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得) 가운데의 득(得)은 망상(罔象)의 얻음과 같은 것이나,
묵(黙) 중의 묵(黙)은 한선(寒蟬;수매미)의 울지 않음과 다르도다.
북산의 도의(道義)가 홍곡(鴻鵠)의 날개를 드리우고,
남악의 홍척(洪陟)이 대붕(大鵬)의 날개를 펼쳤네.
해외에서 알맞은 때에 귀국하매 도(道)는 누르기 어려웠으니,
멀리 뻗은 선(禪)의 물줄기가 막힘이 없구나.
다북쑥이 마(麻)에 의지하여 스스로 곧을 수 있었고,
구슬을 내 몸에서 찾으매 이웃에게 빌리는 것을 그만 두었네.
지증도헌(智證道憲)은 9산선문 중 희양산문을 개창하였다. 나말여초의 9산선문 개창자 중 중국에 유학하지 않은 사람은 지증도헌이 유일하다. 윗글에서는 북산의 도의(道義)나 남악의 홍척(洪陟)이 "멀리서 배우고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지증도헌이 "다북쑥이 마(麻)에 의지하여 스스로 곧을 수 있었고, 구슬을 내 몸에서 찾으매 이웃에게 빌리는 것을 그만 두었네"라는 대목에서 유학하지 않고도 희양산문을 이루었다는 자부를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진대사비는 봉암사를 중건한 정진긍양(靜眞兢讓)이 고려 왕실과 맺고 있었던 유대관계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935년 정진긍양이 봉암사를 중건하여 주석하면서 정진긍양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정진긍양은 고려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스스로 개경에 나아가 왕건의 공경을 받는가 하면 2대 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정진긍양에게 사신을 보내 문안하였다. 정종 때에는 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가서 국정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광종 때에도 왕의 부름을 받고 제석원에 나아갔으며 광종은 그를 왕사로 대우하면서 극진하게 모셨다.
지증대사비에는 지증도헌이 신라 말기 경문왕과 헌강왕 등 왕들의 공경을 받으면서 왕과의 만남에서 남긴 일화들이 적혀 있다. 예컨대 지증도헌이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서라벌로 갔을 때 왕이 '심(心)'을 묻자,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하여 왕은 지증도헌을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정진긍양 또한 고려 태조를 비롯, 혜종, 정종, 광종 등 네 임금에 걸쳐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광종은 친히 정진긍양을 영접하여 공양을 올리면서 나라 다스리는 정도(正道)를 물었고 정진긍양은 이에 "망언(忘言)의 언(言)을 말하고 무설(無說)의 설(說)을 설하였다"는 일화가 정진대사탑비에 기록되어 있다. 왕실과의 그런 돈독한 관계로 인하여 광종 때 희양산문 본산으로서 봉암사의 위치는 고달원, 도봉원과 더불어 3대선원으로 꼽혔을 정도였다.
지증대사와 정진대사의 두 탑비 비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뜨인다. 희양산문의 개창자 지증도헌의 직(直)제자인 양부(陽孚)를 잇는 손(孫)제자 정진긍양이 중창자로 불리우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개창자의 바로 다음 대에서 무언가 사단이 생겼음을 의미할 수 있다. 추측컨대, 지증도헌의 사후 봉암사에 불이 났다든가, 아니면 후삼국 시대의 전쟁 통에 파괴되었다든가 해서 희양산문의 근거지 자체가 없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봉암사 터를 가리켜 "이 땅이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지증도헌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증도헌의 입적 후 헌강왕이 최치원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명을 받은 최치원이 무려 8년만인 진성여왕 6년 892년에야 탈고를 하고, 비문이 탈고된 후에도 다시 33년의 세월이 흘러 신라 멸망 직전인 경애왕 원년 924년에야 탑비가 세워졌던 것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이 비가 세워진 지 5년도 못되어 봉암사는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고 하는데 지증대사비가 세워진 지 5년이라면 929년으로 『삼국사기』에서 그해 10월 견훤이 가은 땅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적고 있는 그 무렵이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지증도헌의 입적 후 희양산문은 그 근거지를 상실하여 산문의 맥이 끊어진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희양산문의 상황을 알려주는 문헌이 있는데 『삼국유사』 탑상편 '백엄사 석탑사리'조가 그것이다. '백엄사 석탑사리'조에 이런 귀절이 있다.
