장 앞에서 반도체 직업병 사망노동자를 추모하는 퍼포먼스가 거행됐다.
반올림 활동가이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인 송진우 씨가 "이 자리는 매년 발전하는 전자제품의 성능과 기능 그리고 기술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자리"라고 말하며 "(그러나) 이 사업이 얼마나 많은 노동자의 고통, 죽음, 아픔을 가져왔는지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추모식을 시작했다.
실내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반도체 산업 종합전시회가 진행 중인 만큼, 추모식이 열린 킨텍스 행사장 주변은 반도체 사업 관계자와 반도체 업체 취업을 희망하는 구직자 등 반도체 사업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송 씨는 "반도체 칩을 만들기 위해, 설비에 이상이 생기면 측정장비보다 자신의 코를 이용해서 오류를 찾아냈던 노동자들,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방진복이 자신을 보호하는 줄로 알고 일했던 노동자들, 화학물질이 새면 보호장비도 없이 걸레로 닦아냈던 노동자들"이라며 그동안 보고 들어온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그들에게 전했다.
송 씨는 "방사선을 방출시키는 설비를 어떤 보호구도 없이, 방진복 하나 믿고 유지·보수했던 노동자들"이라고 말하며 반도체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밝혔다.
이어 사망하거나 투병 중인 반도체 노동자들 한명 한명의 이름과 병명이 불렸다. 송 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인 19세에 입사해서, 퐁당퐁당 장비라 불렸던 수동장비를 이용해 화학물질 세척업무를 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22세에 죽어간 황유미"라고 말하며 지난 2007년 3월 6일 사망한 황유미 씨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으로 송 씨는 "황유미와 함께 2인 1조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 31살 이숙영"씨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 2010년 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는 반올림과의 인터뷰에서 같은 곳에서 일하는 두 명이 희귀한 백혈병에 동시에 걸렸다는 사실이 이상했다고 말한 바 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설비 엔지니어로 유지보수업무를 하다가 2005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민웅 씨의 이름이 이어졌다.
황 씨의 부인 정애정 씨는 2008년 4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유족급여)를 신청했으나 2008년 5월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이후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과 함께 2010년 1월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에서 기각됐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반올림이 목격한 반도체 노동자들의 이름과 병명이 불리는 동안 주위가 잠시 소란해지기도 했다. 반도체대전에 참가한 한 구직자는 "뭐 어쩌라고 여기서 저런 걸 하는 거냐? 우리보고 취업하지 말라고?"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공을 바꾸라는 건가?"라며 농담하는 구직자도 있었다. 한 구직자는 "축제에 와서 왜 저러는 거냐"고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지난 6월에 삼성 LCD 천안공장에서 까만 유릿가루를 날리며 LCD 패널을 자르는 업무를 하던 윤슬기님이 중증재생불량성빈혈에 걸려 13년간 모진 투병 끝에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송 씨가 말을 마칠 때까지 불린 노동자는 총 24명이었다.
송 씨는 "(이외에도) 이렇게 반도체 전자산업에서 직업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은 60여 명이 넘는다"며 "반도체 전자산업에서 일하다가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들의 삶과 고통, 죽음이 이야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