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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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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35>

서안(西安)을 다녀와서

지난 주 필자는 중국의 서안에서 놀다 왔다.
  
  중국말로는 씨안, 하지만 필자는 서안이 더 정겹다. 옛날 장안(長安)이 있던 고도(古都)이고 전통 중국의 핵심이다. 먼 옛날 주(周)를 비롯하여 진시황의 진(秦), 그리고 한(漢), 그리고 당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니 유구한 역사의 고도이다.
  
  오늘은 음양오행을 떠나 서안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서안 여행은 실로 오랜 만이었다. 1994년 처음 들렀던 이후 처음이니 말이다. 시가지 모습이 변한 것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급변하는 중국이라 으레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다.
  
  아침에 도착하여 서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다 보니 비가 내려 거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은근히 황사가 걱정이었는데, 얼마간의 비라도 내렸으니 다행이었다. 원래 비가 귀한 곳이라 출근하는 서안 시민들의 얼굴도 무척 환해 보였다. 문득 떠오르는 시 구절이 있었다.
  
  위성에 아침 비 내려 먼지안개를 적시니,
  여관 주변의 버드나무 그 푸름을 더하네
  
  (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조우읍경진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청청류색신 )
  
  이 시는 당나라 시절, 왕유가 실크로드로 길을 떠나던 친구를 배웅하며 지었던 '위성곡'이란 시의 앞부분이다. 위성이란 장안 서쪽 근교에 있던 마을이었으니 왕유는 그곳까지 친구의 길 떠남을 배웅했던 것이다.
  
  흔히들 서안을 역사의 고도, 온통 문화재로 덮인 도시란 말들을 하지만 사실 서안은 눈을 즐겁게 할 것이 별로 없다. 옛 궁궐들은 모두 없어져 터만 남아있을 뿐이고 문화재가 많다 하지만 거의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에 눈요기가 많지 않은 것이다.
  
  대개의 관광 코스는 병마용 박물관에 가서 흙으로 빚은 병사들과 말들을 보고, 화청지에 가서 당 현종과 양귀비가 놀던 온천을 본 후에 진시황릉에 올라 '무덤 한 번 무진장 크네 그려' 하고 내려와서 비림(碑林)에 들러 돌비석들을 보고나면 끝이다. 관광거리로 치면 하루 일정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서안만으로는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관광코스가 되기 어렵다. 그저 들러보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코스일 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서안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서안이 실크로드 여행의 출발지 또는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일본 NHK 방송에서 실크로드를 다큐멘타리로 방영한 이래, 꾸준히 일본 관광객들이 서안을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하다. 서안은 특히 이백과 두보, 백거이와 왕유, 맹호연과 같은 당시(唐詩)의 주역들이 노닐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부여에 들러 조상의 흔적과 자취를 느껴보려고 애쓰듯이 서안에 와서는 중국 문학, 특히 당시(唐詩)의 옛 현장에서 어떤 향수를 느껴보려는 것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그냥 본다면 서안은 볼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사실 볼 것이 엄청나게 많은 곳이다. 섬서성 역사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섬서성 역사박물관이 새롭게 단장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작심하고 들러보기로 했다. 같이 간 일행은 가이드에게 부탁하고 사흘간 시간을 내어 역사박물관과 비림을 여유를 가지고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참된 목적이었다.
  
  섬서성 역사박물관은 실로 규모도 크고 중국의 고대유물을 가장 충실하게 전시하고 있는 엄청난 박물관이다. 당삼채(唐三彩)의 진품(珍品)들도 많고 특히, 당나라 유물들은 다른 중국 내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다.
  
  주(周)나라 전시실에는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새겨진 소뼈나 거북 껍데기들이 실로 풍부하다. 필자가 음양오행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보니 관심이 유별난 것은 당연한 터, 열심히 구경했다. 또 지배층이 사용하던 청동기 그릇들과 향로들도 많았다.
  
  진(秦)나라 유물들은 병마용 박물관도 충실하지만 이곳에도 상당 수 볼 것들이 있었고, 한(漢)나라 전시실에는 채색 병마용이 있었다.
  
  위진 남북조 시대 전시실에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유물은 별로 없으나 불교와 도교 등 종교 관련 유물이 많았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역시 당나라 전시실이었다.
  
  여러 분묘에서 나온 궁녀도, 외국사절도, 궐루의장도(闕樓儀仗圖) 등의 커다란 채색벽화, 당삼채(唐三彩), 삼채용(三彩俑)등이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그림들이었다.
  
  정말이지 다리가 쑤실 정도로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경했다. 예전에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갔을 때에도 다리가 아파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문 학자들이 몇 년을 봐도 남을 물품들을 이틀에 휙 하고 주마간산(走馬看山)하니 힘들 것은 당연한 이치.
  
  박물관을 그런대로 살펴본 후, 일행과 떨어져 행동했기에 택시를 타고 진시황릉을 찾아갔다. 능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능 정상에 오르면 멀리 북으로는 위수(渭水)가 내려다보이고 남으로는 저 멀리 종남산이 더욱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당시(唐詩)를 읽다보면 툭하면 등장하는 산이 바로 종남산이다. 수도 장안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남산 또는 종남산이라 부르는 이 산은 진령산맥의 북단 끝자락에 놓여있다.
  