"고전(古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전대(前代)인 신라 때에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는데, 중간에 오래 폐지되었으며 지난 병인년(906)에 사목곡(沙木谷) 양부 스님이 고쳐 짓고 그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917)에 죽었다. 을유년(925)에 희양산의 긍양 스님이 와서 10년 동안 살다가 을미년(935)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지증도헌의 직제자 양부가 906년부터 917년까지 11년 동안 강주 백엄사에 주석하다가 죽었고 그후 925년에 양부의 제자이자 희양산문 중창자인 정진긍양이 백엄사로 와서 주석하다가 935년에 봉암사를 중창했다는 얘기가 된다. 정진긍양이 양부의 제자가 된 것은 898년으로 알려져 있다. 정진긍양은 그러나 900년에 중국으로 유학갔다가 924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남원 백암수에 머물다가 927년에 강주 백엄사로 온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초기 희양산문은 사승(師承)관계가 계속 이어졌다기보다 몇 번의 공백 기간으로 단절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부가 강주 백엄사로 와서 주석했던 906년부터 정진긍양이 봉암사로 돌아간 935년까지 희양산문의 근거지는 백엄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양부가 죽은 917년부터 8년 동안 희양산문은 주인 없는 빈 산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정진긍양이 귀국하여 스승이 죽고 없는 백엄사를 찾아 주석하게 되면서부터 희양산문은 다시 법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봉암사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봉암사의 3층탑이나, 지증, 정진 두 대사의 부도탑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듣기로 지증대사 탑비의 비문이 온전하고, 글씨 또한 현전하는 금석문 중 최고봉에 이른다니, 사진이나 한번 찍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봉암사가 오래 전부터 '조계종 종립선원'이자 '특별수도원'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고 해서 그 욕심은 접어버렸다.
그렇게 봉암사를 포기하고 『삼국유사』를 읽던 중에 나는 '백엄사 석탑사리'조를 만났다. 그리고 백엄사 터로 전해오는 곳도 알게 되었다. 경남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가 그곳인데, 지난 4월 경남문화재연구원이 백엄사의 위치를 찾기 위해 1차 발굴조사했던 곳이다. 몇 년전인가 나는 그곳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거기에는 석등이 하나 있고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으로 불리우는 석불이 있다. 그곳이 정말 백엄사 터인지는 앞으로 본격 발굴조사를 통해서 밝혀져야 할 것이지만, 희양산문의 초기 역사를 궁금해하는 나는 봉암사 대신 백엄사 터로 알려진 그곳을 찾아가 나름대로 초기 희양산문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던 것이다. .
백엄사 터라고 추정되는 그곳에서 내가 떠올렸던 풍경은, 희양산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강주 백엄사로 흘러온 양부의 모습이었다. 산문의 본산을 잃어 문도이 뿔뿔이 흩어진 후, 희양산을 멀리 떠나 찾아온 강주 백엄사. 그리고 법맥을 이을 제자 정진긍양마저 중국으로 유학가 버려 아무도 없는 산문. 양부는 그런 자리를 10년 넘게 지키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신라 왕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스승 지증도헌이나, 고려 태조 이하 4대의 왕으로부터 국사 대접을 받았던 제자 정진긍양에 비하면 양부의 존재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나 백엄사에서 희양산문을 혼자 지켜왔을 양부의 모습을 그려보느라면, 어쩌면 양부의 삶이야말로 그의 스승, 제자가 이르지 못한 경지의 선(禪)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중국에서 돌아와서, 스승이 지켜왔던 희양산문의 보금자리 백엄사를 찾아온 정진긍양. 그도 935년 희양산으로 돌아갈 때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백엄사에서 보냈다. 그러고 보면 백엄사는 지증도헌이 입적한 이후 정진긍양이 다시 봉암사를 세워 희양산으로 돌아갈 때까지 끊어질 듯 말 듯 맥이 이어져 왔던, 어려웠던 시절 희양산문의, 귀하고 소중했던 보금자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