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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별강연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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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별강연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적 주제로 집필할 계획이다"

"선생님께서는 20년 간이나 감옥생활을 거치셨는데도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고 계시지 않은 듯합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신영복 교수는 온화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출소하니 서대문 구치소도 없어졌고, 그 무시무시하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셨더군요. 내가 처음 취조를 받던 남산 수도경비사령부도 한옥마을로 바뀌고,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도 잔디가 푸른 체육구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 증오를 갖는 것은 증오의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이 감옥을 채우는 법이고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우리 사회가 겪어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내가 해당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내 속의 사회, 시대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원해 갖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8일 신영복 교수가 올해로 17년 째인 교수생활을 마감하는 마지막 강연을 했다. 신영복 교수는 1988년 7월 20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해 다음해 3월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올해로 정년을 맞았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는 박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같아"

신영복 교수는 마지막 강의를 일반인에게도 공개했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주제였다. 덕택에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들으려 온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강의실은 무척 붐볐다.

강의가 시작되자 신영복 교수는 칠판에 주역의 박괘(剝卦)를 그렸다. 신 교수는 "박괘는 다 빼앗기고 단 하나의 가능성만 남아있는 상태를 뜻하며, 이는 언제 전락할지 모르는 절망의 상태입니다.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IMF, WTO, FTA라는 일련의 힘겨운 상황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는 박괘를 연상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 신영복 교수가 감나무를 그리고 있다. 옆에 보이는 것이 박괘의 모습이다. 산을 뜻하는 괘와 땅을 뜻하는 괘가 합쳐진 형상이다. ⓒ 프레시안

신영복 교수가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강의 후 기자들과 별도로 마련된 자리에서 한 기자가 이에 대해 다시 물었다.

신영복 교수는 자세한 논의를 할 만한 자리가 아니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최근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국민경제가 성급하게 파괴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계화 논리는 특정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패권적 질서와 통하는 것으로, 지금의 상황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세계질서가 구축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반대편에 있는 우리로서는 WTO, FTA 등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나 구조가 변화하는 데는 외부의 충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외부의존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충격을 일정하게 차단하고 한국경제가 세계경제에 맞물려 있는 상황을 줄이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물론 중상위 그룹에 편입되어 패권적 이해관계에 동참하려는 경영방식에서 본다면 패권적 질서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자는 주장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며 비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당장 시속 100km의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자는 주장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열차가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현대 자본주의와 패권질서가 과연 지속가능한가라는 의문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립적인 경제구조에 대한 중장기적인 대비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볼 때입니다"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박괘의 효사(爻辭)에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구절이 있다. 신영복 교수는 이 말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말이 바로 이 '석과불식'"이라면서 "이 말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고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신영복 교수가 마지막 강연을 하고 있다. ⓒ 프레시안

신영복 교수는 감나무를 들어 이 구절을 설명했다. 신 교수는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지만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입니다"라고 말했다.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언어를 읽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일 먼저 나무의 잎사귀를 뜯어야 한다. 이것이 엽락(燁落)이다. 신영복 교수는 "잎사귀를 뜯고 앙상한 줄기를 분명히 드러내 직시하듯, 거품을 떠내고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정치적 구조, 문화적 작용 등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떨어진 잎사귀는 나무의 뿌리에 거름이 된다. 신영복 교수는 "잎이 떨어져 뿌리를 거름하는 이치가 바로 절망의 언어를 희망의 언어로 바꾸어내는 이치라고 강조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방법은"

우리 사회의 뿌리는 무엇인가. 신영복 교수는 단호히 '사람'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서경에 나오는 오행인 수화금목토는 사실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원을 의미한다"면서 "이러한 자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람이며 사람이 바로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신영복 교수는 "우리 시대에 거의 수단화되어 잇고 물질적 가치의 하위에 배치되어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최고의 가치"라면서 "삶이란 사람들과의 만남이며 사람의 가치를 가장 온전하게 읽어내고 키워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대학"이라고 말했다.

결국 "잎을 뜯고 구조를 직시하고 다시 가장 중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신영복 교수는 "잎사귀를 떨구고 뿌리를 덮으려면 겨울이 있어야 한다"면서 "조용히 우리 사회의 뿌리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계절을 맞이하고 사람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박괘의 다음 괘는 복(復)괘다. 씨과실 속에 있던 씨앗이 땅 속에서 싹트는 모습이라고 한다. 박괘의 진정한 극복이다.

"어느 나무도 흠이 되지 않는 숲을 키워내야"

신영복 교수는 "단순히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숲이 되는 방법, 사람이 개인이 아닌 숲의 사람이 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나무는 큰 나무, 작은 나무, 부러진 나무 등 많이 있으나 이 모든 결함을 모아 숲을 만들면 작은 나무나 큰 나무나 흠이 되지 않는다"면서 "숲이 바로 나무의 완성"이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숲은 수많은 나무를 길러내는 하나의 시스템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는 "한 사회를 이끌어갈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학교의 과제이자 사회의 과제"라면서 "어느 한 나무를 똑똑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결함에도 숲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학교의 과제이자 사회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 강당을 꽉 채운 사람들. ⓒ 프레시안

그는 "우리나라의 인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 어떤지 되짚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각 대학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훈련된 인재들로 가득차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숲을 가지지 못했다"면서 "각자 나무가 되려 하지 말고 숲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숲이 되는 것은 공유의 과정이다. 신영복 교수는 대숲을 예로 들었다.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그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는 것이지요.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 자체가 삶을 가치있게 한다"

그러나 신영복 교수는 사회변화란 결코 쉽지 않으며 지난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신영복 교수는 "대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제도적 변화나 사회변화를 이룩해낼 수 있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국가권력을 가졌던 것이 파시스트와 사회주의 독재였고, 이들이 사회를 바꾸어내는 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신 교수는 "우리는 사회를 불가역적으로 바꾸어내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회변화란 결코 쉽지 않지만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하고 보람되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근본에 있어 사회를 바꾸어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신영복 교수는 "여러분 모두에게, 어디에 있든 사람이라는 씨앗을 묻는 과정을 계속 해가기를 당부한다"면서 "나도 앞으로 함께 씨앗을 묻어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인간적인 사회, 사회적인 인간"

신영복 교수의 퇴임식은 오는 8월 25일로 예정되어 있다. 성공회대 김성수 총장은 "신영복 교수가 떠나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면서 "석좌교수나 명예교수 등의 형태로 계속 남아계실 것"이라고 밝혔다.

또 신영복 교수는 앞으로 사회적인 담론을 정리해 정치경제학적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낸 책을 집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동안에는 현안 문제를 따라가는 데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많아 오랫동안 근본적인 내용을 풀어내는 데 치중했지만 보다 시간이 많아지면 인간적인 사회, 사회적인 인간이라는 주제로 정치경제학적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내는 집필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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