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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인권의 기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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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인권의 기본 아닐까요"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04/04] 인권르포 '길에서 만난 세상' 펴낸 작가 오수연씨

선진국들이 참여하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의 멤버이기도 한 우리나라.. 하지만, 우리사회의 인권 그 현주소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요? 한쪽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앉은 자리에서 몇 억을 벌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다운 권리, 우리 사회 공동체로서의 권리를 발탁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한국에 온 동남아 여성들, 노동은 있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없는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의 실태 등 우리사회 인권, 그 현주소를 알아보는 책이 기획됐는데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길에서 만난 세상-대한민국 인권 그 현주소를 찾아〉의 작가 중 한 명인 오수연씨를 초대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사회 공동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작가 오수연씨입니다. 작가 오수연씨는, 1994년 〈현대문학〉 장편 공모에 〈난쟁이 나라의 국경일〉로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소설집으로 〈빈집〉, 〈부엌〉을 펴냈고, 〈땅 위의 영광〉으로 2001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3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파견작가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왔고, 이를 토대로 보고문집 〈아부 알리, 죽지 마〉를 펴낸바 있습니다.

박인규 : 오수연씨, 안녕하십니까?

오수연 : 네. 안녕하세요.

박인규 : 이번에 〈길에서 만난 세상-대한민국 인권 그 현주소를 찾아〉라는 책이 나왔는데 보니까 세분의 작가와 한 명의 사진작가가 공동으로 쓰셨더군요?

오수연 : 네.

박인규 : 제가 알기로는 이것이 월간 〈인권〉이라는 책에 연재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오수연 : 네. 그렇습니다.

박인규 : 어떻게 해서 필자로 참여하시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오수연 : 〈인권〉이라는 잡지의 취지는요. 인권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말로 들리잖아요. 누구나 인권이라고 하면 '아, 맞아' 라고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지만 막상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작가들이 구체적으로 발로 뛰어다니면서 인권문제를 르포로 써서 독자들에게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하자는 취지였어요. 그것에 저도 동감해서 참여하게 된 겁니다.

박인규 : 실제 생활에서 인권을 살펴 보자?

오수연 : 네. 그렇습니다.

박인규 : 오수연씨께서 그곳에 필진의 하나로 참여하신 것은 이렇게 말씀 드리면 약간은 엉뚱할지는 모르지만 다른 작가들보다 인권문제에 관심이 더 많아서라고 볼 수 있을까요? 특별히 인권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수연 : 네. 사회에 관심이 많죠.

박인규 : 쓰신 것 중에 보면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를 보셨지만 그 중에 하나로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외국에서 우리나라로 시집 온 여성들..그런 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신지..그런 것을 하신 거 같아요. 어떻습니까? 지금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시집 온 여성들의 삶이..물론 그 중에는 화목하게 사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어렵게 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단은 인권의 문제로 봤기 때문에 어렵게 사시는 분들의 실태라고 할지, 보신 경우가 어땠습니까?

오수연 : 네. 요즘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한국인 남편을 만난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프로그램도 자주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한국사회에..그런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취재를 할 당시 2년 전만해도요. 오로지 남편 하나만 믿고 그분들은 오고 있거든요. 그런데 막상 결혼이 불안하고, 불행하고, 굉장히 부당한 처지에 놓여서 어디에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박인규 : 구체적으로 실제로 보신 한 가정을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오수연 : 네. 예를 들자면 19세의 처녀였는데 63세의 남편을 만났어요. 그래서 한국에 왔는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해장국집에서..남편이 해장국집 식당을 하시는데 밤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고 1년 동안 자기가 사는 동네를 구경을 해 본적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임신이 되니까 검진을 받자고 산부인과에 남편이 데리고 갔는데 막상 깨보니까 임신중절 수술이 되어 있다던가..그런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또 이런 분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주로 중매업체를 통해서 서로 잘 모른 채 결혼을 하는 경우인데요. 그런 곳에 찾아와서 남편이 '지금 아내가 너무 고집이 세어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반품 하겠다. 다른 여자와 결혼시켜 달라' 는 경우도 있고요. 또 인권단체에 신고가 들어와서 실무자가 조사를 나가니까 '종업원 구하기기 힘드니까 결혼을 했지..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외국 여자와 결혼을 하겠느냐..'

