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번역된 서양'과 '직수입한 서양'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번역된 서양'과 '직수입한 서양'

김민웅의 세상읽기 〈229〉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일까?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는 19세기말 미국과 프랑스의 개항 요구를 물리적으로 거부하는 데 성공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양과의 최초의 접전치고는 만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반해,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반(半)식민지화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무너져내렸고, 일본은 미국의 함포외교 앞에서 재빨리 내부 개혁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근대는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강압으로 시작됩니다. 서양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서양의 아류(亞流)와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번역된 근대'였습니다. 일본을 통해 바라본 서양이 근대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논리가 나온 것도 이렇게 보면 무리가 아닙니다. 식민지 체제가 다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바탕으로 우리의 근대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이 이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하지만 그 주장에는 그 근대의 목표가 우리의 정체성을 허무는 것임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피상적 논리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근대는 일본이라는 프리즘에 굴절되어 진행되는 역사적 운명을 겪게 됩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모두 애초에는 서양을 거부하는 척사(斥邪), 양이(攘夷) 등의 태도를 보였지만, 그 뒤 중국과 일본은 서양에 패배하면서 중국은 길고 긴 혁명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일본은 명치유신을 향한 전란의 폭풍에 휩싸이게 됩니다.
 
  두 나라 모두 서양문명의 자장 속으로 급속하게 흡수되어갑니다. 그러나 중국은 좌, 일본은 우로 나뉩니다.
 
  한편, 우리는 동학과 갑신정변을 통과하면서 몸부림치지만 이 모두가 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좌절되어 갑니다. 국제관계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 전체가 정치경제적 파산과 외교적 침몰의 상태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일거에 바꿀 혁명이 일어나거나 또는 외부에 기대어 살아가거나 아니면 침략당해서 식민지가 되는 길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도층은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면서 역사의 주도권을 움켜쥘 자세와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역사의 진로를 개척해나가기 보다는 외부의 힘을 빌어 어떻게 해보려고 기웃거리다가 그 밖에서 강한 자가 되어가고 있는 일본이 확 잡아채자 그대로 끌려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근대는 그래서 식민지 체험이 그 기점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 고인(故人)이 된, 일본의 중국문학 태두이자 문학평론가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일본은 근대로의 전환점에서 유럽에 대해 결정적인 열등의식을 지녔다"고 지적하면서 유럽을 맹렬히 추격하여 노예의 주인이 되어 노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고 일본의 역사적 동력이 지닌 성격을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지배에 저항하는 힘을 갖지 못한 노예의 주인은 진정한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루쉰 문학을 주목합니다. 루쉰이 갖고 있는 저항의 정신, 그를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노력.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이 일본이 아닌 서양이 되려 한 것에서 일본의 비극을 봅니다.
 
  이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자신은 그렇다면 어떠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근대는 변혁이고,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들어 가는 성장의 진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자아 정체성을 과연 명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도 우리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의 미래적 진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이라는 모델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된 서양'에서 '직수입하는 서양'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적 논의는 부족하기만 합니다.
 
  우리도 어느새, 노예의 주인이 되려는 야망에 사로잡혀 가는 것은 아닌지 좀 멈춰서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서양의 아류가 되어가는 것에 만족하면서, 노예를 거느린 제국의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라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비틀거리고 미국이 이끄는 밧줄에 몸이 묶여 제 갈길을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에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