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동안 팔레스타인 산문집 출간 준비를 하면서 그곳 작가들의 산문을 여러 편 읽었습니다. 이 원고들을 찾아 엮은이는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의 오수연 선생과 자카리아 모함마드 선생입니다. 그 원고 속에 '집을 지키는 선인장을 남겨두고'(주하이르 아부-샤이브 作)라는 빼어난 산문이 있는데, 이번 자카리아 선생의 '가시와 꽃'을 읽고 그 글을 한층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선인장은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걸 나타내는 기호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영원히 떠나는 게 아님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하고 믿음직한 것들을 남겨두었다. 나무들, 민속의상, 우리 집들의 영혼, 우리의 그림자, 발자국, 적들은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것들. 적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무작정 우리의 땅과 소유물을 훔치려고 한다.'
주하이르는 또한 선인장에 대해 자신의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도 전합니다. 선인장이 있는 장소가 바로 선인장이라는 것. 저는 그 말을 대지에 발을 디딘 모든 생명은 대지 그 자체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집을 짓기 전에 집터에 선인장을 심었다고 합니다. 집도 생명이라 반드시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선인장 몇 뿌리를 심고 나서 집을 지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선인장은 전설이 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의 선인장은 지금도 당신들 세계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주하이르가 화가 아심 아부 샤크라처럼 파괴된 아랍마을을 지날 때 받은 인상적인 체험은 의미심장했습니다. 선인장이 마치 그를 알고 있는 듯이 가시로 붙잡았고, 돌아설 때는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고 했지요. 저는 그걸 보고 당신들의 고난이 대지와 더불어 생명들의 고난이기도 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문인단체에서 일할 때 가끔 광주의 노(老)작가 한 분이 상경 길에 사무실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젊어 한동안은 소설을 썼지만 언제부턴가 펜을 거두어서 젊은이들은 그 분이 작가라는 사실도 잘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는 어른이셨지요. 저 역시 명색이 소설가라지만 그분의 작품을 한 줄 찾아 읽지 못했으니까요. 말수도 적은 분이 사무실 한 편에 묵묵히 앉아계시다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용건이 따로 있어서 오신 적은 없었습니다. 마치 객지의 자녀들을 방문하는 노인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십 년 전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러니까 계엄군이 광주 사람들을 도륙하던 시절 이야기였지요. 당신의 집 앞 도로가에 아주 어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탱크 소리와 총탄이 그 거리에 난무한 밤이 지나자 그는 그 거리로 슬그머니 나갔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또한 힘없는 자신이 더없이 혐오스런 발걸음이었답니다. 그는 어린 은행나무 둥치가 총탄으로 구멍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저게 살까 싶어서 다음날 다시 찾아와 보고, 구멍 자리에 새살이 돋는 걸 보고 또 찾게 되고, 그러구러 이십 년의 세월을 보냈답니다. 한동안 나무는 성장이 더디었지만 지금은 여느 나무처럼 우람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그분이 이야기 끝에 한 마디를 중얼거리듯 덧붙였습니다. '이제 그 나무를 두고 소설 한 편을 써도 괜찮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생존한 자들이 갖는 공통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언자로 지켜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긴박한 사정을 알리기 위해 타전하듯이 써낸 글들을 읽으면서 오히려 나는 내 영혼이 위무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지금 모두가 증언자입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이 조국이라서 증언자를 자임한 건 아닙니다. 그들은 개별자로서 때에 따라 조국과도 맞서려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스로가 대지처럼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지 조국이 성스럽기 때문이 아니지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확신하기가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더구나 팔레스타인처럼 수십 년 동안 점령된 땅에서는 말이지요. 팔레스타인에 관한 한 증언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무력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무력감을 딛고 써내는 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누군가 귀 기울여준다면 그들은 증언자로서 끝까지 생존해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선인장과 은행나무가 그래주었듯.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thebridgetopalestine@gmail.com)'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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