박인규 : 실제로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수연 : 네. 그런 경우와 흔히 남편만이 아니라 그 시댁식구들도 '우리는 너를 비싸게 주고 사왔어..거짓말 하지마..' 이런 얘기들을 한다는 거에요. 흔히..그러니까 지금 결혼 생활에 성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요. 그런 경우는 요행히 착한 남편과 착한 시댁 식구들을 만나서 그렇게 된 것 같고요. 그렇지 않다면 이분들은 신분상으로 불안하죠. 국적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말도 통하지 않지요. 가난하지요. 돈도 없고요. 또 제 3세계 출신이죠. 어디 가서 어떻게 자신을 본인을 보호해야 할지 방도도 모르고..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거죠.

박인규 : 오수연씨도 말씀 하셨지만 사실은 텔레비전에 보면 또 외국에서 시집을 오셔서 굉장히 화목하게 사시는 경우도 많이 방영이 되고 있어요. 모든 사안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문제가 되는 거죠.

오수연 : 그렇죠.

박인규 : 그렇다면 지금 말씀하신 것은 그런 어떤 극단적인 경우에는 '내가 종업원을 구한 거지, 부인을 구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말하자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건데 왜 그렇게..말하자면 그 여자분들은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오는 것을 모르고 오는 겁니까?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죠?

오수연 : 결혼이라는 것이 원래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한국인들끼리 결혼을 해도 지금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더군다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끼리의 국제 결혼은 더욱더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이 지금 한국의 경우에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한국에서 아내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아주 다급하게 결혼하는..

박인규 : 길거리에 보면 베트남 처녀..이렇게 붙어 있는데..

오수연 : 네. 현수막도 많이 걸려 있죠. 그런 수단으로 쓰이고 또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은 나라 여성에게는 한국에 대한 환상을 갖고 오게 되는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안 맞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남편의 경우에는 '아, 내 아내가 문화가 다른 사람이니까 내가 잘 이렇게 받아들여서 같이 살아 봐야지..' 이런 생각보다는 그대로 가부장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채로 간편하게 신부감을 구했다고만 생각하고요. 또 신부입장에서는 막상 자기가 꿈꿨던 한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결혼이라는 것이 대개 결혼 중매소 같은 곳을 통해서 현지에 가서 한 번 보고 바로 결혼을 하고 데려 오는 그런 형태인가 보죠?

오수연 : 네. 그렇습니다.

박인규 : 그렇게 와서 힘들게..말하자면 정말 애초에 생각한 것과는 다른 그런 삶을 살게 되면 이 사람들은 사실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는데요. 혹시 그렇게 어렵게 와서 어려움을 당한 그런 여성들이 호소하거나 상담할 수 있는 그런 단체 같은 곳이 있습니까?

오수연 : 네. 이주 여성 노동자, 이주 여성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지역마다 있는데요. 제가 모두 말씀 드리기는 너무 길고요. 대표적으로는 안양에 있는 '위홈(WeHome)' 전화번호를 말씀 드릴까요?

박인규 : 네.

오수연 : 031-466-2876입니다. 말씀 드리고 싶고요. 그리고 또 1336번이 여성 가족부에서 만든 여성긴급 전화입니다. 이쪽으로 연락을 하시면 소개를 해 드리겠죠.

박인규 : 우리나라로 시집온 동남아의 며느리나 아내뿐만 아니라,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동들..참 어려운 것 같아요. 텔레비전에서도 보면 어머니가 대개 교육을 하는데 어머니가 한국말을 모르니까 참 어려워하고 실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보신 사례가 있습니까?

오수연 : 네. 제가 필리핀에서 온 신부를 제가 얘기를 할 때요.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분은 와서 우리말을 배우려고 얘기를 해보려고 했다는 거에요. 식구들이나 남편하고요. 그런데 귀찮아 한다는 겁니다. 귀찮아 하고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고요. 난 한국사람이 되려고 왔으니까 물론 그쪽에서 집단결혼식을 올렸다고 할 지라도, 단체결혼식을 올렸다고 할지라도 한국식으로 다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쪽두리를 쓰고요.

박인규 : 대개 결혼식을 여러 분이 가셔서 단체로 결혼식을 하시고 오시나 보죠?

