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 참가자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 기본권이 바로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우선 평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이 적어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노동운동은 차츰 쇠퇴했다. 이제는 누구도 '노동운동의 위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날 참가자들은 "위기를 더 키운 것은 통합진보당 사태로 표상되는 진보정치운동의 실패"라고 거듭 주장했다.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모습.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
"냉혹한 현실, 1987년 후광은 끝났다"
토론회 첫 발제를 맡은 노중기 한신대 교수는 "1987년은 이제 '현재'가 아니라 완연한 '역사'가 됐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지금 우리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시작한 한 시대, 한 세대의 마감을 보고 있다"며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가 끝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표면적으로는 두 달 반 만에 종결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를 바탕으로 이후 10년을 거치며 노동운동이 더욱 심화, 구체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민주노총의 뻥 파업은 이번에도 되풀이 되었으며 통합진보당 사태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처참한 현실도 드러났다"말했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은 "1987년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냉혹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 대투쟁이후 민주노조운동이 발전하며 노동조건이 전반적으로 개선되고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일환인 진보정당운동이 일정부분 성과를 보였다"며 "그럼에도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표성을 잃어버렸고 이에 따라 단체교섭을 통한 노동자 보호에도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고 싶다"는 한탄도 나왔다. 홍지욱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이렇게 말하며 "전국노동자협의회의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구호는 이미 퇴색됐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조에 한정되면서 절대다수의 비정규, 중소영세 노동자들은 무(無)노조, 무(無)권리상태로 배제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의 시작은 '1997년'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만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라고 진단했다. 노 교수는 "외환위기는 노동운동을 하는 데 있어 물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사건"이라며 "97년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구속되었고, 이에 따라 구조적 고용불안에 지속적으로 놓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서 참가자들은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를 이식한 장본인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라고 지적했다. 소위 이들 '자유주의 정권'이 87년 이후 꾸준히 성장하던 노동운동을 무력화했단 얘기다.
김 정책위원장은 "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재벌간 경쟁격화, 빚을 통한 문어발식 거대 투자가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자본의 위기였다"며 "그 위기를 틈타 초국적 투기자본이 한국에 뼈아픈 구조조정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정권은 초국적 자본 요구에 굴복해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했다"며 "구체적으로는 정리해고를 합법화하고 파견제를 도입하는 등 노동시장을 유연화 하는 데 앞장섰다"고 비판했다.
전재환 민주노총 인전지역본부장은 "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노동 계급이 급격화 보수화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전 본부장은 "정규직·대기업·조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유지를 최우선으로 두며 개인주의에 빠졌고, 더 나아가 비정규직은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전락했다"고 설명했다.
전 본부장은 민주노총이 국회와 정부를 통한 지원과 협상에만 의존하는 것도 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단적인 예가 SJM 용역 폭력 사태다.
그는 "SJM에서 발생한 불법직장폐쇄와 용역투입은 한 단위사업장의 사안이 아니라 민주노총 전체의 문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투쟁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며 "오직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노동부 고소고발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지난달 13일 민주노총은 13차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했다. 사진은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연합뉴스 |
"민주노총, 진보정당과 결별하라"
토론은 곧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운동 간 관계설정 문제로 옮겨갔다.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진보정당운동은 "일단 실패"라고 평가했다.
김 정책위원장은 "진보정당에서 노동중심성과 가치가 실종됐다"며 "강령과 목표에서 자본주를 극복하려는 지향점이 사라졌고, 자유주의 세력과 통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하지만 민주노총도 누구보다 책임이 크다"며 "당원의 다수가 민주노총 조합원임에도 이들과 함께 진보정치를 만들지 못한 것은 우리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진보정당은 어쨌든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김 위원장은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포기하는 순간 보수정당들에게 노동자들을 다 맡기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최만정 민주노총 충남본부장은 진보정당과의 결별을 요구했다. 최 본부장은 "진보정당에서 민주노총이 하루빨리 독립해야 한다"며 "의원내각제을 도입해 여러 정당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개혁을 꾀하고, 민주노총은 자체적 정치 파워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민주노총이 단일한 정치노선을 가질 수 없는 '대중조직'이란 점을 강조했다. 김 소장은 "수십만 규모의 민주노총에서 정치적 견해와 사상이 다양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대의원대회 등을 통해 하나의 정치방침을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 기본원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김 소장은 "정당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하라고 하되,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운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고 자기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 요구는 타성에 젖은 생각"이라고 비판하며 "실패했다고 모두가 진단하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당위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박하순 노동자운동연구소 소장은 "민주노총이 진보정당과 거리 두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며 "노동조합 안에서 정치적 생각을 토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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