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역사정의실천연대가 주최한 대담회 '우리는 왜 유신의 부활을 반대하는가-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남겨진 아들이 말한다'가 열렸다. 사회를 맡은 방송인 김미화 씨는 "고(故) 송상진 선생님의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탄원서"라며 위의 탄원서 전문을 읽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송상진 선생은 1975년 4월 2차 인혁당 사건 관계자로 지목돼 사형당했다. 대담에 참가한 고(故)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씨와 고(故)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유신 정권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를 회고하며 "유신의 부활만은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37년 동안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보지 못해"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아버지를 잃은 후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에 "지금 생각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삶"이라고 말문을 열며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장 씨는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 계곡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후인 1976년 4월 19일 밤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이후 대수술을 받고 6개월 간 입원했다.
장 씨는 이 시절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살 방법도 없었다"고 표현하며 "퇴원하고 나서 집안 식구들이 살아가려는 방편으로 동생 둘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시집보냈다"고 회고했다.
"입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생을 시집보냈다고 밝힌 장 씨는 "제주도로 시집간 여동생은 시집에 기대 살게 했다. 결국 지금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는 미국에 들어가서 아직도 영주권을 못 받고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37년 동안 가족이 한 자리에 다 못 모여봤다"고 한스러움을 나타낸 장 씨는 "이제 세상을 바꿔서 우리 가족도 한번 모여봐야겠다. 고생했단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 26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성당에서 열린 '우리는 왜 유신의 부활을 반대하는가' 대담회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씨가 생각에 잠겨 있다. ⓒ뉴시스 |
간첩의 자식으로 낙인 찍혀 외국으로 도망치듯 유학
고(故)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간첩의 자식으로 낙인 찍혀 초등학교도 여러 번 전학 다닌" 시절로 회상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였던 최종길 교수는 19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어 25일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은 "(최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중앙정보부 건물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밝혔으나 후에 가혹한 고문에 대한 증언이 이어지고 공문서 허위 작성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됐다.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 교수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아들 최광준 씨는 자신의 유학생활을 "외국에 유학을 간다기보다는 일단 국내에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간첩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씨는 "어린 마음에 외국에 가면 해결이 되지 않을까 했지만 국내에서 해결이 안 되면 외국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하며 "외국에선 아버지가 간첩일 리 없다고 이미 알고 있더라"고 밝혔다.
"박근혜, 2007년에도 형식적인 사과"
지난 24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5·16, 유신, 인혁당 사건으로 헌법 가치가 훼손됐다"며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전한 사과에 대한 의견이 이어졌다. 박 후보는 지난 10일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발언한 후 지지율이 하락했다. 이후 과거사에 대해 사과 발언을 하며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전환한듯한 모습을 보였다.
장호권 씨는 "2007년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이명박 시장과 싸움하던 박근혜 후보가 사과를 하겠다 해서 만난 적이 있다"고 회상하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사과를 했다는데 뭘 사과했는지 잘 모르겠고 깊은 내용이 없이 그냥 '사과하러 왔다' 이러고 가더라. 그것뿐이다"라고 비판했다.
최광준 씨는 "대통령 후보로서 지금 어떤 캠페인의 일환으로 하는 사과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고 사과의 진정성에 의문을 던지며 "그런 사과는 불완전한 사과이며 다시 말해서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밝혔다.
▲지난 12일 열린 새누리당사 앞에서 열린 인혁당 재건위 유가족들의 기자회견 ⓒ연합뉴스 |
진상규명 위한 기구 찬밥 대접, 이래도 되나?
대담회 참가자들은 유신 정권이 자행한 의문사가 수없이 많다고 강조하며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해 정부가 정책적인 지원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최광준 씨는 "우리 사회에선 안타깝게도 이것(의문사진상규명)이 정치적 문제로 생각되는 것 같다"며 "과거 중앙정보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뀐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면 국정원이 '우리는 과거의 중앙정보부가 아니다. 발 벗고 나서서 진상 조사하겠다'고 나서며 과거와 단절하겠다고 해야 했는데…"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최 씨는 "이것을 방해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고 과거 독재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법사위 위원장은 서류를 책상 서랍에 던져 놓더라"
장호권 씨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직을 위해 고군분투해왔지만 정부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진상규명위원회 3기 출범을 이뤄내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토로했다.
장 씨는 "(당시) 각 기관의 협조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며 "과거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규모는 작더라도 정말 독립되고 권한 있는 제3기 진상규명위원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서명해 3기를 출범시키자는 서류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서류는 빛을 보지 못했다. 장 씨는 "법사위원장의 책상에 들어가 시기를 놓쳐 무산되고 말았다"며 "법사위원장이란 사람은 왜 자기 책상 서랍에 넣어놓고 이를 잠가놨느냐. 바로 그 자신이 잘못된 친일과 군사독재의 잔재였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일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과거사가 제대로 규명됐겠느냐"고 반문한 장 씨는 "이제는 정말 과거사를 정리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발붙이지 못하고 그들이 국가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법사위원장도 과거사 은폐의 공범으로 봐야 하니 모두가 그의 실명을 알 수 있게 해달라"는 청중의 요청에 장 씨는 "그자는 바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정수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고 자란 독버섯 중 하나인 김기춘이란 자"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장 씨는 장준하 선생의 암살의혹규명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에 많은 사람이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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