오수연 : 지금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결혼의 경우는요. 중매회사를 통한 경우도 있지만 특히 국제결혼을 권장하는 종교단체에서 행사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분들의 경우에는 일단 한 번 결혼식은 했지만 한국에 와서도 다시 하고 싶어 하거든요. 전통혼례식을 한국식으로..그런 경우에는 그런 의견들이 거의 받아들여지지가 않죠. 그러니까 그분들은 한국사회와 한국문화에 융화를 하고 싶어도 그것이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자기 자녀를 교육을 시키는데도 당연히 어려움이 있죠. 엄마가 먼저 융화가 되어야..

박인규 : 그렇죠. 엄마가 먼저 한국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오수연 : 그렇죠.

박인규 : 말씀을 듣고 보니까 우선 한국남성들..외국 여성들을 신부로 맞이한 한국 남성들이 서로 문화가 다르다..그리고 이 여성을 한국문화에 익숙하게 해 주어야 한다..그런 나름대로의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부족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 거고요. 또 하나는 그런 며느리, 외국인 아내를 국내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사회나 국가가 해 주어야 할 일도 있을 거 같아요. 예를 들면 국적을 빨리 취득하면 다를 수도 있겠다..이런 말씀도 있는 거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국적 취득한 관한 것은 문제가 없습니까?

오수연 : 이 문제는 약간의 복잡한 얘기가 되는데요. 이분들이 외국인 신분으로 일단은 오지 않습니까? 결혼을 하고 일정기간이 지나야 귀화를 해서 국적을 취득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이귀화' 라고 하는데요. 결혼을 통해서 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말입니다. 그런데 간이귀화의 요건이 굉장히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한 상태로 2년 이상 대한민국에 살던지, 또는 3년 동안 혼인상태를 유지하고 1년은 대한민국에 살던지..이런 요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도 귀화를 신청하러 갈 때 남편이 동의해서 같이 동행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간 동안에는 이분들은 전혀 혹시 그 사이에 남편의 잘못으로 결혼상태가 유지가 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분들은 아무 하소연 할 곳 없이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아이를 낳으면 많은 경우는 아이는 빼앗기고 자기는 그냥 돌아가고..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물론 인권문제가 있는 거고요. 또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아이도 또 문제가 됩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은 했지만 결혼상태는 유지되지 못하고 아이를 혼자 기르는 외국인 여성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주 여성들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들은요. 이 간이귀화 요건에 거주기간 요건에 이 조항을 없앨 것..이 상태는 완전히 남편이 칼자루를 쥐고 있거든요.

박인규 : 결혼과 동시에 국적을 부여할 것..?

오수연 :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홀로 기르는 외국인 여성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모자복지법으로 보호할 것..그리고 또 이주와 국제결혼의 증가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자국민 우선주의를 버리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 용할 것..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최근에 언론 보도를 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100만이 넘고 단일민족이 아니다..하면서도 역시 다른 인종, 다른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데는 우리가 조금 많이 부족한 것 같군요?

오수연 : 네. 그렇습니다.

박인규 : 또 다른 테마 중에 하나가 봉제노동자에 관한 실태 조사를 하셨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저희들은 봉제 노동자라고 하면 1970년대 전태일..이런 사건들을 떠올리는데요. 아직도 봉제노동자, 봉제 공장들이 많이 있는 것인지..실제로 어떻게 살고 계신지 좀 궁금하네요?

오수연 : 요즘엔 동대문 상가 주변이죠. 그쪽을 취재해 보니까 70년대에는 청계천 주변에 토끼장 같다고..그렇게 묘사를 했는데 소규모 공장에서 봉제노동자들이 꽉 차서 밤낮없이 일하는 그런 장면이었다면 지금은 이 공장들이 다 흩어져서 반 주택..가내수공업 형태로 동대문 상가 주변에 많아요. 왜냐하면 동대문 상가가 재료부터 생산에서 판매까지 이뤄져 있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차이라고 하면요. 예전에는 잔업, 야근에 시달렸다면 이제는 일거리가 있을 때는 정신 없이, 밤낮 없이 돌아가고 일거리가 없으면 또 불안과 초조..일거리가 없으니까 말이죠. 떨게 되고요. 또 예전에는 점퍼 한 장을 박으면 공임이 5천원이었답니다. 80년대에는요. 그런데 지금은 디자인이 더 복잡해져서 한 장 박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 데요. 그런데 공임은 한 장당 4천원으로..오히려 더 낮아졌다는 거에요. 그래서 70년대에는 허리띠를 우리가 조여 매고 참고 일하면 80년대에는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봉제 노동자의 경우에는 2000년인 지금까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거 같아요.