  말을 내린 후 한잔 술을 권하며 이제 어디로 가려나 하고 물었더니
  친구 대답이 '세상일 뜻 같지 않으니 저 남산으로 가서 머물려하네'.
  
  이 또한 왕유가 출세길에서 실패한 친구를 보내며 지은 송별(送別)이란 시의 일부이다. 당시 중국의 지식계급들은 출사(出仕)했다가 실패하거나 청운의 꿈이 실패하면 수도 장안의 남쪽에 있는 종남산에 가서 은거하는 일이 유행이었다.
  
  장안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버리면 돌아가는 소식을 모르게 되니 은거한다 해도 멀리 간 것이 아니라, 가까운 종남산에 가서 머물렀던 것이다. 산의 북쪽 기슭에 머물면서 조석으로 수도 장안을 바라보면서 황제 또는 높은 분이 행여 불러주지나 않을까 했었으니 미련을 품은 채 은거생활을 했던 셈이다. 지식인 계급의 한계라고나 할까.
  
  그래서 당시(唐詩)에는 종남산이 자주 등장한다. 왕유만이 아니라 두보나 이백도 종남산을 배경으로 한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기에 그냥 종남산이 아니라, 중국 문학 속의 종남산이요, 역사 속의 종남산이다. 종남산은 한ㆍ일ㆍ중 공통의 문화 의식 속에 면면히 녹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종남산 너머 동에서 서로 무려 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산맥이 진령산맥이다. 장안이 있던 이 곳을 관중평야라 했다.
  
  동으로는 남하하는 황하로 인해 막히고 남쪽으로는 진령산맥이 에워싼 이곳은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지였다. 그 속에 깃든 관중평야는 수많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생산력을 갖춘 곳이었다. 장안은 그 관중 평야의 한 가운데에 자리한 도읍지였다.
  
  요새지에 자리한 진(秦)은 힘을 낭비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으며, 유방 역시 장량의 헌책에 따라 관중 평야를 제압한 후에 이를 기초로 중원에서 항우와 겨뤄 마침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일은 고래로 힘든 일이다. 그런데 저 험준한 진령산맥을 넘어 군대를 몰아쳐왔던 예도 있었다. 한마디로 억지와도 같은 일이었지만 삼국지의 제갈량이 바로 그 사람이다.
  
  진령 너머 남쪽의 한중(漢中)평야에서 둔전(屯田)을 통해 곡량을 모은 촉의 제갈량은 진령산맥의 허리를 깎아 좁은 길을 내었고 그 길로 10만 대군을 몰아 장안의 서쪽 평야로 진군했던 것이다.
  
  마속의 서툰 작전지휘로 대패한 제갈량은 후로도 다섯 번 더 대군을 몰아 나왔지만, 산을 넘어야 하는지라 병참의 어려움으로 큰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니 진령산맥은 제갈량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1994년에 제갈량이 죽은 오장원을 들렀었는데 진령산맥의 북단이자 서안의 서쪽에 위치한 아주 궁벽한 시골이었다.
  
  황하는 북에서 내려와서 진령산맥에 머리를 박으면서 아이쿠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동쪽으로 물길을 틀고 있으며 위수(渭水) 역시 이 지점에서 황하와 합류한다. 그 지역을 동관(撞關)이라 하는데, 그 곳 역시 가보면 상당한 장관이다.
  
  강이 땅과 부딪치면서 엄청난 황토가 급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이전까지는 제법 맑은 물의 황하도 이 지점부터는 완전 누런 황토물이 되어버리니 그래서 황하란 명칭을 얻게된다.
  
  예전에, 아마도 1990년대 초반에 첸카이거가 감독한 '현 위의 인생'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그 영화 속에 바로 황하가 땅과 헤딩하는 스펙타클한 장면이 나온다. 원제는 변주변창(邊走邊唱), 즉 '길을 가면서 노래 부른다'라는 뜻의 예술 영화였다.
  
  이 때만 해도 첸카이거는 중국 문화를 소개함에 있어 실로 뛰어난 감독이었는데 금년 초에 개봉한 장동건 주연의 '무극'에서 스타일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으니 하여튼 한번 돈이란 것을 맛보고 나면 사람은 저렇게 되는구나 싶다.
  
  서안에서의 마지막 밤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시내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상당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말을 걸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제야 기사는 얼굴을 피면서 필자가 일본관광객인 줄 알고 내심 싫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웃으면서 그것은 모두 몇몇 정치인들이 잘못 하는 것이지 일본 관광객들이 무슨 잘못이 있으며 그 덕분에 택시 영업도 될 터인데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내리면서 거스름돈은 팁으로 주었더니 역시 한국 남자는 '하오한(好漢)', 즉 사나이 대장부라고 발림 말을 하는 것이었다. 민간 외교, 한 건 한 셈이었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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