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정부 수립 이후 47년만에 처음으로 카스트로의 막내동생 라울의 임시대행체제가 등장하면서 쿠바의 권력구도에 일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중남미 좌파정부들과의 관계도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하고 있다. 쿠바의 실력자로 등장한 라울 카스트로는 형인 피델과는 달리 차베스와 룰라 등 중남미 좌파정권들과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로 이후 쿠바정국의 진로와 중남미 좌파들과의 관계를 3회에 나누어 긴급 진단해 본다.
최근 쿠바언론, 라울의 혁명경력 집중 조명
우선 지난달 말 장출혈 증세로 긴급 수술을 받은 카스트로는 상당히 위중한 상태였던 것으로 최근 알려졌다. 평소 카스트로와 아주 가까운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미겔 보나소 의원은 최근 "지난 달 31일 카스트로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카스트로의 근황을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몇 차례의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카스트로와 직접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의 최측근들로부터 '상태가 아주 심각했으나 다행히 수술경과가 양호하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보나소 의원의 말과 쿠바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정황들로 미뤄볼 때 카스트로가 비록 빠른 시일 안에 건강을 회복한다 해도 예전처럼 권좌에 복귀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쿠바의 언론매체들은 최근 부쩍 라울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군을 이끌었던 투쟁전력과 혁명을 위해 투옥됐던 과거사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라울의 후계구도 굳히기에 들어간 느낌을 주고 있다.
결국 쿠바정부는 카스트로의 회복속도와는 관계없이 이제 포스트 카스트로 체제를 구축해야 할 때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다.
쿠바 현지언론들의 이런 의도와는 달리 라울 카스트로 본인은 극도로 몸을 낮추며 직접 언론에 나타나기를 꺼리고 있는 모양새다. 이는 그가 원래 '영원한 2인자' 혹은 '카스트로의 그림자' 등으로 불렸을 만큼 대중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인사이기 때문이라고 현지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또한 그는 대중을 이끄는 리더라기보다는 참모형의 지도자 스타일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런 그가 권한대행이라는 명분으로 쿠바의 전권을 움켜쥐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몸을 숨기고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암살 등 경호상의 문제를 고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카스트로 부재로 인한 공백을 메워야 하는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제 쿠바 공산당과 정부, 그리고 군을 통솔하게 된 라울 카스트로는 외부적으로 조용한 모습과는 다르게 전국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3군에 비상을 거는 등 카스트로 부재로 인한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육·해·공군을 통틀어 5만이 조금 넘은 쿠바혁명군(17~28세의 청년들로 구성된, 2년 의무복무제의 정규군) 내부에는 1급 비상령이 내려진 상태다. 그러나 쿠바의 이런 군사규모는 최신무기로 무장한 세계최강 미군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다. 하지만 쿠바를 오늘날까지 지탱해주었던 힘은 이 정규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초정밀 미사일이라 할지라도 공격목표로 설정할 수 없는, 29~45세로 구성된 6만에 이르는 예비군들과 100만 명을 헤아리는 남녀 노동자 출신의 지역방위군들이 그것이다. 최근 이들에게도 출동대기 명령이 하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쿠바의 지역방위군 편제를 살펴보면 14개 주를 본대로 하여 169개 시 단위의 독립부대를 이루고 다시 1400개로 나뉜 중대 성격의 지역방위군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평상시엔 직장에서 일을 하지만 비상시엔 소집되어 군부의 통제 아래 지역방위 업무를 담당하고 일정액의 군 봉급도 지급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쿠바는 17세 이상 45세 미만의 모든 국민이 지역방위군인 셈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냉전시기 든든한 후원자였던 구소련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코앞에서 반미와 반제국주의를 외치며 50여 년간 미국을 상대로 카스트로와 그의 혁명정부를 지켜 왔던 것이다.
카스트로 역시 동생인 라울의 후계구도를 진작부터 염두에 두고 라울로 하여금 막강하지만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쿠바 군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쿠바 사정에 정통한 아르헨 현지 평론가들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혁명가 카스트로가 이제 생의 마지막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면서 "이 싸움이야말로 카스트로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혁명가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 왔고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카스트로가 이제 마지막 자신과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카스트로가 없는 쿠바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중남미 전체는 물론 전세계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서방세계에서는 쿠바를 못사는 나라, 독재자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쿠바 국민들이 카스트로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쿠바의 외면적인 모습이나 국민 개개인들의 소득수준을 살펴보면 쿠바가 못사는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한 쿠바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틴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하기 전 빈부의 양극화를 뼈저리게 체험해 왔고 혹독한 독재정권의 폭정에 시달려 왔던 쿠바인들은 지금 자녀교육이나 의료비용 등의 걱정 없이 삶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걱정 없이 오늘을 즐길 수 있다는 라틴적인 만족감, 그걸 누리도록 해준 게 카스트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쿠바인들은 카스트로 정부가 들어서기 전 친미파였던 바띠스따 정권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남부러울 게 없이 잘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아직까지도 카스트로에게 열광하며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것이다.
카스트로가 지금까지 쿠바인들의 혁명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열렬한 성원을 받고 있는 건 바로 쿠바혁명 직전 풀헨시오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 1901~1973) 라는 친미파 독재자의 혹독한 착취정책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군 출신이자 친미파였던 바띠스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의 동맹을 과시하며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런 친미성향 때문에 법적으로 재집권의 길이 막히자 1952년 군사쿠데타로 집권, 7년간 혹독한 독재정치를 펼쳤다.
쿠바가 마치 미국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던 바띠스따 집권기간 동안 쿠바의 모든 산업을 미국기업들이 장악했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미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생활비가 가장 비싼 도시로 변모했다. 또한 아바나는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도시로 각광을 받았고 TV와 전화 보급률이 미국보다 더 높았으며 최신형 캐딜락 자동차가 가장 많은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외형적인 이런 발전과는 다르게 부패한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서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져 갔고 빈부의 양극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 바띠스따 정권은 쿠바가 미국의 식민지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이유불문하고 체포, 무자비하게 살해하기도 해 이 기간이 쿠바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정치범들과 탄압받는 민초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피델 카스트로의 등장은 쿠바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영웅의 출현, 바로 그 자체였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보잘것없는 병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바띠스따 정권을 쉽게 무너뜨리고 쿠바를 해방시키는 전기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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