박인규 : 대략 연령대라든지, 성별로 어떤 분들이 많이 일을 하십니까? 여자분들이 많은 겁니까?

오수연 : 네. 아무래도 봉제일 같은 경우에는 주로 여자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공장에서는 남자분들이 재단사를 하시고 여자분들이 봉제사를 하셨잖아요? 그래서 만나서 결혼한 부부들 같은 경우에는 부부가 같이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남편이 재단을 하시고 부인이 봉제를 하시죠.

박인규 : 그러면 그런 봉제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그곳에서 무슨 돈을 벌어서 내가 독립을 하겠다는 등..이런 것을 생각하기가 굉장히 힘들겠네요? 여러 가지 경제적인 여건을 보면..

오수연 : 굉장히 다양한 형태가 있어요. 그러니까 공장에 나가서 일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집에서 일하시는 경우도 있고요. 또는 자기가 조그마한 사업주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청을 받아서 납품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 경우에는 누구는 사장이고..누구는 일하는 사람이고..이런 구분이 별로 없고요. 다같이 하나의 단지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요.

박인규 : 지난 2년간 봉제 노동자, 또는 대한민국으로 시집 온 동남아 며느리, 그 외 여러 가지 무슬림..이런 분들의 인권 현황을 취재 하셨다고 하는데요. 너무 단순화 시킬지는 모르지만 취재를 하시면서 우리나라 인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다, 만족할 만 하다..이런 것을 느끼셨습니까? 만족할 수는 없겠죠? 물론..

오수연 : 저는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요. 그런 것을 느꼈어요. 우리 사회가 겉은 화려해 보이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잘 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요. 취재를 해 보면 그 밑바탕이 굉장히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조각조각 균열이 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제가 봉제 노동자를 할 때도 우리가 한편으로는 소비자이자, 한편으로는 노동자인데 꼭 노동이나 임금 같은 것은 사회가 잘 되기 위해서 희생을 시켜야 되는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한 이렇게 균열이 될 것 같아요. 경제만이 다가 아니라 사람이 다 같이,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어떤 그런 인식이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수연 : 네.

박인규 : 지금부터는 시선을 나라 밖으로 돌려 볼까 합니다. 2003년도에 민족문화작가회의에 이라크 파견 작가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오셨죠?

오수연 : 네.

박인규 : 얼마나 다녀 오셨습니까?

오수연 :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1개월, 이라크에는 3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박인규 : 상당히 오래 계셨네요. 그 당시 2003년도이면 이라크 전쟁이 있었던 해가 아닙니까?

오수연 : 네. 그렇죠.

박인규 : 전쟁 와중에 들어가신 거에요?

오수연 : 전쟁 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못 들어가서 그 동안에 팔레스타인에 있었고요. 바그다드가 함락됐을 때 4월초가 될 겁니다. 그때 이라크에 들어갔습니다.

박인규 : 바그다드에 들어가신 겁니까? 그 당시에..?

오수연 : 네.

박인규 : 어땠습니까?

오수연 :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말이죠. 가기 전에는 흔히 우리가 본 폭탄이 떨어지고..그런데 그것만이 아니고 이미 전쟁 시작 전부터..전쟁이 예상되는 그때부터 전쟁인 것 같아요. 서서히 삶의 숨통이 조이고 이상하게 뒤틀리고 이런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막상 폭격이 멈췄다고 해도 그 사회가 돌아가던 사회가 멈춘 것이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수도가 들어오지 않고, 먹을 것도 없고, 직장도 없고, 병원도 안 돌아가고, 학교도 없고, 이런 상태..도로는 파헤쳐지고..여기서는 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이 그 순간만이 아니고 전과 후가 굉장히 고통스러워서 정말 될 수 있으면 이런 것은 안 해야겠구나..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인규 : 전쟁이라는 것이 무슨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수연 : 네.

박인규 : 약간은 우문이 되겠지만 그 당시 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들어가실 생각을 하신 것이며, 가서 하신 것은 주로 관찰을 하신 겁니까? 관찰이라는 표현이 약간은 객관적이기는 하지만..

오수연 : 제가 가게 된 것은요. 저는 일단은 이라크 전쟁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건 전쟁도 아니고 침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박인규 : 침략이다..?

오수연 : 네. 침략이다..이렇게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데 '나는 이렇게..세상은 참 그래..'라고 생각하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 왜 앉아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전쟁이 정말 나쁘다는 것을 제가 가서 보고 전달하든, 아니면 단순히 그곳에 가서 이것은 아니라고 얘기를 하든, 아니면 누구 하나라도 돕든지 말이죠. 어떤 일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갔었어요.

박인규 : 그때 다녀오셔서 〈아부 알리, 죽지마〉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그 아부 알리라는 사람이 약간은 이 질문도 우문인데요. 죽었습니까?

오수연 : 그렇다고도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왜냐하면요.

박인규 :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요. 이런 겁니다. 가서 그런 것을 책으로 내셨기 때문에 무언가 가서 전쟁을 보자, 무언가를 느끼자, 막을 수 있으면 막자..라고 생각을 하셨다고 하는데요. 그런 생각을 가지시고 가서 약 4개월을 보시고 책까지 쓰셨단 말입니다. 무언가 그것에 대한 이라크 전쟁이라든가, 어떤 중동지역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나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셨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오수연 : 네. 저도요. 당위적으로 전쟁을 하면 정말 나쁘고, 전쟁이 벌어지니까 그곳에서 전쟁을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갔었는데요. 막상 가서 보면 어떤 문화가 안 그렇겠습니까만 저는 아랍 문화의 전통과 역사와 품위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 분들이 세상에 당하려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당하게끔만 운명이 주어진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어떤 이유에선가 계속되는 분쟁과, 전쟁과, 또 편견..아랍, 중동, 테러리스트 이런 것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래서 참 안타까웠고요. 아부 알리라는 것은 대표적인 이름이에요. 알리라는 이름이 굉장히 많고, 아부 알리는 알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남성의 절반 이상은 아부 알리이고, 길거리에서 아부 알리~라고 하면 절반쯤은 돌아볼 만큼..

박인규 : 우리나라로 치면 갑돌이 같은..?

오수연 : 그렇죠. '김씨~' 이렇게..그런데 지금 이런 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죽지 말았으면..그런 생각에서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박인규 : 중동지역을 얘기하면 사실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지역의 편견에 의해서 고생하고 말하자면 핍박당하는 지역이라고 하는데요. 우리나라에도 모슬렘 또는 아랍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2001년에 9.11사태가 난 다음에 우리나라에 있는 모슬렘, 아랍인들도 거의 잠재적 테러리스트인 것처럼 많은 고난을 당했다고 해요. 실제로 국내에 계신 분들과도 취재를 하셨으니까 국내에 계신 아랍인들이나 모슬렘들의 상태는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죠?

오수연 : 국내에 있는 사실 어떤 것도 파고들면요.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것이 구체적인 현실인데요. 모슬렘인들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니까 이슬람권에서 나라에서 온 대사관 직원이라든가 외교관과 같은 분들로부터 노동자까지..그러니까 천차만별이죠. 그리고 모슬렘 자체도요. 굉장히 생각도 천차만별로 다릅니다. 물론 종파도 다를 수 있고, 또 굉장히 우리도 불교도 굉장히 다양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도 그렇고..모슬렘나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슬람교에 대해서만은 이슬람교를 믿는 모슬렘 신자에 대해서만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박인규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수연 : 네. 우리나라 사람들이요. 과격하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꾸란을..' 이런 말이 있지도 않답니다. 이슬람교는 평화..이슬람이라는 것 자체도 평화이고 또 한없는 용서와 관용을 중요시 한다고 해요. 그런데 이분들을 대체로 과격하다, 테러리스트다, 또 이주 노동자다, 아주 간단하게 보는 것 자체가 저는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그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군요?

오수연 : 네.

박인규 : 작가라면 대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글을 쓰시는데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시고 싶은신지 간단하게 마무리 말씀으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수연 : 제가 요즘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살면 좋을텐데요. 제가 보기에는 세상이 말이죠.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전쟁 같은 것을 주기적으로 치르면서 그 대가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방관하는, 또는 묵인하는 우리는..우리나라도 군대가 이라크에 가 있지 않습니까? 묵인하는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그래서 그 출구를 찾자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희망을 잃지 말자?

오수연 : 네.

박인규 :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수연 : 네.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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